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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망에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팬티 하나 달랑 남긴 채 이 세상을 헌 짚신짝 내던지듯이 툭 던져버린 스님이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 상좌로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였던 백용성(1864~1940,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과 함께 <화엄경> 사상을 펼쳤던 화엄법사이기도 한 스님. 그가 바로 무애도인 춘성 스님이다.

 

춘성(1891~1977)은 근,현대불교가 자리를 뒤바꾸는 꼭지점에서 경찰이 출생지가 어디냐고 묻자 "내 출생지는 우리 어머니 *지야"라고 말 할 정도로 부처님 말씀을 원색적으로 툭툭 내던지는 괴짜(?) 승려였다. 스님은 땡겨울에도 본인은 물론 수행자들에게 이불을 주지 않고 냉방에서 자게 하는 고집스런 승려로도 악명(?)이 높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던 우리시대 참 자유인 춘성 스님. 이미 입적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러 불자들과 일반 사람들이 춘성 스님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또 있다. 다 아시다시피 춘성 스님은 서대문 감옥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건네준 분이다.

 

그때 만해 한용운 스님이 쓴 '조선독립의 서'가 <독립신문>에 실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춘성은 만해 옥바라지에 얽힌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만해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기념연설을 한 뒤 만세 삼창을 하다가 서대문 감옥에 갇히자 춘성은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망월사에 머문다.

 

춘성은 이때 망월사에서 추운 땡겨울인 데도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다. 그리고 차디 찬 방에서 참선을 하며 밤을 지새운 뒤 서대문을 들락거렸다. 그때 망월사를 들렀던 한 스님이 땔감이 절에 가득 쌓여 있는 데도 냉방에서 자는 것이 이상해 춘성에게 묻자 "스승이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제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겠습니까"라고 내뱉었다.

 

지하 우물 속에 묻혀 있었던 춘성을 지상으로

 

"지금 불교계를 비롯한 세상은 허위의식, 엉터리 수행자가 횡행하고 있다. 직업 수좌, 벙어리 수좌, 법문이 사라진 선방, 선지식을 찾지 않는 간화선 수행이 불교를 대표하고 있다. 승려는 있으나 인간은 찾아볼 수 없는 불교가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승려 본연의 자세를 찾을 수 없는 엄혹한 이 시절에 춘성이라는 화두를 통해 이 시대 지성의 문제를, 이 시대 불교의 문제를 비추어 보길 기대한다" -'펴내는 말' 몇 토막

 

지금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을 맡고 있는 불교 연구자 김광식(부천대) 교수가 만해 한용운 스님 제자인 춘성 스님 사상을 그려낸 무애도인 삶 이야기 <춘성>(새싹)을 펴냈다. 이 책에는 방석 두 개로 잠을 자고, 옷 두 벌도 없었고, 신도들 대접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돈이 생기면 남을 다 줘 버리는 춘성 스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제1부 '춘성일대기'에 실린 '탑골공원에서 만난 무애도인' '만해를 만나 머리를 깎다' '달마는 왜 서쪽에서 왔는가' '돌장승이 아이 낳는 도리', 제2부 '내가 만난 춘성'에 실린 혜성, 우송, 혜광, 수경, 명진, 진관 스님 등이 쓴 이야기, 제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에 실린 '아이 똥이 부처님' '육영수 여사와의 인연' '종정이 될 뻔 했던 춘성' 등 50여 편이 그것.

 

김광식 교수는 "춘성은 깊숙한 선방의 지대방에서 이따금씩 단골메뉴로 나오는 큰스님, 도인에서도 이탈되었다"라고 말한다. 김 교수는 "다만 춘성문도회의 근거 사찰인 성남 봉국사(주지 효림)에 있는 단아한 비석과 부도만이 그의 존재를 말해준다. 그렇지만 지상과 인터넷에서는 그가 남긴 정신, 사상, 일화, 비화 등이 정착할 주소도 모른 상태로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 책은 지금껏 지하의 우물 속에 묻혀 있었던 춘성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첫 번째 마중물"이라며 "수행자들의 명리탐닉을, 더 많이 가지려는 한없는 재산 축척을, 어디로 가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불건전한 지성의 탐험 등을 여기에서 중단케 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춘성이라는 강한 저울추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만해에게서 자주 독립을, 만공에게서 선법을 배우다

 

"춘성은 바랑을 메고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온 산하가 그의 집이고 수행처였다. 그 무렵 춘성은 망월사에 들러 수행하였다. 춘성과 망월사와의 인연은 깊디깊은 바닷물 같은 것이었다. 춘성은 망월사에서 지독한 수행을 거듭하였다. 망월사 뒤에 있는 바위에서 그는 추운 겨울날에 삼매에 들 정도로 참선에 몰입하였다" -82쪽

 

춘성은 이때 얼마나 깊은 수행에 들었던지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는 줄도 몰랐다. 이 때문에 춘성은 인생 끝자락에 손톱과 발톱이 썩기도 했다. 이렇게 17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죽음을 코 앞에 둔 끝에 관음보살을 만났다고 하니, 그 수행이 얼마나 철저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춘성이 이렇게 수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두 스승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춘성은 두 스승을 두는데, 그중 한 분은 만해요, 다른 한 분은 만공이다. 춘성이 만해에게서 자주적인 독립의식을 배웠다면 만공에게는 선법을 배웠다. 춘성은 그 때문에 만공이 입적한 뒤 수법(受法) 제자로도 공인되었다.

