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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우리 곁을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 그의 서거로 인해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제 영욕의 세월을 숱한 부침 속에 살아낸 그의 생애도 '역사(歷史)' 안으로 편입된 것이다. 정파와 입장에 따라 그의 삶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겠지만, 그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더불어 그가 보여주었던 '개혁'을 향한 시도와 노력은 이제 산자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동서가 화해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모든 차별과 갈등, 편견과 우상들이 무너지는 새로운 세상이 언제쯤 가능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그가 가졌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생각보다 더 두껍고 높았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비운과 노무현의 서거

 

서울에서 구파발을 거쳐 통일로를 따라 가다 보면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大慈洞)이 나온다. 그곳에는 최영 장군 묘와 함께 소현세자의 두 아들인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가 위치해 있다. 지난 5월 23일 아침, 역사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했다. 원래는 인근 서삼릉(西三陵) 한 구석에 위치한 소경원(昭慶園, 소현세자의 묘)을 방문하려 했으나, 그곳은 1960년대 말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종마목장과 농협중앙회 전용목장 등이 건설되고, 군부대까지 들어서는 바람에 당초 120만평에 달했던 서삼릉 부지가 지금은 7만평으로 쪼그라들어 있고, 그 가운데 소현세자 묘역은 들어가는 길이 막혀버려 수십 년 째 영어(囹圄)의 땅이 되어 있다. 관에 미리 신청하여 허가를 득해야만 방문이 가능한 그 곳은 죽어서도 후손들과의 자유로운 만남이 통제되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소현세자의 서글픈 초상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결국 소현세자는 포기하고 그의 아드님들이라도 뵐 요량으로 경안군과 임창군 묘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니 예전에 없던 울타리가 쳐져 있고,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침부터 고향 친구가 문자로 보내온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으로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던지라 없던 담이 생겨 출입이 불가능해지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때마침 그 땅 주인 아주머니께서 귀가하던 길이라 잠긴 문을 열어주셨다. 일행들과 함께 '소현세자'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자, 그 아주머니는 자신이 소현세자 후손 집안의 며느리라고 말하더니, 오늘 아침에 소경원(昭慶園)에서 소현세자의 기제사(忌祭祀)가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순간 필자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 했다. 아, 어찌 새 시대를 꿈꿨던 비운의 인물들은 그 죽음의 때도 이토록 함께 하는가?

 

격동의 1636년. 만주 여진족이 세운 후금(淸)은 명나라를 치기 전, 조선을 먼저 쳤으니 바로 '병자호란'이었다. 이때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 Nurhachi)는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고, 조선 왕자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붙잡아 왔다. 심양(瀋陽)과 북경(北京)으로 잡혀 갔던 9년 세월 동안에 소현세자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양국 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또 소현세자는 명나라 때부터 북경에서 활동 중이던 예수회 신부인 아담 샬(J. A. Schall, 1591∼1666, 중국명 湯若望)에게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우고,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 천주상(天主像) 등을 얻게 되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는 서울로 돌아왔으나 그의 개혁적이고 친청(親淸)적인 모습은 인조와 서인들의 반감을 샀고, 귀국한지 2개월 여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급사(急死)하고 말았다. 세자빈과 여러 대신들은 소현세자의 사인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 <인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지금까지도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많은 학자들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뒤 세자빈과 그의 가족들도 역모를 꾸몄다 하여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1600년대 중반의 격변기 속에서 새로운 국가관계를 모색하고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수용했던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소현세자의 행동은 그 시대의 보수적인 이념과 세력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이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소현세자의 제삿날 아침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이다. 이는 비록 우연의 일치라 하겠지만 나름 나의 역사적 비애감(悲哀感)을 가중시켰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바로 옆 '최영 장군 묘'도 들렀다. 항상 시간에 쫓겨 그곳까지 오르는 것은 외면되기 일쑤였지만, 그날은 왠지 모를 이끌림에 최영 장군 묘까지 올랐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최영 장군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고 등산객 같은 어떤 할머니가 그 앞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더니 결국은 노무현도 덧없이 갔구나! 갔어." 그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최영 장군은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팔도도통사로서 전쟁을 지휘했으나, 출병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지 못하고 이성계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1389년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했다. 최영은 충신이자 명장이면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청렴하게 지내어 공직자들에게 귀감의 대상이 되었다.'

 

소현세자와 노무현을 오버랩시키며 뭔가 멍한 상태로 올랐던 최영 장군의 묘소. 그 곳에서 만난 한 촌로(村老)의 넋두리를 들으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한 8:7)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도 함께 귀에 울려왔다. 이 시대 역시 '최영'과 같은 삶을 살려고 부단히 애쓴다 한들 결국 죽음의 길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인가? 혹 봉하마을에 조성될 묘역은 또 다시 소현세자가 묻힌 소경원 언덕처럼 고립무원의 땅이 되지는 않을까?

 

지난 5월 23일, 나는 몇 몇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자리들을 돌아보며 이 시대도 그 때와 다를 바 없이 새로운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는 역사의 도상임을 절절히 느껴야 했다. 그리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마지막 문장의 그 교훈 앞에서 '자본주의'의 철저한 시녀들로 전락한 현대인에게 저 노(老) 장군의 기침소리가 준엄하게 들리는 듯했다.

 

600년 뒤에도 최영 장군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결벽증에 가까운 도덕성을 지켜내려 했던 한 지도자. 또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갖은 정치실험과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소현세자처럼 그 또한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제 고양 대자동(大慈洞) 골짜기에 들어서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태그:#소현세자, #경안군, #최영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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