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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종이 봉지 공주
- 글 : 로버트 문치
- 그림 : 마이클 마첸코
- 옮긴이 : 김태희
- 펴낸곳 : 비룡소 (1998.11.26.)
- 책값 : 6500원

 (1) 옷이란, 우리 삶이란

겉그림.
 겉그림.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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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지기네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집으로 찾아가려면 언제나 '탄현동 로데오거리'를 걸어서 가로질러야 합니다. 그 길을 가로질러야 나오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느 날에는 한갓지지만, 주말이나 명절만 되면 버스정류장에도 자가용이 겹으로 서고 사람으로 바글바글하여 마치 놀이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든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나 '새옷 사려는 사람이 많은가' 싶어 놀라고, 그렇게 옷 사려는 사람이 많으니 옷집만으로도 길디긴 거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서울에서도 이화여대 앞 골목은 옷집으로 가득합니다. 꼭 로데오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나 이대 앞만이 아니라도, 서울이며 부산이며 어디를 가든 가장 많이 눈에 뜨이는 곳은 밥집과 함께 옷집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밥과 옷과 집',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만큼 옷집과 밥집이 많을밖에 없을 텐데, 때 되면 배가 고파지니 밥집이 많다고 하여도 때 되면 옷을 사야 하기에 옷집이 많을까요? 우리는 참말 입을 옷이 너무도 많이 있어야 하기에 옷집도 이토록 많아야 할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랑 우리 옆지기랑 아기랑 세 식구는 옷을 사입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아기 옷은 모두 이웃한테서 얻어 입힙니다). 한두 해도 아닌 열 해 남짓 입고 입고 또 입어 헐고 해지고 더 기워 입기 어렵다 싶을 무렵 비로소 한 벌을 새로 장만합니다. 이렇게 장만하지 않아도 틈틈이 이웃한테서 '못 입게 되거나 입을 겨를이 없어 내놓게 되는 옷'을 얻곤 합니다. 행사장에서 나누어 주는 옷이라든지 모임에서 주는 옷을 하나둘 챙기다 보면, 이런 옷가지들을 번갈아 입어도 죽는 날까지 다 못 입고 남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저한테는 아직 봉지도 못 뜯은 행사 기념 옷이 몇 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옷 갖춤새는 우리 식구 이야기일 뿐이지 싶습니다. 거리마다 넘치는 옷집들을 보면. 길거리 돌아다니는 젊고 늙은 사람들 반짝이고 빛나고 고운 옷차림을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새로운 집으로 옮길 때에는, 무엇보다도 옷가지 짐이 가장 많게 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책은 몇 묶음이 없어도, 아니 책은 한 묶음조차 없어도 옷꾸러미는 몇 상자 나오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운 공주였습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성에 살았지요. 그 성에는 비싸고 좋은 옷들이 많았습니다. 또 공주는 로널드 왕자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죠 ..  (2쪽)

속그림. 예쁘고 비싼 옷을 입은 왕자 공주는 처음에는 서로 겉멋에만 빠진 채 사랑을 느꼈습니다.
 속그림. 예쁘고 비싼 옷을 입은 왕자 공주는 처음에는 서로 겉멋에만 빠진 채 사랑을 느꼈습니다.
ⓒ 마이클 마첸코/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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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 모으는 통에 안 입는 옷을 모으면 다시쓰기가 된다지만, 좀 더 깊이 돌아본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쓰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덜 사고 덜 쓰고 덜 누려도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같은 옷을 날마다 빨아 날마다 갈아입어도 여러 해 너끈히 입을 수 있습니다. 옷 두 벌을 이틀 걸러 빨아 입어도 꽤 긴 햇수에 걸쳐 입을 수 있습니다. 옷 세 벌쯤을 사흘 걸러 빨아 입어도 오래오래 입게 됩니다. 한 주에 일곱 벌을 날마다 갈아입으면 훨씬 오래 간수하며 입을 수 있을 테고요.

