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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일차] 걸은 거리   론세빌 ~주비리  22KM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인지 밤에 잠이 쉬이 오지 않는다. 숙소의 침대는 2층 침대인데 폭이 싱글보다 조금 좁고 옆 침대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위에서 뒤척이기라도 하면 파도에 밀리는 배처럼 출렁거리고 삐걱거린다. 이런 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연인들이 있으니. 다들 모른 척 해주기는 하더라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괴롭다. 화장실 가는 횟수가 잦아지니 더 괴롭다. 양식이 입에 맞는 사람들은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유럽의 음식이라는 게 다 이런 것인지 짜고, 차고, 기름진 것투성이라 과일이나 채소 외에는 먹을 게 없다. 군복무를 카투사에서 했을 때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고생했는데, 식성이 여전하다.

 

이곳 사람들은 아주 딱딱한 바게트 빵 사이에 치즈나 베이컨처럼 생긴 얇은 돼지고기 말린 것을 넣어서 먹거나, 말린 돼지고기를 순대처럼 단단하게 말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썰어 먹는데 이게 아주 짜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거기에 소금까지 뿌려서 먹는다. 소태가 따로 없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에 길 위로 나섰다. 채 마르지 않은 양말과 속옷을 배낭에 매달고. 마르지 않은 빨래를 배낭에 매다는 건 국토대장정 때 늘 하던 짓거리다. 숙소를 나서 조금 걷자 금방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함께 갔던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 여성 회원은 혼자서 무서워서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곳이라고 했지만 나는 너무 좋기만 하다. 어떻게 이런 길을 아름답게 보존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길을 좋게 만든다고 다듬거나 계단을 만들거나 공원이나 매점, 화장실 같은 것을 만들어놓지 않고 자연 상태를 그대로 두었다. 나무가 쓰러져 있으면 쓰러진 대로 길가로 밀쳐 두고, 낙엽이나 나무열매(도토리나 밤, 딸기 등)가 떨어지면 그대로 흙으로 돌아간다. 자연의 순환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 좋다.

 

고풍스럽게 서 있는 성당 뒤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성당 종탑 누각 뒤로 떠오르거나 지는 해는 평화를 느끼게 해준다. 길을 따라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생각한다. 일출을 보는 게 얼마만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790km가 남았다는 정겨운 표지판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어디에 걷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한 곳이 있었던가. 아스팔트의 갓길을 걸어가면 미친놈이라고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제발, 새로 만드는 길에 사람들이 걸어서 지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거나 그조차도 안 된다면 차를 피해서 걸을 수 있는 갓길이라도 만들어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길 위에 수북히 쌓인 낙엽 위를 걷는다. 낙엽을 밟으니 날마다 걷느라고 고생하는 발바닥에게 그나마 덜 미안해진다.

 

아직은 길 위에서 뱀을 한번도 못 봤다. 스페인의 뱀은 어떻게 생겼을까? 스페인의 동·식물이 궁금해진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곤충들은 또 어떤지 호기심이 생겨서 사진으로 담아가야지, 한다.

 

길 위에서 만난 한국 아가씨가 앞에서 걸어가는데 배낭에 매달고 가는 가리비 조개문양이 빛을 받으니 하얗게 반사되어 빛난다. 눈이 부시다.

 

가슴에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오르면서 마구 고함을 치고 싶고, 이 아름다운 새벽 숲길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진다. 누구라도 만나면 잘 해주고 싶고, 마구 사랑해주고 싶다. 내가 너무 감성적인가? 편안하고 행복해서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느낌을 안고 아침 길을 걷는다.

 

가을 햇살을 유럽 사람들은 황금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한낮의 햇볕을 피해 걷는데 그들은 바에 앉아서도 해를 따라 움직인다.

 

헤밍웨이가 송어낚시를 하던 곳이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하던 곳이라고 한다. 헤밍웨이는 이곳을 그래서 천국이라고 했던 것일까? 길 숲 사이를 흐르는 큰 냇물 속을 들여다보니 팔뚝만한 송어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닌다. 만일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다면 저 녀석들이 남아날까? 사흘 정도가 지나면 송어는 씨가 마르지 않을까?

 

길 가에 무덤 하나가 있다. 이곳을 걷던 일본인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 곳 산티아고 길에는 무덤이 많이 있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 받은 사람, 은퇴한 유명 음악가들, 꼭 이 길을 걷고 싶었으나 나이가 많고 쇠약해져서 걷기 어려운 노인들이 이 길을 걷다가 죽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면서 가족의 동의를 얻어 걷다가 죽는다고 하는데 그들의 무덤인가 보다.

 

집과 집 사이에 벽이 없다. 아니다, 벽이 없는 게 아니고 담장이 없구나. 이층이나 삼층집을 붙여서 지었다. 혹 지진이 자주 일어나서 서로 연결되도록 이어 짓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유럽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별 생각을 다 한다.

