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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려 극심한 차멀미를 무릅쓰고 서울의 신촌세브란스에서 어렵게 고향집을 찾은 2006년 구정에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친구 서승이(좌측 왼쪽에서 두번째)가 어머님께 따뜻한 마음을 담아 봉투를 전달해 내게 감동을 주었다
▲ 38회 태룡계 정기총회를 하는 고향친구들 사고 후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려 극심한 차멀미를 무릅쓰고 서울의 신촌세브란스에서 어렵게 고향집을 찾은 2006년 구정에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친구 서승이(좌측 왼쪽에서 두번째)가 어머님께 따뜻한 마음을 담아 봉투를 전달해 내게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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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재활끝에 4년만에 고향친구들과 함께하는 "태룡계"에 부푼가슴으로 참석하다


'2009년 5월 2일 토요일 연무대 톨게이트 식당에서 38회 태룡계 전원참석요망'이란 휴대폰 문자메세지가 들어오면서 내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2005년 교통 사고후 2년의 입원생활과 그 이후에도 불편해진 거동에서 오는 자격지심으로 참석하지 못했던 고향친구들의 모임인 '태룡계'에 올해부터는 참석할 결심을 하고는 친구들에게도 공언 해오던 상태였던 것이다. 1964년 용띠생인 필자는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가 고향으로 6,25후의 베이비붐 세대인지라 시골 동네 이지만 또래가 유달리 많았다.

면소재지 인 고향은 약 250호 정도의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었지만 그 동네에 64년생 동갑내기가 40여명이 될 정도였고, 1972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에 어머님들이 뜻을 모아 남자애들로만 25명을 모아 '계'를 구성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기념으로 모두에게 구두를 한 켤레씩 맞춰 주고는 이젠 성장했으니 너희끼리 운영하라고 넘겨 주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몇몇이 머리를 맛 대고 갑론을박 논쟁을 벌인 끝에 소위 '계칙'을 만들고 임원진을 구성했다.

어머님들로부터 계를 인계받으면서 계칙초안을 잡은 나는 계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왕실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 자락인 고향에서 泰를 따고 용띠에서 龍을따 泰龍契로 할것을 친구들에게 제안해 채택되어 지금껏 泰龍契라 부르며 고향친구들끼리 우정을 돈독히 하고 있다. 흔히 그렇듯 시골출신들은 한 고향에서 자란 친구들은 서로 형제와 같은 우정을 가꾸는 것을 보게 되는데 우리 태룡계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혼이나 부모님들 회갑을 모두 챙기면서 이젠 부모님들 상을 함께치루며 인생의 고비를 함께 하고있다.

처음 사고 후 친구들은 내 사고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 만 2년동안 이병원 저병원 옮길때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힘을 주었다. 긴 입원생활로 점차 사회에서 내가 잊혀져간다는 초조감에 시달릴때도 고향친구들로 이루어진 "태룡계"의 계원들은 명절등 내가 외로움을 탈 만하다 싶으면 찾아주며 힘을 주곤했다. 긴 입원 생활로 주위에서 관심이 점차 끊기는 것을 느끼며, 주위사람들에 대해 서운해 하며 몸서리 친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애써 내가 그들과 입장이 바뀌었어도 그랬을 거라 자위하며, 사람이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더 의지하고 재활에 매진하곤 했다.


1972년 초등학교 입학하던해 어머님들이 뜻을 모아 결성하시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해 그 운영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태룡계는 올해로 38회 정기총회를 가졌고, 나는 4년간의 재활로 사고 후 처음 참석했다
▲ 38회 태룡계 정기총회를 마치고 1972년 초등학교 입학하던해 어머님들이 뜻을 모아 결성하시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해 그 운영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태룡계는 올해로 38회 정기총회를 가졌고, 나는 4년간의 재활로 사고 후 처음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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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입원생활로 지친 내게 고향친구들은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고향을 같이하며 어린 시절 추억을 함께 새록새록 쌓아온 고향친구들은 내게 그 존재 만으로도 상당한 힘이 되어주었다. 어린 형서의 아빠로 내 사랑하는 와이프의 지아비로 부모님의 아들로 다시 서야한다는 다짐이 내 재활의 가장 큰 動機였다면, 그다음 動機로는 고향의 들판에서 같이 뒹굴며 새록새록 추억을 쌓았던 친구들의 존재였다.

그들을 생각 하는 것만으로도 난 그들과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해야한다는 다짐이 저절로 들곤했다. 친구들도 예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며 고비고비 내게 힘을 주곤 했다. 일례로 80여 일만에 의식이 돌아오고 서울의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2006년 구정을 맞게되었고, 내 사랑하는 그녀는 구정에 그냥 병원에서 지내자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교통사고로 '외상후 스트레스'에 극심하게 시달리던 나는 10분만 차를 타도 차멀미를 심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명절에 귀성행렬에 끼어 평소에도 서울에서 3시간은 걸려야 되는 거리를 차를 타야 하는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 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살아있고,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전래의 명절에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고집을 부려 수원에 사시는 형님의 귀성길에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큰형은 나의 뜻을 받아줘 병원으로 와 나를 태우고 귀향을 시작했다. 차멀미 약을 챙겨먹기는 했지만, 차가 주행하다 멈추었다 하면 차멀미가 심하다는 생각에 큰형님은 수시로 내 안색을 살피며 차가 밀린다 싶으면 도로를 바꾸어 계속 주행하며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하는 방법으로 잠시도 멈추는 시간없이 4시간 여만에 무사히 고향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심초사 기다리던 부모님과 형제들의 환영을 받고 고향집에 들어가자 어머님이 봉투를 내미시며, 태룡계원 중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친구가 명절에 고향에 내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100,000원을 봉투에 넣어 내게 주라며 어머님을 드렸다고 한다. 농촌에서 힘든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이러지 말라고 하자 '그래도 저는 치식이 보다 상황이 낳지않느냐? 받아뒀다가 꼭 전해주라'고 하며 어머님을 드렸다고 하시며 목이 메이셨다. 그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뭉클 해졌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그래 내게 이렇게 관심과 성원을 보내는 친구들이 있는 한 나도 그들이 원하는 건강한 친구의 자리로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되는 것이다.

물론, 고향친구가 아닌 사람들 중에도 그 긴세월 동안에도 날 잊지않고 관심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다. 예기치 않았던 큰 사고를 겪고 긴 세월 재활을 하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나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어린시절과 성장기를 함께한 고향친구들을 통해 난 내 어린시절과 성장기의 나를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할 앞날을 꿈 꿀 수 있었던 것이다.

2005년 구정에 함께한 태룡계 정기총회 후  4년만에 참석하는 나를 고향친구들은 모두들 예전의 건강했던 친구로 아무 사심없이 반겨 주어서 날 진정 흐뭇하게 했다.


태그:#태룡계, #태봉산, #용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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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2급 장애를 가진 전주시 공무원으로 하프마라톤 완주를 재활의 목표로 만18년째 가열찬 재활 중. 이번 휠체어 사이클 국토종단애 이어 장애를 얻고 '무섭고 외로워'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시즌Ⅱ로 필자의 마라톤을 마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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