그러나, 날마다 빨아야 하는 옷이 아니요, 날마다 갈아입어야 하는 옷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운 차림새로 다녀야 하는 우리들이어야 하나요. 날마다 새로운 차림새로 다닌다고 날마다 새로운 우리들이 되던가요. 겉차림이 새롭다고 마음차림도 새로울까요. 겉꾸밈이 새롭다고 속차림도 새로운가요. 하루쯤 덜 빨아 물을 아낄 마음을 키울 수 없는지요. 옷 한 벌 덜 사면서 지구자원을 적게 쓰려는 마음을 북돋울 수 없는가요.

.. 어느 날,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용은 공주의 성을 부수고, 뜨거운 불길을 내뿜어 공주의 옷을 몽땅 태워 버렸지요. 그리고 로널드 왕자를 잡아갔습니다. 공주는 용을 뒤쫓아가서 왕자를 구해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몽땅 타 버려서 입을 것이 없었지요. 공주는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종이 봉지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공주는 종이 봉지를 주워 입고 용을 찾아나섰습니다 ..  (4∼6쪽)

우리는 우리 스스로 껍데기만 키우고 알맹이는 내버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가 애써 벌어들인 돈으로 마음차리기는 못하는 가운데 겉차리는 데에 온힘을 쏟아붓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니, 우리는 날마다 새옷을 뽐내고 싶은 나머지, 새옷 장만하려고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돈벌고 죽어라 경제성장을 외치는 쳇바퀴에 갇혀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알맞게 일하고 알맞게 벌어 알맞게 우리 삶을 즐기는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즐거운 삶보다 남 앞에서 자랑하거나 내보이는 치레에 매여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속그림. 용은 공주네 집(성)도 사랑(왕자)도 옷(예쁘고 비싼)도 모두 빼앗아 버렸습니다.
 속그림. 용은 공주네 집(성)도 사랑(왕자)도 옷(예쁘고 비싼)도 모두 빼앗아 버렸습니다.
ⓒ 마이클 마첸코/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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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를 꺼내어 읽습니다. 몇 번씩 보고 또 보았으나, 볼 때마다 늘 새롭고, 덮을 때마다 늘 웃음이 터져나와 히죽히죽거리게 됩니다. 장난꾸러기인데가 욕심꾸러기인 용 한 마리는 '책에서 주인공인 공주'가 사는 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립니다. 배가 고파서 성을 통째로 구워먹는다고 하는데, 성만 구워먹지 않고 성에서 공주와 함께 혼인할 왕자까지 얌체처럼 붙잡아 갑니다. 그리고, 왕자만 붙잡아 가지 않고 공주가 입던 옷마저 홀랑 태웁니다.

용으로 보자면, 공주를 안 잡아먹고 살려 두었으니 고맙다고 할 노릇일 텐데, 공주한테는 자기 집이며 왕자며, 거기다가 옷까지 빼앗겨 버렸으니 용처럼 괘씸한 녀석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공주는 용한테 앙갚음을 해 주고 왕자도 찾아오리라 다짐하게 되고, 씩씩하게 용을 찾으러 길을 나섭니다. 그러고는 아주 슬기롭게 용을 골탕먹이고 왕자를 살려냅니다(그렇지만, 용이 숲을 홀랑 태워 버리게 하는 대목은 퍽 슬픕니다. 애꿎은 숲……).

아마 여기까지는 어디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모험 이야기요, 왕자와 공주 이야기라 할 텐데요, 다만 한 가지, 왕자가 공주를 찾으러 안 가고 공주가 왕자를 찾으러 간다는 대목에서 사뭇 다릅니다. 더구나, 공주는 용한테 옷까지 모두 빼앗겼으니(왕자로 치면 무기가 하나도 없는 맨몸), 도무지 맨주먹으로 무슨 앙갚음을 하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자이든 여자이든, 똑똑이이든 어리보기이든 빼어난 무기로만 용을 마주할 수 있지 않아요. 어리석은 머리라 해도 조금씩 생각을 하고 마음을 쓰면 얼마든지 어려움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도 '용이든 무엇이든 다 나오라고 해!' 하는 씩씩하고 튼튼한 넋이 있어야 할 테지요. 슬기로움에다가 씩씩한 넋, 이 두 가지는 바로 <종이 봉지 공주>에서 '종이 봉지를 입은 공주'가 우리한테 보여주는 가장 크고 굳센 힘입니다.

