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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뭐니?"

"아빠, 왜?"

"그냥 한번 물어보는 거야. 아빠는 올해 기억에 남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말이야."

"이명박 OUT? 촛불문화제? 쓰리고? 아니, 아빠! 명박산성! 그래, 명박산성 맞아."

"왜 그 많은 단어 중 하필 명박산성이야?"

"얼마나 웃겨.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아마. 아빠, 나는 그때 TV로 명박산성을 보면서 국제적인 나라 망신이라고 생각했어. 내 친구들도 다 그래."

 

11일(목) 밤 10시쯤, 경남 창원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2학년 큰딸에게 손전화를 걸었다. 그 어느 해보다 '정말' 다사다난했던 2008년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10대 청소년들은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고 있을까 궁금해서였다. 나는 전화를 걸면서도 속으로는 학생이니까 학교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겠거니 했다.

 

10여년 앞에 폐지되었던 '일제고사' 부활이라거나 '국제중' 설립과 '특목고' 확대정책 등 1% 부자들만을 위한 교육정책 혹은 '학교자율화'를 외치면서도 유신시절 교육 통제를 방불케 하는 '교사 탄압'과 통제 등에 따른 빤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근데, 예상 밖의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내 친구들도 다 그래" 하는 걸 보면 큰딸과 요즈음 청소년들은 당장 자신 앞에 놓인 학교문제보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이는 그만큼 올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몹시 시끄러웠다는 것이다. 사실, 올해 들어 각계각층에 피멍이 시퍼렇게 들어 곪아 터지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대기업, 부자들 빼고는.

 

올해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만 해도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숭례문 화재로부터 시작해서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출신) 내각의 잇따른 실정, 영어 몰입교육, 미국산 미친 쇠고기 수입, 촛불문화제, 쓰리고(고유가·고물가·고환율)에 따른 신보릿고개, 학교자율화, 일제고사 부활, 종부세 인하 등.

 

그랬으니, 큰딸 입에서 이명박 정부를 비웃는 '명박산성'이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큰딸은 이날 한술 더 떠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뭐가 무서워 명박산성까지 쌓아놓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우스갯거리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어"라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할 수 있겠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 밑씻개나 하라는 거 아냐"

 

"이명박 대통령이 앞으로 어떡했으면 좋겠어?"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렇고, 할 수만 있다면 그냥 OUT되기를 바래. 아빠, 엄마나 내 친구들 부모님들이 일거리를 잃은 것도 이명박 대통령 실정 때문이잖아."

"너도 말했지만 선거로 뽑은 대통령을 함부로 물러나라고 할 순 없지."

"멀쩡한 나라를 다 망치고 있잖아. 물론 예상치 못한 국제유가가 오르고, 물가에 환율까지 오르긴 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잖아. 부자들만 살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 밑씻개나 하라는 거 아냐?"

 

나는 올해 들어 큰딸에게 자주 손전화를 걸었다. 청소년들은 요지경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 속내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큰딸은 그러니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생겼을 때 이를 바라보는 청소년 속내를 속속들이 내게 알려주는 미네르바인 셈이다. 

 

요즈음 들어 큰딸은 몹시 약삭빨라졌다. 먼저 손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지 않는다. 꼭 할 말이 있으면 내 손전화에 전화를 걸어 벨이 1번 딱 울리면 곧장 끊는다. 내 손전화에 제 전화번호를 남김으로써 나더러 전화를 걸어달라는 것이다. 내가 전화를 걸어 "문자라도 보내지" 하면 "약(약정요금)을 다 썼다"고 말한다. 제 손전화 요금을 아끼겠다는 투다.

 

서글프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일거리가 점점 떨어지면서 얼마 전부터 창원 집에 생활비조차 제대로 못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큰딸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다음 해 고3이 되는 큰딸이 올해 가장 기억나는 단어로 '명박산성'을 꼽으며, '이명박 OUT'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도 일거리를 잃고 헤매고 있는 아빠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래. 큰딸 말이 맞다. 사실, 나는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로 '이명박 아웃'이나 '촛불문화제', '신보릿고개' 중 하나를 꼽으려고 했다. 하지만 '명박산성'만큼 그 모든 뜻을 다 포함하고 있는 단어는 없었다. '명박산성' 이 네 글자야말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가장 적절하게 비꼬는 풍자임에 틀림없다.

