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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마당에 나온 암닭> 겉표지.
 책 <마당에 나온 암닭> 겉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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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후면 나는 두 아이와 헤어져 살아야 한다. 20년 가까이 함께 지냈던 소중한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나게 된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늘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날짜가 코앞에 다가와 있으니 안정이 되지 않고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산란했다.

이러한 때 나는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감동적인 데이트를 했다. 이 책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주부들과 함께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다시 조명해볼 수 있게 했던 소중한 책이었다.

주부에게 40대란 어떤 의미일까? 죽음에는 용기보다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에는 때보다 용기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던 정체성의 상실감으로 인한 우울증은 오래도록 가실 줄을 몰랐다. 그 기나긴 터널을 힘겹게 빠져 나오자 그 터널 끝에는 다시 빈 둥지 같은 슬픔이 무겁게 짓누르는 40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40대의 회오리에 들어서자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주어진 일상에 안주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의 팽팽한 대결은 오랜 시간 지속되어 밤잠을 설쳐가며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묻고 또 묻게 했다.

잎싹이 양계장에서 그저 알 낳는 기계로 살면서 수없이 좌절감을 맛보면서도 견뎌내야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땅의 주부들에게 부여된 일상이 주는 온갖 비애를 감당하며 사느라 자신을 돌볼 여력이라곤 전혀 없이 살아왔다. 그런 내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처럼 두렵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남은 것은 오직 무력감과 두려움과 상실감뿐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기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지칠 줄도 모르고 끓어오르는 욕구가 나를 끊임없이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그 힘에 떠밀려 비로소 마음을 정하고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주부 일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정말 힘들고 어려웠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냈다.

그런 나를 어쩌지 못하고 무심히 지켜보기만 했던 남편은, 남성 우월주의였던 자신의 여성관이, 그토록 하고 싶어했던 일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성취해서 신나게 살고 있는 나로 하여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지금도 여전히 주부의 일상과 겹치는 일과 속에서 날마다 허우적거리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집이라는 작고 아늑한 공간은 나에게 단순한 현실 도피처가 아니라 오히려 치열한 현실에의 참여를 추동하는 삶의 현장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눈부신 성장은 나에게 언제까지 머물러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잎싹이 마당의 식구들을 보며 자유와 소망을 위한 탈출을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처럼….

꿈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꿈꾸는 동안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망의 불씨가 언젠가는 꽃을 피우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하고 그 꿈을 이루었을 때 더더욱 행복하다. 끝없이 닥쳐오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가슴속에 언제나 소망의 불씨를 지니고 살았던 잎싹은 정말 위대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바람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서 잎싹은 아름다울 수 있었고 당당해질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다. 잎싹의 그런 소망은 한 생명을 훌륭하게 지켜냈고 자신의 꿈도 이루어냈다. 진정 아름다운 소망은 이처럼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까지도 도움을 주는 유익한 것이리라.

암탉의 품에서 멋지고 당당하게 자란 초록머리가 저 넓은 세상을 향하여 비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떠나보내야 할 우리 아이들의 생각에서 나도 이제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잎싹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땅의 수많은 주부들의 열병 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단지 그 양상만 다를 뿐. 우리 모두는 마음 깊은 곳에서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면 두려워하거나 억누르지만 말고 마당을 나온 잎싹처럼 활짝 꽃피워내야 하지 않을까.


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사계절(2002)


태그:#꿈,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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