 

덧문들은 다 닫혀 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서 덧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한다. 신기하게 에어컨이 있는 집이 거의 없다. 집들마다 이층 창가에는 예쁜 꽃이 핀 화분들이 즐비하다. 집 주인이나 마을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길 가는 나그네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쉬어가기 좋은 벤치들도 놓여 있다. 

 

점심 식사를 하려고 길 가의 고목나무 위에 상을 차렸다. 숲속에서 햇살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무에는 이끼가 잔뜩 낀 버섯들이 매달려 있다. 도마뱀 비슷한 것을 발견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기 전에 잽싸게 숲속으로 도망쳐 버린다.

 

점심 식사래야 바게뜨 빵 사이에 소시지와 치즈를 끼워 넣은 것과 사과 한 알, 과일쥬스가 전부다. 이만하면 그다지 초라한 점심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뜨근한 국물이 그리워진다. 평소에 잘 안 먹던 미역국이 왜 그리 생각나던지. 마른 미역을 파는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산딸기를 처음에는 소심해서 안 따먹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따 먹기에 나도 따먹기 시작했다. 블루베리와 블랙베리가 있다. 걷다가 길가에서 탐스럽게 익은 것들을 보면 열심히 따먹었는데 야생이라 그런지 끝맛이 덜 달다.  

 

길 위에서 만난 프랑스 여성들과 사진을 같이 찍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참 따뜻하게 대해준다. 이웃집 누이들 같은 느낌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꼭 묻는 말이 있다. 왜 요즘 한국 사람들이 산티아고 길을 많이 걷느냐고. 난들 알겠수.

 

한낮의 따스한 햇살에 채 마르지 않은 빨래들을 말리는 중이고, 불란서 아지메들은 웃옷을 훌렁훌렁 벗고는 살갗을 말리느라 분주하다. 피부에 햇볕을 자주 쪼여줘야 좋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일주일의 휴가동안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는 스페인 간호사 아가씨 카르멩과 마리아. 카르멩은 가지고 있던 산티아고 책을 사인까지 해서 나에게 주었다. 카르멩은 휴가가 끝나 집으로 가야한다면서 한국인들에게 이런 책이 없을 테니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선물로 주고 갔다. 스페인어로 되어 있는 책이지만 산티아고 길과 카미노에 대한 역사와 성당 그리고 각 코스에 전체지도와 숙소 등이 아주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귀중한 책이었다. 고맙기도 해라.

 

이 아가씨, 알고 보니 유부녀였다.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가족을 놔두고 올 수 있으냐고 묻자 남편더러 아이들을 잘 돌보고 집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해놓고 왔다고 한다. 한국의 남편들도 아내를 이곳에 여행을 보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은 지도 위에 코스인 라라소나(27.7km)까지 다 걷지 않고 그냥 주비리 마을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 큰 길을 가로질러 200미터쯤 올라간 곳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서 머물기로 한다.

 

알베르게 정보

이 코스의 길은 그다지 힘든 길은 없었고 예쁜 숲길이 많다.  알베르게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부엌이 없어서 음식을 미리 준비해 가거나 사먹어야 함.

 

마을 입구에 작은 가게와 약국 있음. 바가 몇 군데 있고. 사설 알베르게는 숙박비가 10유로인데 커피 자판기와 전자레인지 있음. 5.5km 더 걸어가면 나오는 라라소나에도 식당과 숙소 있음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타난 사설 알베르게는 숙박비가 10유로이고 공립 알베르게는 6유로라고 한다.

 

침대에 침낭을 깔아놓고 빨래를 하고 샤워를 마친 뒤 배낭 속의 짐을 다시 정리한다. 당장 필요없는 매트리스와 손톱깎기, 건전지, 노트 등 많은 것들을 이곳에서 버리고 가기로 한다. 이상하게 다리와 발은 괜찮은데 왼쪽 어깨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곳 알베르게에는 부엌시설이 없어 도시도로 끝 지점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성당에 다닌다는 아가씨와 해군대령 출신 아저씨, 그리고 인도행 여성회원과 같이 풀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스프와 얇게 썬 고기 두 조각, 감자튀김, 생수, 와인과 후식으로 과일 통조림 몇 조각이 전부인데 12유로나 한다. 값은 비싸고 스프나 고기는 입맛에 맞지 않지만 비싼 돈을 주고 사먹는 음식인지라 억지로 다 먹었더니 배가 부르다. 그런데 느끼하다.

 

처음부터 고생을 할 각오였기 때문에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숙소 사정이 나쁘다고 해도 다 참는다. 하지만 쉽지 않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태그:#산티아고,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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