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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해고 30주년 행사장에 들어서는 조화순목사를 맞이하는 동일방직 노동자들
 동일방직 해고 30주년 행사장에 들어서는 조화순목사를 맞이하는 동일방직 노동자들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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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관 15층 뷔페에서는 낯선 기념식이 열렸다. 이름 하여 '동일방직 해고 30주년 모임'이다.

30년 만에 다시 모인 동일방직 노동자들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가 주최한 이 모임에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주역이었던 동일방직 노동자를 비롯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반도상사·청계피복·YH·고려피혁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이소선(전태일 어머니), 백기완(재야원로), 조화순(목사), 이해동(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허병섭(목사), 함세웅(신부), 김병상(신부), 김근태(민주당) 인재근 부부, 이호철(소설가), 천영세(전 의원), 노회찬(진보신당), 송현숙(재독화가) 등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역들 200여명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최영희 민주당 의원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70년대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회고하고, 노조탄압으로 회사에서 해고된 124명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왔는가를 얘기하는 자리였다.

1978년 4월 1일 동일방직에서 부당하게 강제로 해고된 이들 124명의 한결같은 요구는 여전히 "다시 기계 앞에 서고 싶다"는 것이다. 단 며칠만이라도 쫓겨난 그 기계 앞에 당당하게 서서 힘차게 노동하면서 그 아리따운 처녀 시절의 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언니 신분증으로 나이 속이고 들어간 동일방직

지난날의 상처도 이제는 환한 희망의 씨앗이 되는 듯 환하게 웃는 정명자씨
▲ 동일방직 해고 30주년을 맞이한 정명자씨 지난날의 상처도 이제는 환한 희망의 씨앗이 되는 듯 환하게 웃는 정명자씨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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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복직투쟁위원회에서 홍보 일을 맡아 하는 정명자는 195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다. 몇 척의 배를 끌고 동지나해까지 진출하기도 했지만 결국 어업에 실패하고 부도를 맞고 말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그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 따라 수산조합에 나가 생선을 다듬고 밤에는 조개를 까는 노동을 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언니따라 부산에 있는 합판공장에 취직했다.

18세 되던 해 그녀의 집은 빚 청산을 하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인천으로 올라온 그녀는 동일방직에 취직했다.

당시에는 동일방직에 입사하기 위해 '빽'을 쓰려는 여공들이 줄을 섰다. '페이'가 센 대신 일이 워낙 힘들어 몸이 약해도 안되고, 키가 작아도 못 들어가는 곳이었다. 입사 조건이 스무살 나이 제한이 있어서 열여덟인 그녀는 세살 위 언니 신분증으로 속여서 들어갔다.

회사에 들어가니 1분에 140걸음을 걷는 훈련을 시켰다. 8시간 동안 식사시간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오가며 큰 빗자루로 공장 청소를 했다. 공장 안은 32℃가 넘는 온도에, 먼지가 풀풀 나고 시끄러운 기계 소리 때문에 호루라기로 소통해야 했다. 너무 더워 공기가 통하게 신발 밑창을 찢어서 신고 다녔다. 발바닥은 부르트고 집에서 자다가도 기계소리 환청 때문에 몇 번씩 깨곤 하는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민주노조 건설에서 알몸시위, 똥물사건까지

오른쪽 끝이 정명자씨. 작업장이 너무 더워 운동화 앞을 공기가 통하도록 찢어서 신었다
▲ 동일방직 재직시 공장 동료들과 함께 오른쪽 끝이 정명자씨. 작업장이 너무 더워 운동화 앞을 공기가 통하도록 찢어서 신었다
ⓒ 정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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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유별나게 잘 해주는 언니들이 있었다. 그 언니들은 현장감독과는 달리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잘 가르쳐 주고 자신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언니들은 노동조합 대의원이었다. 언니들은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고, 언니들 따라 산업선교회에 나가면서 소모임에서 전태일도 만났고, 노동법도 만났고, 동아투위도 만났다.

본래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정명자씨는 이렇게 해서 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어 산업선교 활동과 노동조합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동일방직노조는 유신헌법으로 온 사회가 얼어붙기 직전인 1972년 5월 국내 최초로 어용의 남성후보를 꺾고, 여성이 노조지부장으로 선출된 작업장이다. 민주노조가 되자 회사측은 이때부터 노조 집행부를 회사측에 유리하도록 재구성하는 시도를 끊임 없이 하였다.  

