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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봄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나뭇잎들은 가을이라는 장엄한 계절을 화려하게 수놓은 다음 낙하한다. 단풍이 화려하다면 억새는 쓸쓸하다. 은빛으로 휘날리다 바람에게 몸을 맡긴 채 산화한다.

 

밀양으로 떠나기 전, 난 몹시 흥분되었다. 오래 전 다녀온 광활한 풍경, 바로 사자평 억새가 떠올랐던 것이다. 때문에 걷기를 싫어하는 그에게 아예 다짐부터 받아 놓았다.

 

"오늘 하루는 무조건 사자평만 가는 거야."

 

기억을 더듬어보니 오르는데 한 1시간 반 정도. 그러니 일찍 떠난다 해도 오후에나 도착할 거고 사자평만 다녀와도 해가 저물 것이다. 예전엔 무박이었다. 새벽녘 눈 비비고 올라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기대도 그만큼 고조되었다. 표충사로 해서 갔는데 길을 헷갈려 잠시 헤매기도 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올라갔고, 그 중에는 지금도 만나는 친구가 있다.

 

길은 몹시 가팔랐다. 돌투성이인 데다 가뭄으로 바싹 마른 흙에서 먼지가 날려 숨쉬기도 힘들었다. 단풍길을 따라 꾸역꾸역 오르니 드디어 기억 속 장면인 신작로가 나타났다. 짐작되는 길로 접어들자 앞에서 포클레인이 공사를 하고 있다. 앞으로 쭉 직진해 나가자 예전에 본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억새는 없다. 물론 있긴 있지만 전에 보았던 그 억새 평원은 아니었다. 이상해서 위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에게 물었다

 

"여기가 사자평 맞나요."

"예."

 

"그럼 억새는 어디 있나요."

"억새 보려면 1시간은 더 가야 해요."

 

잘못 온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영남 알프스 가는 길 사자봉 가까이나 가야 군락지를 만날 수 있다는 뜻 같다. 그분 말로는 산불이 난 후로 억새가 다 없어졌다는데, 아쉬웠다. 한 번 다녀온 곳을 갈 때는 언제나 예전 풍경을 기대하고 간다. 그런데 그 풍경은 거의 기다려주지 않는다. 실망이다.

 

억새를 만나러 더 올라가기에는 내 힘도 부치고 해님도 갈 길이 바쁘다며 재촉한다. 하는 수 없이 서둘러 내려오다 산등성이로 슬쩍 넘어가는 해님을 보았다. 하지만 해님은 우리를 위해 붉은 기운만은 남겨 놓았고, 우리는 그것에 의지해 무사히 내려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얼음골로 향했다. 얼음골은 온통 사과밭이었다. 밀양에 사과가 유명하다니, 처음 알았다. 표충사 부근은 단장 대추가 유명하고 얼음골은 사과가 유명하단다. 길 양쪽으로 다 사과밭이었고 길가에선 어김없이 사과를 내 놓고 팔았다. 올해는 풍년이라 과일 값이 싸다는데 약간 걱정도 되었다. 빨간 사과 한 알에 농부의 노고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를 알기에.

 

얼음골을 지나쳐 호박소로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등산객들로 붐볐다. 울긋불긋 단풍에 색색깔로 갖춰 입은 등산객들의 조화가 아주 멋지게 어울렸다. 백연사라는 절을 지나 10분 남짓 걸으니 과연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둥근 모양의 소였다. 다름 아닌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절묘한 물그릇이었는데, 손으로 쪼아 만들어도 이런 모양을 만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래서 자연을 위대하다고 하는지. 가뭄으로 수량은 적었지만 나는 그 풍경에 반해 말없이 한참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내려오는 길은 한결 여유로웠다. 무심코 지나쳤던 단풍과 계곡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가뭄으로 예쁜 색을 얻지 못한 잎들은 바닥에 떨어져 쌓여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더해 주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곳곳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였다.

 

 

사진 찍는데 전기 줄이 장애가 된다고 하지만, 그 정도는 애교라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설이고 그저 줄일 뿐이니까. 그러나 플래카드는 다른 문제다. 어쩌다 하나 둘은 경각심을 위해 필요하다지만 너무 남발하는 경우를 보면 오히려 눈살이 찌푸려진다. 우리의 의식 수준을 대변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또 이 방법이 유일한 방법일까 고민을 해보게도 만든다.  

 

 

얼음골에는 두 군데로 길이 나 있었다. 얼음골 계곡과 결빙지였는데 우리는 먼저 계곡으로 갔다. 입구 안내도에는 두 길이 연결이 돼 있지 않은데, 길이 너무 가팔라 오르는 내내 걱정이었다. 다시 내려갔다가 결빙지로 올라갈 생각에…. 그런데 계곡을 지나 위로도 길이 나 있었다. 물어 볼 사람도 없어 그냥 길을 따라 걸었더니 저절로 결빙지가 나타났다.

 

 

사실 얼음골 결빙지는 많은 매체에 소개돼 눈에 익숙한 풍경이었다. 더구나 무시무시한 쇠파이프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놓아 쇠파이프를 잡고 겨우 눈요기만 하고 돌아서자니 서운했다. 그 보다는 얼음골 계곡이 으스스하면서도 장엄해보였다. 역시 가물어 물은 없었지만 꼭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협곡 같아서 경이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가을을 대표하는 억새와 단풍, 거기다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사과까지 보고나니 가을의 풍성함이 가슴을 가득 채워주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았다.

덧붙이는 글 | 11월 1~2일 다녀왔습니다


태그:#밀양, #사자평, #얼음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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