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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 타슈켄트 가는 길 이른 새벽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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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킬로미터가 남았다.
▲ 타슈켄트 가는 길 99킬로미터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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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옆 표지판에 '99'라고 써진 글씨를 보았다. 오후 2시. 이 숫자는 타슈켄트까지의 거리를 킬로미터 단위로 나타낸다. 오오! 드디어 거리가 두 자리 숫자로 줄었구나!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서 생수통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도보여행을 시작한지 38일, 그동안 1000킬로미터 넘게 걸어왔다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며칠 전부터 도로 옆에 있는 이 작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여기에 써진 숫자가 뭘 의미하는 건지 몰랐었다. 그러다가 주위의 현지인들에게 더듬거리면서 물어본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이 숫자가 타슈켄트까지의 거리라는 것을!

이런 표지판이 있으니까 나같은 도보여행자 입장에서는 참 편리하다. 하루에 얼마나 걸었는지, 앞으로 갈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나는 모래바닥에 앉아서 피곤한 다리를 주무르고 허리를 두드렸다. 몸 여기저기가 아프지만 기분 하나 만큼은 좋다. 나는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일어섰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방심해서는 안된다. 긴장을 푸는 순간 그동안의 여행을 물거품으로 만들만한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지런히 걸어서 오후 5시에 작은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앞에 앉아있는 젊은 친구에게 이 식당에서 하루 묵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짐을 한쪽에 놓고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그 친구가 나를 부른다.

"이쪽으로 와요!"

식당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앉아서 당근을 썰고 있다. 젊은 친구는 이 할아버지가 이 식당의 '보스'라면서 소개해준다. 나는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고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이 곳에서 하루 재워줄 수 있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갑자기 나를 덥썩 끌어안는다. 좀 어리둥절했지만 아무튼 좋은 의미인 것 같다.

타슈켄트까지의 거리를 두자리 숫자로 줄이고

왼쪽이 나를 맞아준 사이둘라 할아버지
▲ 거리의 식당 왼쪽이 나를 맞아준 사이둘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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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이름은 사이둘라, 나이는 올해 62세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식당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식당 한쪽에 있는 작은 방에 짐을 보관하라고 하더니 다른 쪽에 있는 커다란 평상에서 자라고 권한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오늘 저녁에 쁠로프를 먹으려고 준비 중이야!"

'쁠로프'라는 것은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음식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볶음밥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 볶음밥보다는 기름이 좀더 많이 들어간다. 그 볶음밥에 넣을 양파와 당근을 썰고 있는 중이다. 그 일을 손자 오따벡이 같이 돕고 있다. 한눈에 보더라도 양파와 당근의 양이 꽤 많다. 몇명이 먹을 볶음밥을 준비 중이기에 이렇게 많이 썰고 있는 걸까.

아무튼 오늘은 이 볶음밥 만드는 일을 구경할 수 있게 생겼다. 나는 평상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 여기 도착한 일을 적었다. 사이둘라 할아버지는 내가 필기하는 모습을 보더니 한국어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며 쓰냐고 묻는다.

"예, 맞아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요."

그러자 사이둘라 할아버지는 러시아어와 우즈벡어도 그렇게 쓰는데, 아랍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고 말한다. 이건 또 처음으로 알게되는 사실이다. 이 할아버지가 아랍어에도 능통한가 보다. 하긴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슬람의 최고 성지가 있으니 아랍어에 익숙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러시아어 철자 공부를 하면서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영어 알파벳과 똑같이 생겼지만 발음이 다른 철자가 몇 가지 있다. 그런 철자들을 익히느라 어려웠는데 이곳에 오니까 그 도움을 많이 받는다. 뜻을 알지는 못하지만 러시아어를 읽을 줄만 알더라도 무척 편리하다.

식당에 가면 메뉴판이 온통 러시아어고, 도로에는 러시아어로 간판이 붙어있다. 그 단어들을 읽을 줄만 알아도 현지인에게 관련된 것들을 묻기가 편하다. 그리고 혼자 도보여행을 시작한지 38일, 이제 나의 러시아어 실력도 조금 늘었다. 더듬거리는 러시아어 단어를 늘어놓으면서 내가 지금 이곳에서 뭘하고 있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 등을 대강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듣는 입장에서는 무척 답답할테지만.

