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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고향집 골목 끝 집에 살던 소꿉친구 창현이네 누님(71세·이금선) 결혼 사진이다. 아버지가 철공소를 운영했던 신부 친정도 잘살았지만, 신랑(71세·김성진)도 군산 째보선창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신랑·신부가 동갑내기에 한동네에 살았으며, 고등학교 동기이고, 졸업과 동시에 약혼하고 이듬해 결혼했다는 게 흥미를 끈다.

흔한 결혼식 사진을 올렸다고 질책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69년째 째보선창에 사는 사진 속 주인공을 통해 이승만 독재가 발악을 하던 50년대 말의 시대상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고, 애틋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담겨 있기에 허락을 받아 소개하고자 한다.

결혼식 사진. 신랑, 신부는 한 동네에 살면서도 얼굴을 모르고 지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족들이 얘기해서 알았다고 한다.
 결혼식 사진. 신랑, 신부는 한 동네에 살면서도 얼굴을 모르고 지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족들이 얘기해서 알았다고 한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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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감시하에 치른 결혼식

신부 모교인 군산여상 강당에서 치러진 결혼식은 경찰의 감시하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당시 민주당 소속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의 감시를 받던 김판술 전 국회의원(지난 3월 31일 노환으로 별세)이 주례였기 때문이었다고.

고 김판술 전 의원은 3대, 5대, 11대 국회의원과 4·19 민주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했던 1960년에는 농림부장관을 지냈고, 민주당 정책위원장·사무총장, 평민당 당무지도위원회 의장을 거쳤으며,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으로도 활동했다.   

주례를 보던 해에는 지천명을 갓 넘겼을 고 김판술 전 의원은 1906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산중학교 야구부 4번 타자로 활약하기도 했고, 성격이 활달하고 서민적이어서 농어민 밀집지역인 중동, 금암동 주민들과 잘 어울렸다.

선거를 앞두고 동네에 막걸리판이 벌어지면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판술이'라며 옆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 할 정도로 흉허물없이 지냈고, 어업에 종사하는 친구도 많았는데, 신랑·신부 부친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신부와 신랑. 수줍어하는 신부 머리의 꽃과 옷은 친정어머니가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들어준 거라고 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신부와 신랑. 수줍어하는 신부 머리의 꽃과 옷은 친정어머니가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들어준 거라고 한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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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고희를 넘겨 얼굴에 버섯꽃이 피기 시작한 노(老)신부에게 "시아버님은 째보선창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고, 친정아버지는 철공소를 했으니까 축하객들이 많았겠네요"라고 했더니 "하이고 말도 말어, 결혼식 허든 날 학교 주변에 경찰들이 쫙 깔렸었응게"라며 "처음에는 몰랐는디, 수십 명이 밖이서 보초를 선다는 얘기를 듣고 무서워서 혼났어. 어릴 쩌그였으니까"라며 신혼 시절을 회상했다. 

조선인보다 왜놈들이 더 많이 살았고 그들에게 핍박을 받아서인지 군산은 반골 기질이 강했다. 아이들 사이에도 '먹고 보자 김원전, 찍고 보자 김판술!'이라는 유행어가 회자될 정도로 자유당 후보의 돈 봉투 돌리기가 난무하던 시절에도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도시였는데, 신랑·신부 부친들도 야성이 강했던 모양이다. 경찰의 감시를 받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자식의 주례를 부탁했으니까 말이다. 

얘깃거리가 하나 더 있는데 신랑·신부 양편에 서 있는 남녀 두 사람이다. 부모도 아닌 것 같고, 우인(友人)대표로 보기에도 어색해서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측 우인대표라고 한다. 예식장에서 주례를 모시고 사진 한 번 찍기도 어려웠던 시절 결혼사진을 많이 봤지만, 이러한 기념사진은 처음 보기 때문이다. 신랑 고교동창 360명 중 200명 가까이 참석했는데 그중 선택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결혼식 가족사진 감상

결혼식 가족사진. 군인 장교의 결혼식도 아니고, 뒤로 보이는 대한민국 태극기가 이채롭다.
 결혼식 가족사진. 군인 장교의 결혼식도 아니고, 뒤로 보이는 대한민국 태극기가 이채롭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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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예식장에서 치르는 일명 '신식결혼식'보다는 마당에 차양을 치고 사모관대 차림으로 전통혼례를 치르는 사람이 많았던 50년대 말에 일반 예식장도 아닌 신부 모교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니, 예외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신부 집에서 신랑 집까지는 한 마장 거리도 안 되는 동네 결혼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매결혼이 대세였는데, 양가 부친이 가깝게 지내는 사이여서 결혼이 쉽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스무 살에 약혼하고 이듬해 결혼할 수밖에.  