1976년 7월에는 회사측과 경찰측의 노조탄압에 맞서 알몸시위로 맞서는 투쟁이 있었다.

1976년에 김영태가 섬유노조 위원장에 당선되고 난 이후 섬유노조 본조가 앞장서서 동일방직노조 탄압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로써 동일방직 노조와 본조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동일방직 노조집행부는 1978년 2월 21일에 새 대의원을 선출한다는 공고를 붙였는데 2월 20일에 남자공원 10여명이 노조사무실로 들이닥쳐 투표함을 부수고 노조간부를 폭행하였다.

노조 간부들은 노조사무실에서 철야하며 경계하고 있던 중 21일 새벽 5시 40분경 회사측 조종을 받은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선거하러 오는 여성조합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발랐다. 똥물로 짓밟힌 노동자들은 그래도 회사 일을 하기로 했는데 전국섬유노조는 3월 6일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해 버리고 이총각 지부장과 부지부장 2인, 총무부장 등 4명을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행위자'라는 이유로 제명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일방직 해고자 124명

78년 똥물사건 사진
 78년 똥물사건 사진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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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명자는 불사조라는 소그룹활동을 통해 한문공부, 노동법, 시사문제 등을 공부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노조 사정을 교회에 호소하는 한편 명동성당과 인천답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종교계 등 민주세력이 지원에 나섰다. 김수환 추기경을 필두로 한 종교지도자들이 정부당국과 접촉하여 협상한 결과 단식농성은 풀었지만 협상안은 회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고 노조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정명자는 김정자(방림방적), 김지선(삼원섬유), 김현숙(남영나일론), 진해자(남영나일론), 장남수(원풍모방) 등과 함께 1978년 3월 26일 50만여명이 모인 여의도 부활절연합예배장의 새벽기도회에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이크를 탈취한 사건을 벌인다.

당시 동일방직노조 탄압 등 노동 현안인  '노동삼권 보장하라',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방림방적 체불임금 지불하라' 등을 외치다 6명 전원이 구속된다. 이른바 부활절 예배사건이다. 언론·집회의 자유는 물론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완전히 막힌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으로밖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하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회사측은 무단결근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해고예고 예외인정신청'을 중앙노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이 신청을 '이유 있다'고 인정하여 4월 1일로 124명에 대한 해고통보를 하기에 이른다. 전국섬유노조본부는 4월 10일에 이들 124명의 해고자 명단을 전국의 각 사업장으로 보내 해고자들이 다른 공장에 취업하는 길조차 막아버렸다.

부활절 예배사건으로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정명자는 갈 곳이 없다. 회사에서는 이미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해도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블랙리스트로 말미암아 취직한 지 2~3일이면 해고됐다. 정명자도 대농방직에 취직했지만 동일방직 경력 때문에 해고되었다. 이때부터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동일방직 원직복직은 물론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79년 들어 124명의 해고자들은 조직을 정비해 복직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정기 모임화 했다. 동료 해고자 최연봉씨가 조직과 총무를 맡고, 정명자는 '동지회보'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이렇게 활동하는 중 1979년 10·26사건으로 노동자를 탄압하던 유신정권의 정점인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이에 동일방직 복직투쟁위원회는 복직·복권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정권에 이어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4월 3일 복직·복권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제작 살포했다는 이유로 정명자는 포고령 위반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나머지 해고자들은 5·17 계엄 확대까지 한국노총 강당을 점거해 농성했다.

포고령으로 구속되어 2개월을 살고 나온 정명자는 '동지회보'를 계속 발행했다. 그러다가 82년도에 경동산업에 취업했다.

여기에서 약 2년간 일하면서 1984년도에 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다시 해고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를 결성하고 노동법 개정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 활동을 하는 가운데 5·3사태 투쟁을 했고 87년 6·29 이후에는 인천지역에서 노동자 상담을 하면서 신규노조 결성 지원 활동을 했다.

복직 투쟁에서 세입자 주거권 투쟁으로

87년 11월에 도시빈민운동가인 정호성씨와 결혼한 정명자는 인천을 떠나 서울 미아 7동으로 이사를 왔다.

