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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우리 동네에 야외 사진관이 차려졌습니다. 사진관은 논두렁 옆댕이. 배경은 개복숭아꽃과 조팝나무 꽃 곱게 무리지어 피어 오른 개울가입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조팝나무 꽃보다도 곱게 차려 입고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사진사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사진동우회 '마실' 사람들입니다. 이정헌씨는 카메라 렌즈에 한쪽 눈을 고정시켜놓고, 몸뻬 바지에 흰, 보라 짝짜기 고무신까지 신고 나온 이용범씨는 반사판 들고 조명 맞추랴 동네 어르신들 긴장 풀어 주랴 별의별 몸짓으로 논두렁에 웃음 쫙 깔아놓고 조기옥씨와 송명화씨는 삐뚤어진 고개며 옷단장 바로 잡아주랴, 각자 맡은 일에 정신이 없습니다(송명화씨 남편은 마당발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고 있답니다).

"우리 마누라부터 찍게 혀, 얼른 예식장 가야 허니께."

경로당 의자에 할머니 한 분을 모델로 착하니 모셔놓고 적당한 구도와 조명을 계산해 가며 카메라 초점 맞추느라 다들 정신 팔려 있는데 우리 동네에서 입담 좋기로 손꼽히는 이장님 성질도 급하십니다. 느긋하기로 치자면 조선팔도에서 으뜸인 충청도 어르신이 말입니다.

"카메라를 맞춰 놔야 되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 은제 찍어, 예식장 짜장 다 불어 터지것어."

"이장님 완전 코미디언이시네요. 어느 방송에 출연했어요?"
"아, 여기저기서 출연하라구 하는디, 우리 마누라가 이쁜 색시들허구 바람 필까봐 방송국 못 가게 혀."

논두렁 사진관에 하얗게 핀 웃음꽃

우리 동네 이장님 "아, 웃는 김에 확 웃어야지 뭘 조금만 웃어"
 우리 동네 이장님 "아, 웃는 김에 확 웃어야지 뭘 조금만 웃어"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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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사진사들 "좀 웃어 보시라니까요"
 논두렁 사진사들 "좀 웃어 보시라니까요"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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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논두렁 사진관에서는 사진도 찍기 전에 조팝나무 꽃 무리만큼이나 환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생명평화 마중물 사무국장 이숙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사진 찍는 후배가 전국을 돌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로 장수사진(영정사진)을 찍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어 액자까지 곱게 모셔드리고 있는데 돈 한 푼 받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료로 봉사하고 있다 하니 마다할 리 없었습니다. 이장님도 고마워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그러십니다.

"거, 그 양반들은 수달피 발바닥을 핥아 먹고 사나, 무료로 사진을 다 찍어주고, 고맙기도 하지."

막상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카메라 앞에 앉은 어르신들이 잔뜩 긴장합니다. 군대에서 증명사진이라도 찍듯 입을 굳게 다물고 카메라만 똑바로 쳐다 봅니다. 무표정 그대로입니다. 오래 오래 사시라는 '장수사진'이라 이름 바꿔 놓고 찍는 사진이라지만 어르신들에게는 세상 떠나는 날 자손들에게 남기게 될 영정사진이니 속 편할 리 있겠습니까.

"할머니 조그만 웃어주세요!"
"아, 웃는 김에 확 웃어야지, 뭘 조그만 웃어."

"첫사랑이 어딨어, 내가 첫사랑이지"

뽀뽀 좀 하시라는 말에 새색시처럼 쑥쓰러워 하는 할머니지만 할아버지는 사진 찍는 표정 그대로다.
 뽀뽀 좀 하시라는 말에 새색시처럼 쑥쓰러워 하는 할머니지만 할아버지는 사진 찍는 표정 그대로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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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장화를 싣고 나온 이장님은 옆에 서서 내내 웃어라 웃어라 신나게 응원가를 부르고 있지만 사진기 앞에 선 어르신들의 굳은 표정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사진찍는 마실 사람들도 온갖 코믹한 몸짓으로 나서고 그런 표정을 찍는 나도 한 두 마디 거듭니다.

"할머니 첫 사랑 생각하면서 활짝 웃어 보세요."
"어이구, 저 영감님 헌티 큰 일 날라구."

"첫사랑이 어딨어. 내가 첫사랑이지. 있었어도 그냥 참고 있어 잉."
"그냥 아무렇게나 확 찍구 말지, 뭘 자꾸만 찍었샤. 이거 시집 갈 때보다 더 어려워서 원."

자꾸만 자꾸만 웃으라 하니 사진기 앞에 앉은 어르신들은 마지못해 웃으려 하지만 농촌의 현실처럼 쉽게 웃지 못합니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닙니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입니다. 웃고 있지만 힘겹습니다.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안소니 퀸처럼 웃고 있지만 어색하기만 합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거꾸로 가는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표정처럼 다가옵니다.

그 사이 씨나락 걱정에 어디론가 급히 다녀 온 이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이쁘게들 찍는디, 아직까지 찍구덜 그려. 얼른 찍지."

허리 굽도록 동네에서 가장 바삐 일손 움직이시는 할머니가 한마디 툭 쏘아 붙입니다.