친구에게 막소주 한 잔 대접 받으면서 하루에 두 끼니 해결하기도 어렵다고 하소연할 정도로 삶이 고달팠던 시절에 찍은 가족사진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쳇말로 '동네에서 말마디나 하고', '밥술깨나 뜨는 집안'들의 혼사임을 알 수 있다.

어른들 차림새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당시 유행하던 흰 두루마기 아니면 스웨터를 걸쳤고, 신부가 졸업한 학교 재단이사장 이름이 적힌 화환 두 개가 양쪽에 세워져 있으며, 지금은 50대 후반이나 60대가 되었을 어린 학생들의 차림새를 보고 하는 얘기다.

교복 단추가 하나 둘 떨어진 학생도 보이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만지거나 천정을 쳐다보는 등 주의가 산만한 꼬마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단정한 교복차림이어서 '밥술깨나 뜨는 집안' 자녀임을 알 수 있다. 중학교 진학률이 30%에도 못 미쳤던 당시 서민들 가족사진을 보면 맨발에 고무신, 까까머리에 무릎이 해지고, 바지를 몇 번씩 접어 올린 아이들이 몇 명씩 끼어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포인트는 가슴에 하얀 꽃봉오리를 단 신랑·신부 아버지 모습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풍채가 좋고 당당하며, 가족들 얼굴에서도 궁기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귀엽고 예쁜 화동들은 이 같은 사실들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고. 

첫 휴가 데이트 

부잔교를 걸으며 찍은 스냅사진과 부둣가 쇠말뚝에 앉아 찍은 사진을 붙여서 올렸는데, 신부 손의 양산이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는 티켓으로 보인다.
 부잔교를 걸으며 찍은 스냅사진과 부둣가 쇠말뚝에 앉아 찍은 사진을 붙여서 올렸는데, 신부 손의 양산이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는 티켓으로 보인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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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희를 넘긴 노(老) 신랑·신부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도 다녀오지 못했다며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데이트하면서 찍은 사진을 내놓았다. 사진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휴가도 학창시절에 취미가 '사진촬영'이었다는 아내의 취향에 맞춰서 보낸 모양이다.

은파유원지가 개발되지 않았던 때라서 군산 월명공원과 부둣가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대부분인데 신부는 한복에 양산을 들고, 신랑은 검정 선글라스를 쓰고 부둣가에서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들물과 썰물 때를 알아서 스스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 뜬다리(부잔교)는 전남 곡성에서까지 수학여행을 와서 탐방할 정도로 유명하니까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짐을 잔뜩 지고 뒤따라오는 지게꾼 모습이 이채롭다.

오른편 사진은 부둣가인데 뒤로 보이는 준설선(부두에 쌓인 갯벌을 퍼내는 배)이 4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야트막한 산등성이 몇 개도 아스라이 보이는데 가운데 지점이 채만식 문학관과 충청도와 연결된 하구둑이 있는 곳이고 그 넘어가 서해안고속도로이다.

선박이 부둣가에 닿으면 밧줄을 매다는 쇠말뚝에 한복을 입은 신부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데 이곳 역시 학생과 시민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왜놈들이 수탈해 갈 쌀을 쌓아놓았던 곳이라서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비록 경찰들의 감시를 받았다고 하지만, 많은 축하객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고, 군 복무로 잠시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나 데이트를 즐기며 얼마나 행복해 했을까. 그러나 앞으로 쌓일 세월의 고뇌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쇠라도 녹일 것만 같았던 신랑은 10여 년에 쓰러져 지금은 한쪽 팔을 맘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그래도 치과를 경영하는 큰아들 내외와 작은아들 내외가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묻고 시간도 함께 해주어 크게 위로가 된다고 한다. 

사진을 구경하고 나오면서 "태어나실 때부터 '부모복, 처복, 그리고 자식복'을 모두 타고나신 모양입니다"라고 했더니 "허허 글쎄요!"라며 밝게 웃기만 했다. 그의 웃음에서 덧없는 세월의 무상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결혼사진, #가족사진, #경찰, #군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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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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