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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년여간, 대학을 졸업해서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던 나는 1년 만에 관성이 생기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그 안에 진심을 담고 살고자 했던 내가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물음표를 수없이 붙이게 됐다. 열정적이지 못한 내 모습을 보며 이러면서 내가 평생 시민단체같이 '나눔'을 지향하는 일을 하겠다고 했었던 건가 싶어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열정적으로 살지도 못할 거라면, 나눔에 대해 이리도 쉽게 관성에 젖는 나라면, 내 주위 사람에게 만이라도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난 끝없이 내 안으로만 파고드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민단체 생활을 정리하기로 얘기를 마쳤다. 개운하고 뭔가 새로운 마음이 생길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건 오로지 공허함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애지중지 날 키워주셨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삼우제날은 6.10 기념 촛불 문화제가 있는 날이었다.

 

매일 7cm 하이힐을 신고 다니던 직장인, 친구의 전화

 

할아버지의 삼우제를 마치고 다음 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삼우제는 잘 마쳤냐고 물으며 친구는 오늘 촛불집회에 안 나오냐고 물어봤다. 평소 내가 토익공부와 어학연수가 아닌 학생회 간부와 동아리활동으로 대학생활을 보내는 것을 답답해 하던 내 10년지기였다. 친구는 이미 취업을 해서 운동화를 신는 날은 1년동안 열손가락에 꼽아야 하는 멋쟁이가 되어있었다. 취업을 했으니, 너도 근로자이니, 메이데이 행사에 나가보자고도 해보고, 너도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같이 알자며 강연도 제안해봤지만 번번이 퇴짜를 놓던 친구였다.

 

"너 어디야?"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는 듯 했다. 매일 야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에 얼른 들어가서 자는 친구가 10시가 넘은 시간 집이 아니었다. 친구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날 '쿵' 하고 때렸다.

 

"촛불집회 왔어~! 야, 사람 진짜 많아. 넌 어디야?"

 

야근을 마치자마자 남자친구를 졸라서 시청광장에 촛불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내가 할아버지 간호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야근을 마치자마자 일주일에 3번 넘게 꼭꼭 촛불을 들러 갔었다고 했다. 내가 당연히 시청광장에 있을 줄 알고 같이 집에 가자고 한 전화였다. 하지만, 난 집에서 TV도, 컴퓨터도 고사하고 이불 위에서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미안, 오늘 일이 있어서 못 갔어. 내일 꼭 같이 가자."

 

얼렁뚱땅 핑계를 댔다. 친구는 행진하고 있다면서 내일부턴 운동화를 차에 넣어놔야겠다고 했다. 취직한 이후, 주말 늦은 시간, 집 앞이 아니면 늘 높은 힐을 신고 있던 그 애가 하는 얘기라고는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난 친구 손에 이끌려 촛불을 들러 나온 나를 마주하게 됐다.

 

 

'촛불의 마음'을 느끼다

 

촛불을 들러 나가니 학생회하던 시절부터 시민단체 생활 하면서까지 다양하게 인연을 맺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엔 내가 평소 존경하면서 잘 따르던 선배도 있었다. 선배는 늘상 그랬듯 어눌하지만 따뜻하게 내 안부를 물었고, 단체 생활을 정리하고 집에 콕 틀어박혀 지낸다는 얘기에 한동안 아무말도 없더니 그럼 같이 자봉단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선뜻 대답하지 못했지만, 완곡히 돌려서도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직장을 마치자마자 왔는지 서류가방 하나씩 들고 있는 넥타이 부대들과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를 한 품에 안고 한 손으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분위기 아늑한 찻집 대신 착한 촛불들로 가득한 시청광장으로 손잡고 나온 연인들, 그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난 자봉단 조끼를 입고 있었다.

 

나를 살린 촛불, 어디에선가 삶의 온기로...

 

그 이후 두 달여간 난 자봉단 생활을 계속 하게 됐다. 어쩌다 자봉단을 하게 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늘 이 한마디였다.

 

"촛불에 말린 거죠, 뭐."

 

그랬다. 촛불을 들고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날 치유해줬고, 내가 정말 내 주위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난 그 무엇보다 지금 '촛불의 편'이어야 한다고 얘기해줬다. '나눔'이란 관념에만 얽매여 있었던 나에게 촛불은 '그게 바로 나야. 그게 바로 여기야'라고 얘기하는 듯 했다.

 

얼마 전, 촛불 1주년을 맞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벌써 1년이 지나있었다. 그리고 난 지금 새로운 시민단체에서 상근생활을 하고 있다. 내 안의 함정에 빠져 끝없이 '나를 위해' '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할 때 그 차가운 마음을 녹여줬던 촛불. 촛불을 든 사람들. 그들을 만난 지 1년이 지났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그들은 비록 지금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믿는다. 그들의 그 따뜻하고 정의로운 마음은 조금씩 이 나라를 경쟁과 시기, 반목과 대결이 아닌, 나눔과 평화, 연민과 사랑이 가득 찬 곳으로 만들어갈 것이라는 걸 말이다.

 

난 촛불이 나를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여기에 있게 했다는 걸 평생 잊지 않을 거다. 그들은 지금 일상 어디에선가 그들의 향기와 온기를 그들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하며 살고 있을 것이기에 나 역시 이 자리에서 '촛불의 마음'을 간직하고 나누며 살아가고자 한다는 것을 이 글과 마주할 많은 '착한 촛불'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차마 그 때 하지 못했던, 고맙단 인사도 함께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촛불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 응모글


태그:#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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