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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송학선은 집이 가난하여 보통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처지의 송학선은 1909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도다 농구상사(戶田農具商社)'에서 일하게 된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헐벗고 굶주렸던 그때, 더 많은 일을 하고도 일본인이 받는 급여의 반절만 받거나 부당하게 당하는 모멸 등은 먹고 살려면 식민지 백성으로서 참아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런 일자리마저 얻지 못하고 만주 등지로 유랑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실정이고 보면 송학선의 도다 농구상사 근무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행운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송학선은 이때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피부로 실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처럼 자신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살해하리라 결심한다.

 

이런 중에 송학선은 병 때문에 도다 농구상사에서 해고당한다. 이후 그는 사진관에서 일하게 되는데(1926년 3월부터), 사진관 수리 중에 서양식 칼 한 자루를 빼돌려 가슴에 품고 다닌다. 조선 총독 사이토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을 살해할 틈을 노리고 있는 와중에 순종이 죽는다. 그리하여 송학선은 사이토가 반드시 조문할 것이라 그때 달려들어 조선 총독을 죽이리라고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군중 틈에 섞여 곡을 하면서 조선 총독의 조문을 기다린다.

 

1926년 4월 28일 오후 1시경,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순종의 장례처인 창덕궁에 들어갔다가 금호문(金虎門)으로 나오는 것이 송학선에게 포착된다. 송학선은 조선 총독 사이토가 탄 자동차라고 판단, 자동차에 뛰어올라 일본인 2명을 살해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송학선이 죽인 사람은 조선 총독 사이토가 아닌 경성부협의원 '다카야마(高山孝行)'와 '사토(佐藤)'

 

송학선은 현장에서 자신을 추격하던 일본인 순사 '호지와라노'와 '오환필(吳煥弼)'을 칼로 찌르면서 대항하다가 체포, 다음해 5월 19일 사형된다(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이것이 1926년에 있었던 '송학선의 금호문 거사'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경성, 사진에 박히다>(산책자 펴냄)는 사진을 통해 본 우리나라 근대 문화사다. 저자는 안중근을 흠모한 나머지 '조선총독살해'에 자신의 일생을 건 송학선의 이야기를 1부 '권력, 사진에 눈뜨다'와 특집 '사진으로 맺어진 사상적 동지, 안중근과 송학선'에서 자세히 들려준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3년 전 어느 날 진고개(본정)를 지나다가 어느 일본인 상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사진을 보고, 어려서부터 흠모해오던 안의사를 본받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를 제거하려고 결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안중근의 사진이 지금의 배용준 사진처럼 국내의 고객들에게 잘 팔리는 상품이었다는 것이다. -책속에서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안중근 사진에 쏟아진 세인들의 관심이다. 저자는 오늘날 배용준 사진만큼이나 인기가 많았다는 안중근의 사진 2장-쇠줄로 포박된 채 옥문 앞에 서 있는 안중근의 모습과 쇠줄에 포박된 채 앉아있는 안중근의 모습이 담긴-을 제시, 그 숨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중략)...이 사진은 1910년 3월 26일 그가 처형당한 후에 '이토 암살자 안중근'이라는  제하의 사진엽서로 만들어져 유포되기도 했다. 배경이 지워진 채 '범죄자 사진'으로 제작된 이 엽서는 '암살자 안중근'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의 야만성과 폭력성, 범죄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의도가 담긴 안중근의 사진엽서는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근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일본의 거물급 정치인인 이토를 살해한 안중근이 도대체 누구이며,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 하는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해소시켜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책속에서

 

안중근 사진의 상품 가치를 알아 본 일본인 영업 사진사들은 이 사진엽서를 재빠르게 대량 복제하여 국내외에서 판매했다. 안중근의 이력과 사진을 편집하여 이토 살해 목적과 재판 전말까지 소개한 책자를 출간해 판매한 일본인 업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충신 안중근'이라고 쓰인 안중근 사진엽서를 제작하여 판매한 조선인들도 있었는데 한곳에서 순식간에 300매 가량이 팔렸으며, 사진을 구하려고 사진관에 몰려가 사진을 청구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일본의 사진 촬영, 제작 의도와는 달리 안중근의 사상을 흠모한 조선인과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일본인들 사이에 예기치 않은 유행이 발생, 다급해진 일본은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안중근 사진엽서 발매를 금지하고 압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제의 경찰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국외에서는 안중근의 사진판매가 계속되었다. 먼저 1910년 5월 미국의 한인단체인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발행한 <신한국보>에는 '우순소리'라는 광고가 실렸는데, 윤치호의 저작물을 한 번에 두 다스(dozen) 구입하면 안중근의 사진 한 점을 함께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책속에서

 

이 광고는 오늘날 잡지에 접혀 끼어있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 사진이나 잡지를 정기구독하면 주는 사은품을 연상하게 한다.

 

일제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사진의 인기는 결코 식지 않는다. 그리하여 안중근이 사형된 지 16년이나 지난 1926년, 안중근 사진이 계기가 된 '모방범죄(일본 시각으로 볼 때)'가 발생하고 만다.

 

송학선이 안중근의 사진을 보고 거사를 결심한 것은 1923년, 즉 안중근이 사형된 지 13년째다. 안중근 사진의 인기도와 당시, 사진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저자가 들려주는 안중근 사진 이야기는 좀 더 길게 이어진다.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 그동안 한국 사진사 연구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사진 평론, 전시 및 출판 기획 등을 해오며 앞서 <기생,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구보씨, 사진구경가다> 등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던 저자는 한국 근대,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결속 수단이자 일본의 식민지 통치 수단이었던 ‘사진’에 얽힌 우리문화의 숨은 이야기들을 속속 들려준다.

 

이 외에도 하와이 이민역사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는 사진신부와 사진결혼 이야기, 조선 최초의 여성 사진사와 사진관 혹은 우리나라 사진관의 발생과 변화, 일본의 별 희한한 명분의 식민지 정책과 관광사업 등 사진을 이용한 식민지 정책, 당시 연인들의 성풍속도와 사진의 역할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근대사를 다룬 책이나 언론매체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사진 여러 점도 눈에 띈다. 안중근 사진부터 에로물, 연인들이 정사의 증표로 찍었던 사진, 남자 몇 명이 작당하여 훔쳐보며 찍은 공중목욕탕의 여인들 사진 등, 시대는 다르지만 오늘날과 잇닿아있는 사진들이 우리나라 근대의 다양한 속살들을 맘껏 보여주고 있다고 할까?

 

한용운이나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 속 얼굴 모습도 책속에서 만날 수 있다. 근대 사진사나 사진관 관련 통계 자료, 사진과 관계된 사건의 신문기사 자료들도 눈에 띈다.

 

우리에게 워낙 많이 알려진 안중근과 송학선. 한국 근대사나 독립운동사 등을 통해 다소 근엄하고 딱딱하게만 알고 있던 것과 달리, 도입 초기 ‘혼 뺏는 기계’로도 불렸던 사진(기)을 통해 만나는 안중근과 송학선 이야기는 썩 흥미롭다. 의외의 한국 독립운동사와 한국 근대사라고 할까?

덧붙이는 글 | <경성, 사진에 박히다>(이경민 지음/산책자 펴냄/2008.10.27/14000)


경성, 사진에 박히다 - 사진으로 읽는 한국 근대 문화사

이경민 지음, 산책자(2008)


태그:#안중근, #송학선, #한국 근대사, #사진, #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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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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