 

1982년 만공문도회에서 펴낸 <만공 법어> 끝자락에는 수법제자 법명이 나온다. 모두 37명이 올라 있는 이 책에 춘성이란 이름이 당당하게 들어 있다. 하지만 춘성은 은상좌(恩上座)가 아니라 참회제자라고 썼다. 이를 볼 때 경허, 만공으로 이어진 참다운 선법을 누가 올곧게 계승, 실천하였느냐를 가름할 수 있다.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지 속이지"

 

"본적이 어디입니까?"

"내 본적은 우리 아버지 신두(腎頭)이지"

경찰은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궁하듯이 재차 물었다.

"본적을 말해요, 본적이 어디냐고요?"

"그것은 당신이나 나도 가지고 있으며, 살았다 죽었다 하는 자지야"

"자지라고요?"

 

경찰은 기가 차듯이 웃고 말았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남성의 상징을 자신의 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웃을 도리 밖에 없었다. 경찰은 애써 긴장하면서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 고향은 어디입니까?"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지 속이지" -112쪽

 

이 이야기는 춘성이 망월사 불사를 할 때 나무를 베었다고 해서 경찰서에 가서 나눈 이야기다. 이때 하도 어이가 없었던 경찰은 더 이상 조사를 할 수가 없어 나무를 벤 까닭이라도 들어보기 위해 춘성에게 묻는다. "이 스님! 이상한 스님이구만. 그러나 저러나 스님 산에 있는 나무는 왜 베었습니까?"라고.

 

춘성은 경찰에게 "그거야 산에 널브러져 있는 죽은 나무를 절로 가져와서 절이 쓰러질 형편이니 요긴하게 쓸까 해서이지. 그건 그렇고 경찰 양반 내 말이나 들어보슈. 이 우주가 감옥이요 감옥! 우리들이 날마다 감옥 속에서 헤매고 있지 않나...나 같은 늙은이 잡아가는 것보다 이 순간에도 큰 도둑질 하는 놈들이나 잡지 뭐하고 있어!"라고, 오히려 호통을 친다.

 

이는 자비와 구원을 위해 나무를 절로 가져 온 것을 실정법으로 다스리면 모든 성자들이 전과자가 된다는 그 말이다. 춘성은 그렇게 경찰에서 풀려난 뒤 상좌와 수좌들이 별일이 없었느냐는 물음에도 "내가 망월사 주인이다. 주인이 내 나무를 베었는데, 뭐 벌 줄래? 그래 내가 베었다. 뭐 잘못되었느냐?"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춘성은 그 뒤부터 나무로 법당을 지으려 하지 않고 돌로 지으려 했다. 최신식을 좋아하는 멋쟁이 수좌였던 춘성은 법당을 돌로 지어야 불이 나더라도 돌로 된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여겼다. 상좌와 수좌, 신도들이 법당을 돌로 짓는 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고 반대했지만 춘성은 기어이 돌로 된 법당을 지었다.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

 

어느 날 춘성은 통금 시간이 넘어서 밤길을 가고 있었다. 방범 순찰을 하던 순경이 춘성에게 물었다.

"누구요?"

춘성이 어둠 속에서 즉각 답을 하였다.

"중대장이다!"

 

그 소리를 들은 순경은 목소리는 노인 목소리인데, 중대장이라고 하니 의아해서 들고 있던 후래쉬로 춘성을 비추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의 대장이지! 맞지?"-397쪽)

 

춘성이 내뱉은 배꼽 잡는 이야기는 끝이 없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청와대로 들어가자 육영수 여사가 춘성을 청와대에서 열린 생일잔치에 초대했다. 육여사 자신의 생일잔치에 와서 좋은 법문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춘성이 청와대에 들어가자 장차관과 그 부인네들, 국회의원 등이 법석을 떨고 있었다.

 

춘성에게 그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춘성은 설법할 차례가 되자 법상에 올랐다. 하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나자 장차관과 그 부인네들, 국회의원들이 은근슬쩍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 춘성이 주장자로 법상을 쿵! 치며 말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 하고 *지에서 나온 날이다"라고.

 

춘성이 내뱉은 재미 난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목사가 하나님은 무소부재라 하는 말에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아이 똥이 부처님), 전도사가 주님은 부활했다는 말에 "뭐? 죽었다 살아난다고? 나는 여태까지 죽었다 살아난 건 내 자지 밖에 못 봤어"(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혼수에는 좆이 제일이요, 불사에는 돈이 제일이다!"(진관사 대웅전 상량식장에서) 등 숱하게 많다.

 

춘성 스님 부도와 비석이 있는 성남 봉국사 주지 임효림 스님은 "노스님을 생전에 지근에서모시고 수행했던 선객들이나 신도들은 한결같이 천하제일의 도인이라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라며 "불교사에서 이만큼 수행을 철저히 하시고 무애자재하신 도인인 춘성 노스님 같은 분이 현대사에서는 달리 없다고 하겠다"고 칭송했다.

 

글쓴이 김광식은 한국 근 · 현대 불교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부천대 겸임교수,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근대 불교사연구> <한국 현대 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용성> <한용운 평전> <아! 청담> <그리운 스승 한암 스님> <범어사와 불교정화운동> 등 15권이 있다. 법명은 만암(卍庵), 호는 지허(止虛).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춘성 : 만해제자.무애도인

김광식 지음, 중도(2014)


태그:#춘성, #김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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