"뭘 그리 급혀."

사진기 들고 마실 나온 사람들에게 거듭 거듭 고마워하며 어르신 한 분 두 분 '논두렁 사진관'을 떠나고 이번에는 이장님 차례 입니다. 코미디언 뺨치게 웃기던 이장님도 별수 없었습니다. 사진기 앞에 앉자마자 잔뜩 얼어붙습니다.   

사진기 앞에만 서면, '얼음'이 되는 어르신들

차례 기다리는 할아버지들
 차례 기다리는 할아버지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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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장수사진 찍는 날
 우리동네 장수사진 찍는 날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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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장수사진'을 찍은 어르신들은 모두 열다섯 분. 송영자, 전예순, 김선자, 김성례, 박순희, 지종임, 양의옥, 이숙자, 김구자 할머니와 오장선, 유혁종, 김동억, 유순종, 전무남, 유경상 할아버지입니다.

사진사들은 할아버지들로부터 거부할수 없는 시원한 음료수 한 잔씩 대접 받고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네 담벼락을 배경으로 몇몇 어르신들의 사진을 더 찍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습니다.

다 찍고 나서 사진 가방을 챙기고 있는 '마실' 사진 동우회 사람들에게 인터뷰하듯 궁금한 것들을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먼저 장수사진에 대한 어르신들의 반응을 물었습니다.

"어딜 가도 어르신들은 사진 찍는 장소에 모일 때부터 상기된 표정이 되십니다. 될 수 있으면 밝은 표정을 찍어 드리려고 하지만 정말 잘 안 웃습니다. 잘 웃지 않는 분들일수록 사진기 앞에서 빠져 나오시면 그때서야 웃습니다. 그래서 동네 분들 중에 유머가 많은 분들이 있어야 사진 찍기가 수월합니다. 이 마을 이장님처럼요."

유씨 할아버지네 집 앞에서 몇분의 사진을 더 찍었습니다.
 유씨 할아버지네 집 앞에서 몇분의 사진을 더 찍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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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사진 동우회 사람들이 장수사진 찍기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르신들 사진 찍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며 최대한 밝은 모습을 찍어드리려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어르신들이 본인 모습 그대로 사진이 나오는 걸 원치 않습니다. 얼굴에 큰 상처가 있거나 점이나 주름을 적당히 없애 달라고들 하십니다. 훗날 자식들이나 손주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겨질 수 있도록 하고 싶으신 거죠. 그래서 다큐 작업이 아니기에 어르신들 이쁘게 나오도록 적당한 선에서 포토샵 처리를 해드리기도 합니다."

개인 사진뿐 아니라 부부사진도 찍어 드리고 단체 사진도 찍어드리고 있답니다.

"출사를 다니면서 놀러 다니는 것은 별 의미 없다고 여겨 시작한 일입니다. 다들 직장인들이기에 시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말에 시간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식장 가시는 어르신들이 있어 어르신들 모두를 한 자리에 모시기 쉽지 않습니다. 농사철에는 더 어렵구요."

장수사진이 농촌의 영정사진 되는 건 아니겠죠

자꾸만 웃어 웃어 하니 웃고 있지만 웃음이 그냥 웃음이 아니다(왼쪽), 얼마 전 할머니를 떠나 보낸 유씨 할아버지는 단 한번도 웃지 않았다(오른쪽).
 자꾸만 웃어 웃어 하니 웃고 있지만 웃음이 그냥 웃음이 아니다(왼쪽), 얼마 전 할머니를 떠나 보낸 유씨 할아버지는 단 한번도 웃지 않았다(오른쪽).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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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지 장수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장수사진을 통해 대부분 노인들이 전부인 농촌의 현실을 바로 알아가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풍경 사진 등을 통해 농촌의 겉모습만 찍어 왔는데 장수 사진을 통해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만나면서 농촌 현실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합니다. 경비요? 포토야 라는 곳에서 인화 협찬을 받고 있어 큰 돈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먹는 거 줄이면 됩니다. 최대한 비용을 줄여서 다닙니다. 기왕 출사 다니는 거, 장수사진을 찍어 드리면 동네 어르신들에게도 좋고 저희들도 보람 있어 좋고, 다 좋은 거지요."

식사 대접도 못하고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미안했는데 '마실' 사진동우회 사람들은 본래 사진 찍으러 다니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합니다. 다음 달에는 또 어디로 '마실'을 갈까? 물었더니 인연 닿고 발길 닿는 대로 어르신들을 만나러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 마실 사진동우회 사람들이 찍고 있는 얼굴들은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농촌 얼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농촌의 영정사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10년 후면 우리동네에서 장수 사진을 찍을 어르신들은 과연 몇이나 남아 있겠습니까.

우리 식구가 시골 마을에 들어온 지 12년째. 매년 한 두 분 이상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12년 동안 젊은 부부는 단 두 집 밖에 늘지 않았습니다.

우리동네 장수사진 찍으러 온 사진동우회 '마실' 사람들
 우리동네 장수사진 찍으러 온 사진동우회 '마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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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리 동네 어르신들 사진 찍어 드린 '마실'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 전합니다.



태그:#장수사진, #마실 사진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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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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