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0 0 0 선생님께!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자꾸만 아리고, 시리기까지 하고...

자리에 누워도 잠도 오지 않아 이렇게  선생님께 몇 자 적습니다.

아마도 제가  타임머신을 탄 모양입니다.

 

10년, 20년도 아니고... 한 50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난간 위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아찔아찔합니다.

비행기를 타서 어지러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5공 시절로, 아니 유신독재...

아니 아니 일제치하로 되돌아간 느낌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찬물을 몇 컵이나 들이부어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습니다.

 

달력은 분명히 2009년 꽃피는 3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과거 속에 갇혀있는 사람처럼

2009년 3월이, 참으로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저희집 덧마루(베란다)에는 벌써 봄꽃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군자란, 게발선인장, 카랑코에, 사랑초, 달개비, 난초...

특히 어제 오늘 긴기아난이 꽃망울을 터뜨렸는데 그 향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집안 가득 향수를 뿌려놓은 듯,

암향부동(暗香浮動)이라는 한자어는 이럴 때 쓰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아직 봄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찬바람 쌩쌩 부는 한겨울, 거센 눈보라를 알몸으로 맞고 있는 한 그루 겨울나무처럼...  

 

선생님, 저는 아직도 제가 '파면'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남들은 저를 위로한다며 이런 저런 말들을 하지만,

솔직히 저는 얼빠진 사람처럼 머릿속이 하얗습니다.

 

제가 대학 4학년 때, 우리 아버지가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못 배워서 평생 지게질을 했지만,

아들아, 너만은 열심히 공부해서 지게질하지 말고 살거라."

 

육남매를 위해 평생 지게를 짊어졌던 아버지는... 그렇게 훌쩍 제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슬프다고 서럽게 울었지만, 저는 정작 처음에는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이라도 지게를 짊어진 채로, 그럼에도 환한 얼굴로

"형태야!" 하면서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 같았기에...

 

지금 제 심정이 그때와 같습니다.

남들은 파면당해서 이제 어떻게 하냐? 그러는데

저는 정작 저에게 닥친 일인데도,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제가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양천고로 출근하다가...그만 출근을 제지당했습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제가 수위 아저씨의 손에 끌려내려가야 했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봉변에, 할말을 잃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우여곡절끝에 교무실까지 갈 수는 있었으나,

끝내 수업은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수업을 하면 '공무방해죄'로 또 다시 징계사유가 하나 더 추가된다네요...

세상에 제가 교사인데, 제가 수업을 하면 공무방해죄라니...

제가 숨쉬고 있는 현재가 정말 21세기가 맞는지요?

 

오늘은 난생 처음 교문 앞에서 1인 시위라는 것을 했습니다.

어떨결에 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제 모습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던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습니다.

 

지금껏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던 대한민국이

갑자기 이민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곳은 좀 그렇다치더라도 교육계,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

이 네 기둥만은 썩지않고 건강하리라는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썼다지요.

저는 지금 심정 같아서는 삭발하고 단식 투쟁이라도 하고 싶지만,

우선 1인 시위 하면서... 이 땅이 부끄럽고... 하늘을 볼 면목이 없어

오늘부터 모자를 쓰기로 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제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큰 죄를 진 것일까요?

학생 때 배운대로 행동했고, 또 교사로서 가르친 대로 실천했을 뿐인데,

그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라면... 솔직히 저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다니고 싶어하는 학교,

학부모들이 보내고 싶어하는 학교,

선생님들이 근무하고 싶어하는 학교,

한번 만들어 보려고 애썼을 뿐인데...  파면이라니...

저한테 죽으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저 아직 제가 파면당했다는 얘기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말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차마 형제들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어렵게... 참으로 어렵게... 아내에게 말했더니...

그러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랬느냐며, 오히려 저에게 화를 냅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인 것은 알겠지만, 왜 하필 당신이나며,

나와 애들은 어떻게 살라고... 그러며 목놓아 울었군요

그런데 저는 바보같이

그런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못나게도 아내에게 면박을 주고 말았습니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아무도 독립 운동하지 않고,

또 독재치하에서 아무도 민주화 운동하지 않았으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겠느냐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이제 제 앞에서 더는 바가지도 긁지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대신 밤마다 교회에 가서 얼마나 울고 오는지 눈이 퉁퉁 부었습니다.

 

선생님, 넋두리가 길었습니다.

선생님, 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위로해주기보다는 차라리 저희 집사람을 위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생님, 저희 집에 군자란과 게발선인장이 있는데, 

겨울 동안 따뜻한 거실에 있던 녀석들은 꽃을 피울 생각을 못하는데,

겨우내 추운 덧마루(베란다)에서 겨울나기를 한 군자란과 게발선인장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더군요.

저도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반드시 겨울나기에 성공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겠습니다.

 

저 죽지도 않을 것이고, 또 이제는 울지도 않을 것입니다.

꿋꿋이 보란듯이 일어나, 반드시 명예를 회복하여 교단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을 하시는 선생님을 생각해서라도

없는 힘이라도 내겠습니다.

 

그래도 제 옆에 늘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이고 든든한지 모릅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2009년 3월 11일  

                                                      깊은 밤 잠 못 드는, 못난 바보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해직교사 김형태, #리울 김형태, #양천고 김형태, #양천고 참교육 해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