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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책상달력 들어온 거 없나?"

아침에 어머님께서 혼잣말처럼 하신 말씀이다. 올해 경기가 나빠 여느 해에 비해 다이어리, 달력인심이 인색해졌다더니 그 여파가 우리 집까지 미치나보다. 평소 내가 정기구독하고 있는 한 영화잡지사에서도 사은품으로 주겠다던 다이어리를 못 주겠다는 연락을 엊그제 받았다. 

2009년도 벽걸이 달력은 이미 몇개 받아놓은 게 있었다. 어머님이 쓰시는 몫으로도 몇 개 받아놓았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특별히 책상달력이 필요하신 이유가 뭘까. 그때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언제였던가. 어머님 심부름으로 어머님 방의 서랍장에 무슨 서륜가를 가지러 간 적이 있었다. 나중에 서류를 다시 갖다놓으려 갔다보니 서랍장 속에 책상달력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칸칸마다 빼곡히 쓰여있는 어머님의 필체를 보았다. 얼핏 보니 일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메모 같기도 했다. 그 때가 올해 초여름 무렵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궁금증이 생겼다. 어머님이 안 계신 틈을 타 어머님 방에 들어가 서랍장을 열어보았다. 책상달력이 얌전히 누워있었다.

다시 보니 그것은 어머님의 일기였다. 일기라기보다는 메모. 아니 그냥 메모라고 부르기만은 뭔가 아쉬운 그런 내용이었다. 

'목욕'·'돌담길'·'롯데'…, '목욕'은 목욕을 다녀오신 날이고 '돌담길'은 어머님께서 항상 계모임으로 가시는 식당이름이다. 그러니까 그 계모임을 한 날을 의미한다. '롯데'는 백화점에 다녀오신 날.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단어의 조합도 있다. '정훈 소금' 정훈은 작은 시아주버니 이름이다. 그런데 웬 소금? 생각해보니 아주버니가 차를 새로 뽑은 기념으로 소금을 사와서 갖다 준 날이었다.

어머님의 비상한 기억력, 이유있었다

메모로 가득한 어머님의 탁상달력
 메모로 가득한 어머님의 탁상달력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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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아주 짧은 한 두 단어, 또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머님의 일상은 짧은 단어로 간결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키워드로 보는 어머님의 일상. 점점 더 재미있어서 장을 넘겨가며 죽 보았다. '리라, 집에 來'. 이날은 큰 시누이(리라)가 모처럼 친정 나들이를 한 날을 의미한다. 어머님의 일상은 주로 자녀들과 집안일을 두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깨 볶음'·'투표'·'은행'·'청국장'·'베란다청소'…, 어머님 기억력이 비상하시다 했더니 역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원래 기억력이 좋으신 것도 이유가 되지만 몇 월 몇 일 깨를 볶았다거나 아무개네로부터 청국장을 받아왔든지 그런 소소한 일들을 너무 잘 기억하셔서 혀를 내두르곤 했다. 하지만 어머님의 그러한 기억력은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었던 것이다. 

막내며느리인 내가 주인공인 날도 있다. 3월 첫째주 토요일. '소민 외출, 봄동 혼자 담금' 비교적 긴 메모다.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그때는 감지하지 못했지만 이 메모를 보니 그날의 일이 기억났다.

나는 급한 일이 있어 외출을 해야 했고 어머님은 봄동 겉절이를 담으셨다. 굉장히 송구스러워 했더니 어머님께서는 아직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이 메모를 못 보았더라면 계속 그런 줄 알았을 것이다.

군데군데 '소민 친정'이라는 메모도 보인다. 내가 친정나들이를 한 날을 메모해두셨다. 왠지 좀 미묘한 기분. 아무래도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관계다보니 그럴 것이다. '어머님께 내 부재가 그다지도 크게 느껴졌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이야 어쨌든.

'소민 봉투'라는 메모도 있다. 어라? 이건 뭐지. 내가 용돈을 드린 날이었나 보다. 등골이 싸해지면서 왠지 웃음이 나온다. 용돈을 드린 지가 이렇게 오래되었나? 좀 더 자주 드려야겠다. 그나저나 액수는 적어놓지 않으셔서 다행.

키워드로 본 어머님의 2008년

이비인후과, 한복다림질, 목욕… 소박한 어머님의 일상들
 이비인후과, 한복다림질, 목욕… 소박한 어머님의 일상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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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메모는 이렇듯 아주 간결하고 짧았다. 어찌 보면 너무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냥 있는 사실만을 나열했을 뿐 어머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에 어머님의 감정을 그대로 실은 것도 있었다. 

'5월 1일 준석, 실컷 통화' 이 날은 엘살바도르에 사는 큰아들(준석)과 통화를 하신 날이다. 비싼 국제통화료 때문에 아주 간략한 안부정도나 주고받고 끊어야하는 큰아들과의 통화는 항상 아쉬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인터넷을 통한 화상통화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서로의 얼굴도 보면서 제법 긴 통화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 화상통화를 한 날이었나 보다. 어버이날이 가까 오면서 나눈 통화였을 것이다. '실컷'이라는 말에서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그런가하면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의 발자취도 함께 그려있다. '4월 18일 의진 의경 원숭이학교' 아이들이 유치원 봄소풍으로 부안의 원숭이학교에 다녀온 날이었다. 4월 18일 그날 어머님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까.

'5월 25일 의진 의경 유치원 안가서 놀다', 교육자의 날과 관련해서 유치원에서 하루 휴원 했던 날이 있었는데 바로 그 날이었나 보다.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다 적어놓으시다니. 엄마인 나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을 칠순이 넘으신 어머님은 참 꼼꼼하게도 적어놓으셨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결심하는 일기쓰기. 하지만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너무 잘 쓰려고 애쓰거나 너무 거창하게 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키워드 한두 단어라도 매일 꾸준히 쓸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되돌아보면 우리 일상은 너절한 말이나 수식어가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간결하고 단순하게 그러나 꾸준히', 새해에는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서 어머님의 책상달력, 아니 책상일기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내년에는 나도 이처럼 살아야겠다고. 어머님의 탁상일기처럼 아주 짧고 간결하고 단순하게. 불필요한 것은 덜어내고 군더더기는 버리고. 그러나 뚜벅뚜벅 꾸준히 걸어가고 싶다. 그렇게 짧고 간결하게 살고 싶다.

그나저나 이 글을 쓰면서 어머님의 사생활을 너무 노출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죄송합니다, 어머님의 탁상일기 무단도용 해버렸어요."

하지만 그 대신 2009년도 새해 탁상달력을 선물로 드렸으니 어느 정도 용서해주시겠지. 새해 달력 겉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새해에는 기쁜 일만 그대에게'

어머님께 드린 내년 탁상달력. 새해에는 기쁜일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쵸 어머님.
 어머님께 드린 내년 탁상달력. 새해에는 기쁜일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쵸 어머님.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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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탁상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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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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