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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 시인.
 양성우 시인.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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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군사독재가 이 땅을 통치하던 시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이자, 30대 젊은 시인이었던 양성우는 해방과 자유를 노래하다 교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가는 등 갖은 고초를 겪는다. 아래와 같은 시들이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가라앉으며/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불끈불끈 주먹을 쥐고/으드득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쳐서/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지금은 겨울인가/한밤중인가/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겨울공화국' 도입부.

1970년 시전문지 <시인>을 통해 등단했으니, 올해로 양성우의 시력은 38년. 그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해직과 옥살이 외에도 여러 형태의 절망을 환멸을 맛보았고, 폭압의 시대를 걷어내기 위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등의 단체에도 몸담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기성 정치인(13대 국회의원)으로 외도를 하기도 했다.

한 사람의 몸을 아프게 통과해온 간단치 않은 시간이었다. 이제 양성우는 회갑을 훌쩍 넘긴 초로의 나이. 시인으로 산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새 시집 <아침꽃잎>(책만드는집)의 '작가 후기'를 통해서다.

"이때까지 나를 살려주는 것의 중심이 하늘의 힘이라면 그 다음은 물론 시의 힘이리라. 시는 오랫동안 내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알게 모르게 나를 붙들어 주고 이끌어왔다. 나에게는 마치 신앙인 것처럼."

자유와 해방을 외치던 청년, 조용한 사랑노래를 읊조리다 

양성우 신작 시집 <아침꽃잎>
 양성우 신작 시집 <아침꽃잎>
ⓒ 책만드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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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앙'이라는 오래 묵힌 고백을 내놓은 양성우.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조국과 민초들에 대한 사랑과 시에 대한 사랑,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다.

혁명을 노래하던 피 뜨거운 청년시인에서 우리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을 나직하고 유려한 가락으로 연주하는 예순 다섯 중견시인으로 진화해온 양성우. 그는 <아침꽃잎>을 통해 이런 시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언제인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간 뒤에도
저 나무들은 비탈에 말없이 서 있겠지
그림자도 없이 나는 사라지고
어디에 그루터기 하나 남기지 못하겠지만
굳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나무처럼 잎을 맺고 떨어지는 것도
영원에 비해서는 순간의 일이라면 헛되고
부질없어라….
- 위의 책 중 '잎 지는 동안에' 일부.

다소 우울한 어조의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양성우가 가닿은 ‘사랑’이 한없이 즐겁고, 열락에 들뜬 허상이 아닌 오랜 탐구를 통해 아프게 깨달은 실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헛되고' 또한, '부질없는' 사랑.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헛됨과 부질없음을 단호히 거부하는 진정성 어린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다.

젊은 날, 그가 세상과 사람 또한, 불의한 조국까지를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절창 '누구에게나 사랑이 온다'를 읽어보자.

누구나 어느 때인가 뜨거운 사랑을 만난다
마치 거센 불길에 휩싸이듯이
몸이 아니라면, 차라리 두근거리는 가슴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고스란히 태우리
언제인가 여기저기 그을음이 묻고,
여러 발자국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해도….

매섭고 단호한 목소리로 사랑의 뜨거움과 진정성을 옹호하는 이 시를 볼라치면 양성우는 여전히 '겨울공화국'을 떨리는 목소리로 낭송하던 삼십대 청년 같다. 그렇다. 모두가 시간 앞에 나이를 먹어도 시와 시인은 세월을 거꾸로 되짚어갈 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기대되는 양성우의 시적 미래

<아침꽃잎>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양 시인의 시는 사랑이다. 너 혹은, 그대와 그를 향한 그리움이다"라는 말로 양 시인의 최근 시적 경향을 정의했다.

이 경향이 비단 최근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앞서 인용된 시편의 행간을 읽은 독자는 알 수 있으리라. 맞다. 양성우는 시를 쓰던 그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혁명의 시인'인 동시에 '사랑의 시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걸었던 시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시들을 제 살처럼 아껴주는 이들이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하는 양성우. 시인은 시와 함께 있을 때 쉬이 늙지 않는다. 앞으로도 시와 함께 울고 웃을 것이 명약관화한 그의 ‘시적 미래’에 기대와 궁금증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침꽃잎

양성우 지음, 책만드는집(2008)


태그:#양성우, #아침꽃잎, #자유, #사랑,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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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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