속그림. 공주는 길에 나뒹구는 종이 봉지를 옷으로 삼아 뒤집어쓰고는 용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속그림. 공주는 길에 나뒹구는 종이 봉지를 옷으로 삼아 뒤집어쓰고는 용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 마이클 마첸코/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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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는 훌쩍 용을 뛰어넘어 동굴 문을 열었습니다. 동굴 안에는 로널드 왕자가 있었지요. 왕자는 공주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너 꼴이 엉망이구나! 아이고 탄 내야.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더럽고 찢어진 종이 봉지나 걸치고 있고.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 ..  (22쪽)

한 가지 더.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에서 '무시무시한 용한테서 풀려난 왕자'는 아주 얼뜨고 건방진 말을 공주한테 건넵니다. 기껏 목숨을 살려 주었더니 하는 말이, 용이 뿜은 불이 공주 머리가 타서 냄새가 난다느니, 옷은 걸레짝 같다느니 하는.

모르는 노릇이지만, 나라에서 힘있다고 뽐내는 분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이와 같이 우쭐대거나 콧대 높은 말과 몸짓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고마움을 고마움으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에 갇히고,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을 받았다고 여기는 마음에 갇히며, 사랑과 믿음을 두루 나누기보다는 홀로 차지하려는 마음에 갇힌 셈입니다. 용한테서 풀려났지만, 몸뚱이는 풀려났어도 마음은 풀려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를 풀려나게 한 사람들이 얼마나 애를 쓰고 힘을 썼는가를 느끼지 않고 돌아보지 않습니다.

용보다 괘씸하다기보다 딱합니다. 불쌍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좁살뱅이 마음인지 구슬프기까지 합니다. 공주로서는 이런 못난 왕자와 혼인을 꿈꾸고 있었다니 자기 눈이 삐어도 한참 삐었다고 느낄 만할 테고요.

그런데, 어려움에서 빠져나온 철없는 사람들만 이렇게 고마움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빠져 보지 않은 철없는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자기들이 입거나 받는 고마움이 무엇인지를 하나도 헤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 둘레에 어떤 이웃이 있고 어떤 벗들이 있는지를 살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둘레 사람들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콩 한 톨을 나누어 먹는 마음을 모르고, 밥 한 숟갈 나누어 먹는 마음을 모르며, 이불 한귀퉁이 나누어 덮는 마음을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어,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는 마지막에 이릅니다. 마지막은, 건방지고 얼뜬 왕자한테 공주가 하는 말과 몸짓입니다. 공주는 왕자한테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 뺨을 한 대 갈길까요? 용이 왕자를 가둔 곳에 왕자를 도로 데려다 놓을까요? 왕자가 입던 옷을 모조리 벗겨 공주가 갈아입은 다음 종이 봉지를 왕자한테 씌울까요? 그래도 왕자가 시키는 말이니 어디에서든 새옷을 얻어입고 왕자한테 올까요?

뒷그림. 속에도 나오는 그림인데, 공주는 슬기를 써서 용이 제풀에 지쳐 떨어지게 합니다.
 뒷그림. 속에도 나오는 그림인데, 공주는 슬기를 써서 용이 제풀에 지쳐 떨어지게 합니다.
ⓒ 마이클 마첸코/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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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마무리는 어찌 보면 싱거울 수 있고, 아쉬울 수 있고, 밋밋할 수 있고, 그냥 그렇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리라 봅니다. 다만, 공주는 제 집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으며 옷이며 돈이며 모두 다 잃었는데에도 기쁘고 신나서 춤을 춥니다. 왜 신나서 춤을 추는지, 왜 빈털털이 빈몸이 되었음에도 기뻐하는지는…. 그림책을 덮는 분들 스스로 가만히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종이 봉지 공주

로버트 먼치 지음, 김태희 옮김, 마이클 마첸코 그림, 비룡소(1998)


태그:#그림책, #어린이책, #종이 봉주 공주, #옷,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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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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