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딸내미, 시간 있으면 엄마한테 인터넷 하는 법 좀 알려줄래?"

 

2년 전 어느 날,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퇴근한 엄마가 슬쩍 다가와 꺼낸 말이었다. 인터넷 이용 방법을 알려 주고 나서 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검색한 것은 과거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인터넷 카페였다.

 

서툰 손짓으로 카페를 찾아 들어간 엄마는 옛 사진과 친구들의 흔적들을 보며 한참을 즐거워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사진에 나온 친구들의 이름과 별명을 흥분해서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틈만 나면 카페에 들어가 친구들의 소식을 접하고 일 년에 두 번 있는 동문회에 참석하는 걸 낙으로 삼으며 지냈다.

 

20년 된 엄마의 비밀을 몰래 듣다

 

그러던 어느날 밤, 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오빠가 수의장교에 지원하기 위해 지원서를 써야 한다고 했다. 지원서에는 가족들의 신상 정보를 적는 칸이 있었다. 가족들의 이름, 나이, 학력, 직장, 직위, 생년월일까지 기입해야 했다. 오빠는 국가에 제출하는 문서이기 때문에 내용이 정확해야 한다면서 가족들에게 일일이 정보를 확인하며 칸을 채워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도 엄마는 계속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다음 날 아침, 엄마의 목소리에 살짝 잠에서 깼다. 조용히 눈만 간신히 살짝 떠 말소리를 들어보니 엄마가 오빠를 부르고 있었다. 오빠를 부른 엄마는 잠깐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으며 오빠에게 미안하다고 소리쳤다. 오빠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엄마를 다독이며 뭐가 미안하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엄마는 오빠에게 오래된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집안 사정상 초등학교까지만 졸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과 여자는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 없다는 당시의 인식이 더 이상의 공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엄마의 고백을 듣는 순간 나는 잠이 확 달아나는 걸 느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남매는 엄마가 중학교까지 졸업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내 오빠는 그게 뭐가 미안한 일이냐고 괜찮다면서, 흐느끼는 엄마를 위로했다.

 

조용히 누워있던 나도 눈물이 쏟아졌다. 매번 자식들을 속이면서 초라함과 죄책감을 느꼈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 동안 나와 오빠를 속이며 혼자 얼마나 죄스러워 했을지 묻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속인 게 어디 우리뿐이었을까. 그 심적 부담이 굉장히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고백을 나까지 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엄마가 더 속상해 할까봐 난 여전히 자는 것처럼 숨죽여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나에게 큰 엄마, 나에게 작은 엄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엄마가 인터넷을 배우고 난 뒤, 이상하게도 자신의 초등학교와 관련된 추억만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중학교 친구들을 찾지 않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수 있었는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의 학력이 중학교 졸업이든 초등학교 졸업이든 그건 우리 남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엄마의 학력이 중학교 졸업이라고 알고 있었던 어렸을 때도 난 그 사실을 한 번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었다. 비록 남들보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지혜롭고 강한 엄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 엄마들 중에는 대학까지 졸업한 경우도 많았지만 자기 자신의 욕심만 드러낼 뿐, 엄마보다 자식을 반듯하게 키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엄마가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안쓰러워졌다. 어린 시절, 엄마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일까지 하며 자신의 남동생은 대학에 보내 반듯하고 청렴한 공무원으로 키웠다. 그 후, 자신의 삶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우리 남매를 키웠다. 그 힘들고 기나긴 삶의 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부끄러움과 한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들었을 것이다. 그 모든 수모를 이겨내고 우리 남매를 길러낸 엄마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20년 동안 우리 남매를 속였다고 한들, 나에게만은 자랑스러운 엄마라는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또,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을 그 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딸이 엄마에게 주는 선물

 

배우지 못한 한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엄마 역시도 그랬다. 자신이 어릴 때 배운 한글이 세월이 지나자 점점 현재 맞춤법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게 부끄러워 제 자식이 먹을 도시락에 그 흔한 쪽지도 넣어 주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내가 심하게 반찬 투정을 부린 다음 날, 그 하루, 한 번뿐이었다. 영어 알파벳이 헷갈려 인터넷을 할 때마다 자신의 아이디도 항상 딸에게 물어 확인하는 엄마였다. 그 순간마다 엄마는 딸에게 말하지 못할 수치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딸인 내 앞에서 충분히 당당해질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20년을 희생과 사랑으로 키워주셨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지식수준을 드러내는 일이 있을 때마다 딸 앞에서 의기소침해지는 엄마의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남매가 대학을 졸업해서 엄마의 무거운 짐이 조금이나마 덜어졌을 때, 엄마에게 중학교 입학허가서를 선물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는 꽤 많았다. 주부들만 다니는 학교부터, 20대 젊은이와 70대 노인이 같이 다니는 학교도 있었다. 이런 학교에 엄마가 다니게 된다면 같은 처지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크게 갖지 않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조그만 종이가 50년 쌓인 엄마의 한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딸 앞에서도 당당히 미소 짓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다. 이를 위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세상에 당당해진다면 내 선물은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그 선물을 통해 이제는 '초라한 엄마'라는 이름 대신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고 멋있게 살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선물> 응모글


태그:#선물, #엄마, #배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