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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그냥 먹다 - 생식

.. 이 싹이 완숙한 열매로 익는 데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냥 먹어도 되지만 익혀서도 먹는다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윤효진 옮김-곤충ㆍ책》(양문,2004) 18쪽

'완숙(完熟)'은 "열매가 아주 무르익음"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 '무르익다'를 한자로 뒤집어씌우면 '완숙'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계란 완숙'이란 "무르익힌 달걀"이란 이야기이고, 이는 곧 "푹 익힌 달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뜻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하는 한국사람은 몇 사람쯤 될까요? 이 자리에 나오는 "완숙한 열매로 익는"은 "먹음직스럽게 무르익는"이나 "먹음직한 열매로 익는"으로 손질해 봅니다. '6개월(六個月)'은 '여섯 달'로 고쳐씁니다.

 ┌ 그냥 먹어도 되지만 (o)
 ├ 날로 먹어도 되지만 (o)
 │
 ├ 생식해도 되지만 (x)
 └ 생식(生食) : 익히지 아니하고 날로 먹음

요새는 몸에 좋다면서 '생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날에는 우리들 거의 모두 '날것을 그대로 먹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삶거나 익히거나 끓이기도 했지만, 날푸성귀를 살짝 데치든 아예 안 데치고 그냥 먹든, '있는 그대로 먹는' 일이 흔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생식'을 한다면서, '날 먹을거리를 날것 그대로 먹으려' 하는 흐름이란, 우리가 오랫동안 이어온 우리 삶에서 우리 앞길을 찾으려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반드시 예전 흐름이 모두 좋다고 할 수 없으나, 우리들은 예전 흐름에서 좋은 대목이든 궂은 대목이든 하나도 돌아보지 않고 송두리째 내버렸어요. 그러니, 이제서야 퍽 늦게나마 예전 삶자락에서 좋았던 대목을 되찾으려 한다고 볼 수 있는데, 먹을거리뿐 아니라 생각줄기와 일거리와 말씀씀이 모두, 우리 스스로 가꾸거나 일구었던 좋은 흐름을 고이 되찾는다면 서로서로 즐거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다만, 몸에 좋다고 해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말뜻이나 느낌이 좋다고 해서 아무 말이든 되는 대로 옛 토박이말을 되살릴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알맞는' 자리를 슬기롭게 가누어야 합니다. 우리 말로는 '알맞음'이고 한자말로는 '중용(中庸)'인데, 어떤 낱말로 생각을 다스리든, 우리가 바르게 설 자리를 깨닫고, 옳게 꾸릴 삶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ㄴ. 내 손에 있다

.. "말을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령의 말에 따라, 이제 일곱 개 도시가 반란군의 손 아래 있습니다 ..  《마르코스/윤길순 옮김-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해냄,2002) 77쪽

"일곱 개의 도시"라 하지 않고 "일곱 개 도시"라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렇지만 "일곱 개 도시"라는 말도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일곱 도시"나 "도시 일곱 곳"이나 "도시 일곱 군데"로 손질해 줍니다. "소령의 말에 따라"는 "소령이 하는 말에 따라"나 "소령이 외친 말에 따라"로 다듬습니다. 그런데, "말을 위한 전쟁"이란 어떤 싸움을 가리킬까요? 적잖이 알쏭달쏭합니다. 번역이 얄궂다고 느낍니다. 옮긴이 스스로 이 대목을 또렷하게 고쳐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 반란군 손 아래에 있습니다
 ├ 반란군 손에 있습니다
 ├ 반란군 손아귀에 있습니다
 │
 ├ 수중(手中)
 │  (1) 손의 안
 │  (2) 자기가 소유할 수 있거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   - 수중에 넣다 / 다른 사람의 수중에 넘어가다 /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 수하(手下)
     (1) = 손아래
     (2) = 부하

그래도 이 보기글을 옮긴 분은 "수중에 있다"라 하지 않고 "손 아래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 대목 하나로도 반갑습니다. "일곱 개의 도시"라 하지 않은 대목이나 이 대목이나 퍽 마음을 쏟았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만 "소령의 말"이라든지 "반란군의 손 아래" 같은 자리에는 토씨 '-의'가 달라붙습니다. 이런 자리에까지 마음을 쏟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쁘고 즐거웠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손 아래'라는 옮김말이 썩 마뜩하지 않습니다. 한자말 '수중'이나 '수하'를 고스란히 옮겨적었다는 느낌이 짙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자리에서는 "반란군 손에 있습니다"라든지 "반란군 손아귀에 있습니다"라든지 "반란군 손에 들어왔습니다"라 하지 않았는지요.

 ┌ 손 / 손안 / 손아래 / 손아귀
 └ 수중 / 수하

그렇다고 '손안'이나 '손아래' 같은 새 낱말을 빚어내어 쓰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한자말을 고스란히 풀어낸 느낌이 짙어도, 우리 깜냥껏 이 낱말을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우리 말을 아주 살갑고 싱그럽고 알차게 빚어낼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어설프거나 모자라거나 낯설다고 느껴지는 낱말을 어수룩하게 빚어내어 쓸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이 어설픔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 차근차근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모자람투성이라 하여도 이제부터는 넉넉함이 가득하도록 손보고 손질하는 가운데 알맞춤하고 아름다운 말과 글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우리 말을 살려서 쓴다고 할 때에는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서 가장 알맞는 말을 찾으면 됩니다. 우리 삶과 문화에 꼭 들어맞는 한편, 지금 이대로도 즐겁고 앞으로 한껏 푸지고 넉넉하게 살찌울 수 있도록 마음을 쏟으면 됩니다.

 ┌(ㄱ) 손에 뭐 들었어?
 ├(ㄴ) 손안에 뭐 들었어?
 │
 ├(ㄷ) 손을 펼쳐 손에 쥔 조약돌을 보여주다
 └(ㄹ) 손을 펼쳐 손안에 쥔 조약돌을 보여주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ㄱ)과 (ㄷ)처럼 말합니다. (ㄴ)과 (ㄹ)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ㄴ)과 (ㄹ)처럼 말하는 분을 곧잘 만납니다. 아무래도 한 해 두 해 (ㄴ)과 (ㄹ) 말투가 퍼져 나가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잘 쓰는 말투도 퍼지지만, 잘못 쓰는 말투도 퍼집니다. 교사나 부모도, 잘 쓰는 말투도 배우지만 잘못 쓰는 말투도 배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 쓰는 말투에도 익숙해지지만, 잘못 쓰는 말투에도 익숙해집니다.

다만, 처음 배우고 익숙해질 때에는 이러한 말투가 잘된 말투인지 잘못된 말투인지를 따지거나 가누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는 사람들이나,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일로 먹고사는 지식인과 기자들이나,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들이나, 스스로 쓰는 말과 글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가꾸거나 돌보려고 하지 않거든요.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는 말과 글이 없기도 하지만, 학교를 마친 어른들이 말과 글을 옳게 배울 수 있는 자리 또한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태그:#살려쓰기, #토박이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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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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