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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전경.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전경.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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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간 분쟁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고 표현한 판결문

"가슴이 먹먹하다. 법원에서 자식들과 사위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A 할머니(피고)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많은 자식들과 손자들이 있으나 할아버지가 없는 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고 회사의 창업주이자 남편인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과연 이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느 방청객의 재판 참관기가 아니다. 법원 판결문의 일부이다. 부산지방법원의 채시호 판사는 작년 8월 한 판결문의 말미에 '후기'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다. 보통 법원의 판결이 논리적이고 무미건조한 문체로 구성된 것을 떠올려 보면, 이 판결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채 판사가 덧붙인 '후기'는 굳이 판결문에 없어도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가슴이 먹먹하다"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이 사건은 대표이사가 사망한 후 회사의 경영권과 주식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자식들간의 분쟁으로 생긴 주식명의개서 청구 사건이다. 피고 A 할머니는 80대의 고령으로서 남편 회사의 대주주였다. 그런데, 이 회사의 운영을 사실상 좌우하였던 아들이 할머니 뜻과는 상관없이 주식을 팔아버리면서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법정까지 오게 된 것이다.  

채 판사는 A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자식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서 재산 다툼을 벌이는 상황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는 원고쪽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리면서도, 마치 스스로 다짐하듯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판결을 끝맺는다. 

"아내를 두고서 혼자 먼저 가지 않으련다. 나 죽어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내를 데려올 것이다. 부디 할머니는 남은 여생, 할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젊었을 때의 꽃다운 아름다운 추억만 생각하길, 그리고 지금의 자녀들이 아니라 옛날의 착하고 어린 아기들만 생각하길……."

"이 땅의 아내 되려던 19살 베트남 여성, 우리가 지켜줄 수 없었나"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문 위의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문 위의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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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형사사건에서도 무고하게 희생된 피해자를 추모하는 판결(대전고법 2007노 425 재판장 김상준 부장판사)이 눈길을 끌었다.

피해자는 19살에 불과한 베트남 여성 B씨. 그는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한국 남성과 결혼한다. 남편은 B씨를 집밖으로 못 나가게 했으며, B씨가 자신과 함께하는 결혼 생활에 뜻이 없는 것으로 오해하는 등 피해망상을 보이다가 급기야는 만취 후 상습 폭력으로 아내를 숨지게 했다.

재판부는 세상을 뜨기 전날 B씨가 베트남어로 쓴 장문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노력한다. 편지 중 일부를 보자.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려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B씨는 편지에서 "당신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며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 부모님을 위하여 다시 처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소망을 밝혔다. 하지만 다음날 B씨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피고인의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재판부의 관심은 "이 같은 비극이 발생한 근본 원인", 다시 말해 국제결혼의 명암을 재조명해보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재판부의 의견을 들어보자.

"피고인은 그저 피해자가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단 몇 분만에 피해자를 배우자감으로 선택하게 된다. … 목표는 단 한 가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일 뿐, 그 이후의 뒷감당에 관하여 진지한 고민이 없다. …

노총각들의 결혼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는 남녀를 그저 한 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어서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되리라는 소망을 해 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끝으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의 아내가 되고자 한국을 찾아온 B씨, 그녀의 예쁜 소망을 지켜줄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일까"라고 반문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무하기 위해" 가족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은 채 판결을 내린 사실을 아쉬워했다. 

"치열하게 살던 여류시인의 삶, 껍데기만 인간인 피고인들이 꺾어"

20대의 두 강도가 술집을 털기로 했다. 범행 기회를 엿보던 두 사람은 손님이 끊긴 새벽녘에 술집 여주인을 과도로 살해했다. 단지 돈을 빼앗기 위해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여인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능욕한 피고인들을 바라보는 법원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작년 7월 대전지방법원(2008고합 68 재판장 김재환 부장판사)은 "함부로 남의 생을 접어버린 피고인들의 행위는 신의 권력을 탐한 것으로 도저히 허용될 수 없다"며 무기징역를 선고했다.   

판결 곳곳에서는 피해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재판부의 심정이 느껴진다. 재판부는 "껍데기만 인간에 불과한 피고인들과는 달리, 피해자는 아프고 외롭고 힘겨웠던 날들을 이겨가며 치열한 삶을 살아가던 여류시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판결문에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시를 인용하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재판부는 "힘들고 모호한 일상을 거부하고 치열한 삶을 살고자 했던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피해자가 생전에 지은 '확인되지 않는 하루'라는 시를 소개한다.

  확인되지 않는 하루가
   수취인불명으로 찍혀
   자꾸 문을 두드린다.

   비늘을 겹겹이 둘러 입고
   물고기처럼 위장하여
   죽은 듯 호흡을 멈추어도
   따돌릴 수 없어
   받아 쥐고 말았다.

   꼼짝없이 저당 잡힌 내가
   무거운 깃털 하나 꽂은 채
   닳고 닳은 세상에 이끼로 피면
   수취인불명으로 날아든 너는
   세월의 끝에 섞여갈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다 나 또한
   살아있음의 확인이 절실하기에

   비늘을 벗어 네게 덤으로 얹어줄게
   가라
   영원이 잊힐 세상 밖으로

재판부는 "피해자의 생에 대한 의지는 피고인들에 의하여 꺾여 버렸다"며 "이 사건 범행일이 피해자에게는 그토록 거부하면서 받고 싶지 않았던 '확인되지 않는 하루'가 되어버렸다"고 한탄했다.

또한 피고인들을 향해서는 "참회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매일매일이 고통스러운 '확인되지 않는 하루'가 될 것"이라며 진심 어린 반성을 요청했다.

판결은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판결은 원고⋅피고 중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거나, 죄를 저지른 범인을 처벌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걸로 할 일은 다한 것이다. 그런데도 위에서 소개한 판결들은 원래의 목적 말고도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판사가 판결문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 누구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판결 속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면 법원의 고뇌를 헤아리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아주 가끔은 판사의 진정성도 엿보게 될 것이다.    

법원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요즘, 판사의 솔직한 심경을 드러낸 판결 몇 건을 들춰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판결은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판결문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민사사건의 판결문에는 사건번호와 당사자 이름과 함께 주문, 청구취지, 이유가 기재된다. 주문이란 판결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예를 들어 "원고는 피고에게 얼마를 지급하라"는 결론)이고, 청구취지는 원고가 피고에게 청구한 내용을 말한다.

판결의 이유에는 양쪽 당사자의 주장, 증거에 대한 법원의 판단과 이를 토대로 한 주문의 근거 등이 언급된다. 단, 2천만원 이하 소액사건은 판결 이유 기재를 생략할 수 있다.

이혼소송, 행정소송의 판결도 민사판결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된다.

형사사건의 판결은 당사자표시, 주문, 이유 등으로 구성된다. 주문은 피고인이 유죄인 경우 형량을, 무죄인 경우 무죄임을 기재한다. 형사 판결은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한 판단이 주가 된다.

유죄를 선고할 때는 이유에 범죄될 사실, 증거의 요지와 법령의 적용을 적어야 한다. 또한 형을 감경하거나 가중할 때는 양형 사유를 밝힌다.

판결문,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판결의 핵심 내용은 '주문'에 있고, 판결의 근거는 '이유'에 나와 있다.


태그:#판결, #법원, #눈물, #베트남, #국제결혼,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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