   

 

길 가던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기다

 

"광종(狂宗)(연호 조지) 부시 8년(戊子年)에 조선국 서공(鼠公) 이명박이 쌓은 성으로 한양성의 내성(內城)이다. 성(城)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시 육조거리에 막아놓은 기대마벽(機隊馬壁)이 백성들에 의해 치워지매, 그에 대신하여 보다 더 견고한 철궤로 쌓아올린 책(柵)에 불과하다."-닉네임 'gva1004'

 

닉네임 'gva1004'라 쓰는 한 누리꾼이 네이버 '지식iN'에 올린 '명박산성'에 대한 우스꽝스런 설명을 들어보자. 이 누리꾼은 "이는 당시 서공(鼠公)의 사대주의 정책과 삼사(三司 조선, 중앙, 동아) 언관들의 부패를 책하는 촛불민심이 서공의 궁(宮)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 만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누리꾼은 또 "무자년(戊子年) 유월(六月) 패주(敗主) 두환을 몰아낸 일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한성부 포도대장 어(魚) 아무개의 지시로, 하루 밤낮 만에 쌓아올려져서 길 가던 도성의 백성들이 실로 괴이하게 여겼다"라며 "한편으로는 그 풍경을 관람코저 모여든 백성이 그 머릿수를 헤아리매 팔만(포도청 추산)이 넘어, 도성 내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도 전한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이 얼마나 배꼽 빠지도록 통쾌한 풍자인가. 이 누리꾼도 오죽 기가 막혔으면 이 같은 글을 올렸을까. '명박산성'은 이제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나온다. 이 사전에는 "명박산성(明博山城)은 2008년 6월 10일 6.10 민주화 항쟁 21주년을 맞아 한미 쇠고기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서울 도심에서 100만 촛불 대행진이 계획되자 경찰이 도심 곳곳에 설치한 컨테이너박스 바리케이드를 뜻하는 말"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사실, '명박산성'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누리꾼과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를 비꼬는 뜻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 등에서 이 낱말를 자주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미국의 파이낸셜타임즈, CNN, 뉴욕타임스, 영국 BBC,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 로이터, AP, 블룸버그 등에서 이 괴이한 '명박산성'을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지구촌이 배꼽을 잡은 2008 으뜸 산성 '명박산성'

 

경찰이 컨테이너 박스로 '명박산성'을 쌓던 그날, 나는 세종로에 서서 그 광경을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그 산성을 쌓는 모습을 바라보던 수많은 시민들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세상에. 뭐가 그리 무서워 대한민국 중심이라는 광화문 세종로에 그토록 흉물스런 '명박산성'을 쌓아야 했을까.  

 

이날, 경찰이 새벽부터 '명박산성'을 쌓기 시작하는 바람에 서울 도심 곳곳에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 하지만 경찰은 한술 더 떠 "시위대가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며, 명박산성 벽돌인 컨테이너에 그리스를 바르고 그 위에 태극기까지 내걸었다. 자칫 잘못하면 화재와 국기 훼손이 일어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국기는 경찰 손에 곧 철거되었다 

 

'명박산성'이 마무리되자 시민들이 몰려들어 '경축! 08년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이라고 씌어진 현수막을 내걸었다. 산성 곳곳에 "여기서부터 미국 코리아 주" 등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는 구호가 적힌 스티커가 나붙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시민들 대부분은 '명박산성'을 빗대 "이것이 이명박식 소통"이라며 조롱했다.

 

경찰청 경비국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쌓은 컨테이너(명박산성)에 대해 "오늘 시위는 명백한 범죄이다. 범죄의 예방과 제지를 위해 도로교통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시민들에게 다소 불편을 초래했지만 시위대와 경찰력 사이에 훌륭한 완충선 기능을 해서 상호간의 충돌을 방지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도 명박산성을 꿈꾸는가

 

쇠고기 국민대책회의는 이날 '명박산성'에 맞서 '국민토성'을 쌓았다. 쇠고기 국민대책회의는 '국민토성'을 쌓기 위해 트럭 두 대 분량의 모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경찰이 가로막자 경찰이 막고 있는 모래트럭으로부터 비닐봉지와 종이상자를 이용해 광화문까지 일일이 손으로 옮겨 '국민 토성'을 쌓았다.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2008년 10월 문화재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명박산성은 국가사적 제171호 '고종황제 즉위40년 기념 칭경비전'이 있는 곳에서 불과 30m 거리에 세워졌다"며 "문화재보호 관련법은 문화재 보전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행위는 기초자치단체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책임자 어청수 경찰청장을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8 이명박 시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그 '명박산성'을 보고 지나가는 아이들과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명박산성'을 바라보던 시민들과 외국인들도 따라 웃었다. 지금도 급하면 '명박산성'을 꿈꾸는 이명박 정부를 향해 국민들이 비웃고, 한반도가 비웃고, 지구촌 사람들이 비웃고, 지구촌이 함께 비웃고 있다.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2008 으뜸 세계 건축상'을 받을 뻔했던 '명박산성'. 큰딸과 큰딸 친구들이 '2008 가장 기억에 남는 올해의 단어'로 손꼽은 '명박산성'. 나는 지금도 '명박산성'이 사라진 광화문을 지나갈 때마다 청와대 쪽을 바라보며 속으로 외친다.

 

"이 대통령, 촛불 든 그대 국민들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덧붙이는 글 | '올해의 단어' 응모글입니다.


태그:#명박산성, #촛불문화제,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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