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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우리 부부는 큰 맘 먹고 내비게이션을 장만했다. 기름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데, 우리 역마살은 가라앉을 줄 모르니 벼르고 별러서 산 것이다. 거금 36만원을 들여서.

 

길 한번 잘못 들어서면 몇 번이나 오락가락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짜증나면 티격태격 심심치 않게 말다툼을 했는데 이젠 그것도 끝이구나, 아쉬워하면서. 그런데 처음 장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 남자 혼자 중얼거린다.

"근데 이 아가씨, 계속 존댓말을 하네."


참, 이 남자.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고. 나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사실 걱정이었다. 우린 둘 다 기계치, 이걸 제대로 사용할 수나 있을라나. 나도 다른 차에서 보기만 했지 직접 다뤄보지 않아 어떻게 조작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게다가 우리 신랑은 다른 차를 탈 일이 없으니 내비가 상냥하게 말을 하는 것조차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내비에게 과분한 칭찬을 퍼부었다.

"얘가 효자지. 얘 아니었으면 다 돌아보지도 못했을 거야."

 

아는 길도 물어가라 해서, 님에게 복종했으나...

그날로 내비의 주가는 나날이 치솟았다. 그래서 무조건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식으로 어딜 가나 내비의 명령에 복종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다 한 술 더 떠서 난 그(내비게이션)에게 새로운 주문도 했다.

"난 말야. 얘(내비게이션)가 가끔은 나하고 대화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공지능이 있어서 '주인님,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라든가. '지금 이 길이 빠르긴 하지만 10㎞를 지나면서 정체가 시작되니 우회하는 길로 여기서 좌회전해주십시요' 하는 즉석 멘트를 해줄 것 같단 말야. 간혹 주인이 심심해서 졸음이 오면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고. 요즘은 진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잖아, 얘도 곧 그렇게 될 거 같아."

그러나 그 명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이놈이 너무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우리 차 탑승자에 서열을 매기자면 우선 운전대를 잡은 우리 신랑이 1순위요, 그 옆에 앉은 내가 2순위 그리고 내비는 3순위 내지는 우리의 하인격인데, 우리가 너무 치켜세우는 바람에 이놈이 잠시 자신의 처지를 망각, 제 마음대로 고집을 피운 것이다.

제 명성에 먹칠하는 짓은 우리집 장손의 첫딸 돌잔칫날 벌어졌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 집을 나섰다. 돌잔치가 열리는 곳은 분당에서도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라 했고, 나이 마흔이 다 돼 결혼한 우리 집 종손의 첫딸이니 사진이라도 찍어주려고 일부러 카메라까지 챙겼다. 그리고 '1시간 반이면 넉넉하겠지' 하고 여유를 부리며 시동을 걸었고 내비를 켰다.

그런데 우리의 여유는 국도로 접어들면서 깨졌다. 연휴 가운뎃날이었던 그날따라 차가 무척 밀렸던 것이다. 가다가다 싫증이 나자 광주를 지나 오포 쪽에서 샛길로 접어들었다. 잔치 시간은 가까워지고 이쯤 왔으면 지름길이 있으리라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우리에겐 믿을 구석인 '내비'가 있지 않은가. 이쯤에서 효자 내비를 향해 장담도 날렸다.


"이렇게 가면 얘(내비게이션)가 잘 안내해줄 거야."

 

그런데 그 장담이 귀에 거슬렸는지, 아니면 우리의 올곧은 믿음이 교만을 불러왔는지 이놈은 자꾸 이상한 짓으로 우릴 애태웠다. 계속 똑같은 주문으로 고집을 부렸던 것. 유턴 아니면 우회전 했다가 다시 좌회전의 반복이었는데,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가 빠져나온 3번국도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몇 번을 어기고 가도 결과는 똑같은 반복. 모르는 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겨우 사람들한테 묻고 물어 분당 어귀에 들어섰다.

 

짜쯩은 짜증대로 나고 스타일만 구겼네


'이젠 제대로 알려주겠지' 싶어 다시 명령한 대로 따라가는데, 이번엔 돌마터널로 진입하란다. 돌마터널이라면, 우리가 가려는 수내동의 반대방향!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돌마터널 전 신호에서 좌회전하자고 했다. 그런데 우리 신랑, 잔뜩 짜증이 나서 그대로 진입해 버렸다. 돌마터널 진입이라니. 그렇다면 야탑동 윗길로 연결되는 것 같은데, 이건 다시 3번국도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이젠 머리가 돌 지경이라 포기하고 내버려두려는데 우리 신랑, 자기가 봐도 영 아니었는지 바로 좌측 길로 빠져 좌회전 신호를 기다린다. 그로부터 우리 신랑, 내비는 무시하고 시내 쪽 길로 접어들면서 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곧 이매동 이정표가 나왔고 분당대로가 보였다. 분당대로로 나와 안심은 되었지만 시간은 이미 많이 늦었고, 내비는 정신을 차렸는지 그제서야 예의 그 상냥한 음성으로 목적지가 있는 골목으로 안내해주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나 늦어버린 우리,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손님이 많아 자리가 하나도 없었던 것. 다른 날은 오는 길에도 수시로 전화가 걸려왔고, 자리 같은 건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건만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두 꿩 구워먹은 소식이었다가 단체로 먹는 데만 열중, 우리는 한동안 구경꾼처럼 서있어야 했다.

가뜩이나 처갓집 식구들에게 주눅들어 있던 우리 신랑 때문에 나는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그냥 집으로 가버리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고 '팽' 밖으로 나와 버렸던 것. 나중에야 언니와 조카가 뛰어나와 호들갑을 떨었고, 잔치집은 잠시 어수선해졌다.

 

에구, 내비만 잘 됐더라도 그 지경은 안 됐을 텐데, 잔치고 뭐고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사진도 못 찍고 나 완전 그날 스타일 구겼다. 지금 생각하니 조카에게 약간 미안하기도 하지만, 속상한 내 마음은 꽤 오래갔다.

그래도 믿을 건 너뿐이었는데... 이젠 믿지 않으리

 

그 후로 복잡한 곳에서는 내비를 아예 켜지 않게 되었는데, 이 놈은 복잡하지 않은 곳에서도 대형사고를 쳤다. 밀양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예림서원과 추원재를 보고 표충비각을 보기 위해 내비게이션 검색을 했다. 표충비각이 아주 근사하게 떠서 우리는 주문대로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추원재에서 외곽으로 더 나가야 하는데 자꾸 시내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행지니 우리가 모르는 건 당연지사고 믿고 의지하는 건 내비뿐인데 어쩌랴. 하라는대로 할 수밖에. 그냥 그쪽으로 지름길이 있나 보다 했다. 진작 의심을 했다면 물어보고 차를 돌렸을 텐데 복잡한 시내로 접어들어서야 겨우 눈치를 챘다, 어이없게. 차를 돌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표충비각'이 있나요."
"표충비각은 여기가 아니고 무안리에 있는데, 여기서 직진하다가, 다음 신호에서 우회전해서 쭉 가세요. 그리고 다시 무안면사무소를 물어보고 가시면 돼요."


이런, 우리는 다시 무안면사무소를 검색하고 달렸다. 햇님은 달랑달랑하고 일정은 아직 몇 군데나 남아 있고. 결국 사명대사 유적지는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고 내비를 어쩌겠는가. 때려줄 수도 없고, 야단을 칠 수도 없고. 다만 그가 가끔은 정신이상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그래서 이제는 무조건 따라하기보다 우리의 변별력을 첨가, 시시때때로 의심해보면서 달린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가듯 심사숙고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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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네비게이션, #진화, #고집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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