그런데 아랍어라. 아랍어 철자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온통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것만 같다. 그 철자를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쓰는 것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왠지 점점 아랍어가 낯설게 느껴진다. 언젠가 그 지역을 여행할 일이 있으면 한번 작정하고 아랍어를 공부해봐야 겠다.

우즈벡 볶음밥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다

끓는 기름에 양파, 당근, 마늘을 넣는다.
▲ 우즈벡 볶음밥 만들기 끓는 기름에 양파, 당근, 마늘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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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기름에 깨끗하게 씻은 쌀을 넣는다.
▲ 우즈벡 볶음밥 만들기 끓는 기름에 깨끗하게 씻은 쌀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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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둘라 할아버지가 일어서서 주방으로 향한다. 나도 따라갔다. 양파와 당근 썬 것을 한쪽에 놓더니 이번에는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접시에 담는다. 내가 물었다.

"이거 쇠고기에요? 양고기에요?"

그러자 쇠고기라고 알려준다. 그때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저녁 7시. 전기가 나가자 나는 당황했지만 할아버지는 침착하다. 양초를 두 개 가지고 오더니 불을 붙여서 주방 한쪽에 놓는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니까 언제부터 준비를 한건지 장작을 지핀 아궁이에는 커다란 솥이 놓여있다.

그 솥에서는 기름이 펄펄 끓고있다. 할아버지는 그 기름에 양파와 당근, 마늘을 넣는다. 그리고 계속 끓인다. 장작불을 조금 약하게 하고는 국자로 기름을 조금 떠서 맛을 본다. 한쪽에서는 젊은 친구가 쌀을 씻고 있다. 할아버지는 그 쌀을 가져와서 솥에 한 주걱씩 넣고 있다. 그리고는 솥에 뚜껑을 덮는다. 뜸을 들이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볶음밥 만드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제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쁠로프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드는데 보통 1시간 가량이 걸린다고 한다.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보니까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들리고 저절로 군침이 삼켜진다. 아까 2시경에 간식을 먹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니 배가 고픈 것도 당연하다.

나는 계속 주방을 서성거리면서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토마토와 양파를 깨끗하게 씻더니 먹기좋게 썬다. 먹는 즐거움의 절반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있다. 나도 좀 도우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손도 못대게 한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즈베키스탄 현지인들은 양파와 토마토를 많이 먹는다. 볶음밥은 물론이고 꼬치구이, 고기국을 먹을때도 항상 양파와 토마토를 곁들인다. 이들 음식에 기름기가 많다보니 그것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이런 채소와 함께 먹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솥에서 볶음밥을 접시에 담기 시작한다. 드디어 쁠로프 완성! 평상에 탁자를 놓고 그곳으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한다. 볶음밥과 토마토, 양파 샐러드, 전통빵 그리고 또다른 고기 요리도 있다. 다시 전기가 들어와서 실내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진 상태다.

우유를 발효시킨듯한 하얀 요구르트도 있다. 음식을 차례대로 탁자에 놓자 마지막으로 차가운 보드카가 나왔다. 저녁의 만찬에 술이 빠지면 안되는 법. 느끼한 볶음밥을 먹고나서 차가운 보드카로 그 기름기를 없애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리를 잡고 앉자 할아버지는 어서 먹으라면서 볶음밥을 권한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 통째로 넣었던 마늘도 먹기 좋게 익혀진 상태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밥도 밥이지만 마늘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이곳을 여행하면서 마늘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한국에 있을때는 마늘을 좋아해서 참 많이 먹었는데.

나는 밥을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마늘껍질을 벗겼다. 할아버지와 젊은 친구도 음식을 먹으면서 나에게 보드카를 권한다. 이곳에 와서 쁠로프 만드는 과정을 구경했으니, 그리고 배부르게 먹고있으니 오늘도 운이 좋은 하루다.

양파, 토마토 샐러드와 함께 먹는다.
▲ 우즈벡 볶음밥 완성 양파, 토마토 샐러드와 함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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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쁠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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