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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는 아랑곳 않고 천정부지로 오르는 학자금은 여대생들의 삭발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학생 본인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가계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반값 등록금' 공약을 내건 바 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입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최근 '등록금이 가계에 끼치는 영향'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등록금 대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전국네트워크'와 공동으로 두 달여 동안 기획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오마이뉴스>는 '유명인사들이 말하는 등록금', '나의 등록금 고지서를 보여드립니다' 등 다양한 기획 기사를 내보낼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나의 대학생활은 '알바'라는 두 글자로 점철됐다. 중공업 하청노동자이신 아버지와 식당일을 나가시는 어머니의 월급으로는 한 학기에 300만 원이 넘는 내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남자는 서울로 가야 한다'는 허세에 휩쓸려 나는 재수까지 하며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려 했고, 그 결과 숙식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새내기가 된 1학기 '알바'를 안 할 때 나의 별명은 '무일푼'이었고, 자연스레 시작한 '알바'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입학금은 어떻게 마련했지만 2학기 등록금 대책은 없었다.

 

신입생 시절 내 별명은 '무일푼'

 

여름 방학 때 다른 친구들은 통선대를 간다, 배낭여행을 간다 했지만, 난 당장 울산 집으로 내려가 내 몸무게보다 20kg은 더 나가는 대리석을 두 달 꼬박 날랐다. 건물 외벽에 대리석을 붙이는 석재 외장 일을 하는 아저씨를 새벽부터 밤까지 쫓아다니며 비바람과 무더위와 싸웠고, 겨우겨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없어 보이는 외모에 자꾸만 까매지는 게 싫었고, 어릴 적 드라마에 나오던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을 너무나도 가고 싶었다. 그래서 2학기가 시작된 후엔 은행의 사무보조일을 하였다. 가입서류를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그날 할 일을 다 못하면 퇴근시간이 지나서도 해야 했기 때문에 야간 수업에 늦기 일쑤였다. 가만히 앉아 하는 일이 좀도 쑤시고 해서, 한 학기를 다 못 채우고 그만두었다.

 

2학년 때도 방학 땐 항상 울산에 내려갔다. 몸 쓰는 일도 많고 급료도 나름 괜찮았기 때문이다. 새벽 5시까지 용역사무실에 나가 커피 한 잔 하며 어디론가 '팔려가길' 기다렸다. 가끔 공치는 날도 있었지만 어린 대학생은 나름 인기가 좋았다.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잘할 것 같았기 때문인 것 같다.

 

운동장만한 기름 탱크에 들어가 안에 있는 찌꺼기를 한 달 동안 닦았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그저 묵묵히 기름때를 벗기셨지만, 난 완전 무장을 하고 마스크도 썼음에도 한여름 달아오른 탱크 속의 기름 냄새에 정신줄을 놓을 지경이었다. 밀폐된 곳에서 도색 작업을 하다 사고사가 있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아찔해지곤 했다.

 

남들 배낭여행 갈 때, 대리석 나르고 기름때 닦던 나

 

어머니의 관절염이 심해지면서, 그 다음 학기 역시 등록금 마련은 내 몫이었다. 배낭을 메고 전국 일주를 하리라던 내 꿈은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번엔 조선소에서 전기배선을 했다. 강요되는 잔업 속에 새벽 5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가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강요와 압박도 있었지만 잔업을 해야 돈이 되었다. 아직 군대를 다녀오진 않았지만, 군대보다 더 군대 같은 조직문화에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시의 반은 욕이었다.

 

끼니 때가 되면 우리는 기름때와 먼지 가득한 옷을 입은 채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 옆에는 호텔 요리사 같은 사람이 배식을 해주던, 정규직들을 위한 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한겨울에 휴게실도 없어 칼바람 날리는 방파제에서 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이 너무 고돼 억울하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바다를 매일 볼 수 있는 것 외엔 정말 힘든 기억뿐이었다.

 

3학년 때는 학교 대동제 자원봉사단을 하다 알게 된 기획사 사장님의 권유로 무대 쌓는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행사장의 무대를 쌓고 철거하는 일이었다. 40kg짜리 합판을 천 개 가까이 나르던 날도 있었고 시험기간에도 일이 끝나지 않아 시험을 못 친 적도 수두룩했다.

 

내가 그 일을 안 하면 사장님이 몇 곱절로 힘들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막노동판에선 전문용어로 '십장'이라고 하는, 일종의 중간보스로 후배들을 열 명쯤 거느리고 일하러 다닌 적도 꽤 있었다. 근 일 년 동안 일을 도와드리다 사장님의 전업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성적도 말이 아니었고 여전히 배낭여행은 꿈으로 남았다. 오일장이 서는 곳을 다니며 삶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덜컹거리는 시골 버스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꿈을 꾸곤 했다.

 

등록금 버느라 몸은 고되고 성적은 떨어지고

 

몇 번의 학자금 대출을 하고, 4학년 때는 졸업 준비로 바빠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돈가스 배달을 했다. 사람 둘이 지나기도 힘든 충무로 인쇄골목을 누비며 이륜자동차가 할 수 있는 모든 불법 운전은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일방통행은 그저 표지판일 뿐이었고 인도와 차도의 구분은 없었다. 역주행도 수시로 하곤 했다. 배달은 시간이 생명이기에 양심엔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촛불시위도 가끔 나가시는 민주적인 사장님 덕에 가게 분위기는 좋았지만, 주급으로 나오는 임금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사장이 된다면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곧 닥칠 졸업 후의 막막한 미래와 무한 경쟁 속에서 양심을 지킨다는 일을 생각해보면 공허함만 들었다.

 

이제 졸업은 했지만 좁은 취업문은 절망만 안겨주었고, 넘치던 자신감도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나는 요즘 통닭집 배달 '알바'를 하고 있다. 아직 배달이 많이 없어, 비는 시간대에는 홍보물을 부착하고 다니는데 이 일이 아주 곤욕이다. 매일 같이 경비아저씨의 눈을 피해 다녀야 하고, 걸리면 혼나고, 그렇게 하면서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는데 신세가 처량해지기만 한다.

 

어렵게 졸업했지만, 취업난에 또다시 알바로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 보곤 한다. 가끔은 '알바'로 보낸 내 청춘을 한탄할 때도 있다. 누군가 그래도 인생을 많이 배우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나는 고스톱판에서도 인생은 배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지 않았냐고, 예전엔 어려운 환경에서도 고학생이 서울대 법대 합격하더라며 개천의 용이 되지 못한 나를 비난한다면, 그런 당신은 왜 MB나 '쁘띠(이)건희'의 자리에 서지 못했냐고 묻고 싶다.

 

헛되게 보내진 않았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주먹을 쥐어도 잡히는 것은 없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고리가 있는 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20대가 가기 전에 모든 근심을 털어버리고 꼭 한번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


태그:#등록금,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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