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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김유신.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화랑 김유신.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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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시대(632∼647년)는 제28대 진덕여왕 시대와 더불어,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대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데에 필요한 초석을 다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신라의 '투톱'으로서 대활약을 펼친 콤비가 바로 김춘추-김유신이었다. 김춘추는 외교방면에서, 김유신은 군사방면에서 서라벌의 기적을 창출했다.  

그중 한 명인 김유신이 지난 6월 16일 방영된 <선덕여왕> 제8회에서 서라벌 데뷔에 성공했다. 천명공주(박예진분)와 미실(고현정분)이 사열하고 화랑들이 도열한 가운데, 김유신(엄태웅분)이 이끄는 용화향도는 공주가 하사하는 깃발을 받고 서라벌의 화랑도로 인정을 받았다. 망국인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으로서 신라 정계의 주변부를 맴돌던 김유신 집안이 중앙무대에 명함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드라마 <선덕여왕>만 놓고 보면, 김유신의 출세는 천명공주 작품이 된다. 김유신을 서라벌로 불러올리고 음으로 양으로 그를 계속 지원하는 사람은 천명공주다. 미실 역시 김유신의 서라벌 데뷔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천명공주의 요구에 응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김유신의 출세를 도운 2명의 인물은 누구?

소년 김유신의 출세 과정이 담긴 드라마 <선덕여왕>을 시청하면서, 우리는 '그의 출세에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준 실제의 인물이 누구였을까'하는 점에 대해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노군(현재의 진천)으로 도망가서 신혼살림을 차린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아들인 데다 결정적으로 옛 가야 왕족의 후예라는 점 때문에 서라벌 무대에 진출하기 힘들었던 소년 김유신을 엘리트 화랑으로 끌어올린 실제 인물은 누구였을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소년 김유신의 출세를 도운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는 이 점에 관해 꽤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는 소년 김유신의 출세를 도운 2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한 명은 만호태후다. 만호태후는 동륜태자(진흥왕의 장남)와의 사이에서 진평왕을 낳고 숙흘종과의 사이에서 만명부인을 낳았기 때문에, 김유신에게는 외할머니가 되는 사람이다. 현존 <화랑세기>(필사본) 제15세 풍월주 유신공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김유신)이 자라자 태양 같은 외표가 있었다. 태후(만호태후)가 그를 보고 싶어 돌아올 것을 허락하고는, 그를 보고 기뻐하며 '참으로 나의 손자로구나'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만노군에서 자란 김유신이 태양과 같은 외표, 즉 군주다운 위용을 갖춘 인물이라는 소문을 들은 만호태후가 그를 서라벌로 불러들였음을 알 수 있다. 외조부모에 대한 부모의 죄(동의 없는 결혼)를 씻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김유신의 인물 됨됨이가 출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서라벌로 올라왔다고 해서 소년 김유신이 출세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이 태수(최민수 분)의 육사 입학을 가로막았듯이, '가야왕실의 후손'이라는 출신성분은 김유신의 인생에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유신의 출세를 도운 '미실'

김유신 출세를 미실이 도왔다면?
 김유신 출세를 미실이 도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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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김유신에게 날개를 달아준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미실이었다. 현존 <화랑세기>(필사본) 유신공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때는 김유신이 15세가 되던 609년이었다.

"호림공의 부제인 보종공이라는 사람은 미실 궁주의 막내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설원이라고 불렸다. 공(김유신)이 중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위를 양보했으니, 이는 대개 궁주가 태후(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르면, 소년 김유신이 서라벌에 올라왔을 당시의 화랑의 수장은 제14세 풍월주인 호림공(재임 603~612년)이었다. 그리고 화랑의 제2인자인 부제는 미실의 아들인 보종이었다.

한국고대사 연구자인 이종욱은 <동아연구> 제39집에 발표한 '풍월주의 임명과 퇴임'이라는 논문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부제가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받았다'고 기술했다. 따라서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차기 풍월주의 자리는 보종에게 넘어갈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보종은 부제의 지위를 김유신에게 선뜻 양도했다. 이것은 차기 풍월주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훗날 보종이 김유신의 뒤를 이어 풍월주가 되긴 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보종이 그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어머니인 미실의 명령이 있었다는 점이다. 김유신의 외할머니인 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미실이 보종에게 자진 사퇴를 명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유신은 호림공을 보좌하는 부제의 자리에 올랐고, 3년 뒤인 612년에는 그것을 바탕으로 제15세 풍월주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청소년대표팀' 주장 경력이 훗날 '국가대표팀' 주전 자리를 꿰차는 데에 큰 발판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미실의 전방위적 활약의 끝은 어디일까

이러한 사실들을 본다면, 평생 '2부 리그'에서만 맴돌 뻔했던 소년 김유신이 서라벌의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만호태후와 함께 미실 궁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미실의 기여를 대단하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만호태후는 자기 손자를 위해서 그렇게 했겠지만, 미실은 자기 아들인 보종을 뒤로 물리면서까지 김유신의 앞길을 터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김유신이 출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유신이 예뻐서도 물론 아니었다. '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현존 <화랑세기>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속에는 미실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진평왕의 어머니로서 신라왕실의 막후실력자인 만호태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에서 김유신 역을 맡은 배우 엄태웅.
 <선덕여왕>에서 김유신 역을 맡은 배우 엄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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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태후가 진평왕 재위기의 막후실력자였다는 점은, <신라문화> 제25집에 실린 한국고대사 연구자 이정숙의 논문 '중고기 신라의 중앙정치체제와 권력구조' 등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만호태후는 노리부·수을부·김후직 등과 더불어 진평왕 초기의 정국을 주도한 바 있다.  

이러한 당시의 정국을 보면, 미실이 만호태후의 환심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김유신의 부제 및 풍월주 취임에 적극적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변방에 버려둔 손자라 하여 만호태후가 안쓰럽게 여겼을 김유신의 앞길을 터줌으로써 만호태후의 정치적 협력을 이끌어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만호태후가 직접 하기 힘든 일을 미실이 대신 처리해준 셈이었다.

만호태후와 함께 미실이 소년 김유신의 출세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가 위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삼국시대의 이미지 중 하나에 대해 새롭게 음미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현존 <화랑세기>(필사본)의 내용대로 미실이 김유신의 출세를 도운 게 사실이라면, 백제·고구려의 멸망 및 신라의 대동강 진출이라는 사건과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김유신의 서라벌 데뷔라는 사건의 배후에 '악녀' 미실이 숨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미실의 전 방위적 활약의 끝은 어디였을까?


태그:#선덕여왕,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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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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