빈민운동가인 남편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빈민지역이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이기 때문에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명자도 이에 동의를 했다. 남편은 배터리 가게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미아 7동은 60년대 말 남산에서 철거된 사람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비영리민간탁아소였던 '어린이 사랑방'의 자모회를 꾸렸다. 그리고 이 자모회를 각 동과 연계하는 조직 활동을 했다.

95년부터 그 지역을 재개발을 하는 사업이 벌어지자 그녀는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재개발사업지에서도 가장 취약계층인 세입자들의 주거권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고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입자의 주거권운동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세입자대책위원회를 통해 임대아파트를 요구했고, 가이주(假移住)단지를 요구했다. 세입자대책위원회를 처음 결성할 때는 200여가구가 참여하였으나 철거투쟁을 하는 중 많이 이탈을 하여 마지막까지 43가구가 남았고 정명자는 이들과 함께 '미양마을'이라는 가이주 단지를 만들어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가이주단지에 입주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것은 'ㅁ건설'업체가  공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공사비만 받아 챙기고 부도난 상태에서 사라져 버린 사건이었다.

세입자대책위원회에서 가이주 단지를 쟁취한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의 결과였다. 건설업자를 선택하는것 역시 투쟁하는 것 이상으로 힘이 드는것이다. 왜냐하면 지역주민의 대부분이 건설노동자들이어서 자신들이 한 번 지어보겠노라고 하기도 하고 업자를 소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쳐 주민들을 설득하여 선택한 'ㅁ건설'은 일용노동자 기업으로 철거민 출신인 ㅈ씨가 운영하는 회사로 미아7동 세입자대책위원회를 지원하고 격려하던 주거연합과도 매우 밀접한 기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부도난 뒤 사라져 버린것이다. 부도를 내고 도주한 후라 찾을 수가 없었다. 1억이라는 거액을 건너줄 때 증인으로 있었던 당시 주거단체 대표도 'ㅁ건설'의 부도에 대해 증언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머지 돈으로 업자들을 불러 모아 사정을 이야기 한 후 재료값과 인건비만을 지급하여 가이주단지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녀는 정신적 심리적 신체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녀는 세입자운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얻은 것은 운동이란 이념과 신념과 당위성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도덕성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매우 보편적인 진실을 생활화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입자 일을 마무리하고 난 뒤 한 3년 가량을 심한 우울증과 갑상선 항진증을 앓았다. 그만큼 그 일이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끊임없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과 더불어 살고자 한다. 그래서 참교육학부모회,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을 해 왔다.

그녀는 앞으로도 살아온 삶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자아의 정체감을 되살려서 지역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더욱더 자신을 낮추면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갈고 닦는 수련도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6년에는 서울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다.

정명자씨가 일하는 월곡동의 일터나눔 사랑방
 정명자씨가 일하는 월곡동의 일터나눔 사랑방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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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은 사회적 일자리사업이다. 지역주민의 구인·구직을 연결시켜주는 사업으로서 노동부의 예산을 지원받아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사업의 예산 지원이 금년 8월 말로 끊겼다. 복지예산의 삭감으로 정작 사회적 약자를 위한 예산이 없어지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종부세의 무력화, 법인세 감세 등의 조치가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말이다.

예산이 끊긴 사회적일자리사업을 자구노력으로 이어가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지 그녀 자신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동일방직 노조 활동은 내 삶의 밑거름"

사회적 일자리를 위한 일을 하는 정명자씨
▲ 구직상담 사회적 일자리를 위한 일을 하는 정명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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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동일방직노동조합 활동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지?
"내 삶의 밑거름이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동일방직에서의 경험은 그때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양심과 사회정의 그리고 자주적인 삶은 내 평생의 정체성입니다. 변할 수없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힘이나마 최선을 다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동일방직에서의 경험 때문에 제 성격도 180도 바뀌었습니다. 원래 제 성격이 활달한 성격이 아니었는데 노조활동을 하다 보니까 활달한 성격으로 바뀌었어요."

그녀는 지금껏 살아온 30년의 인생이 기존질서로부터 늘 밀려나온 삶이었지만, 그녀가 밀려나온 그 자리에는 새로운 기운이 돋아나 더 좋은 세상으로 향하는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그 희망의 싹을 보면서 지난 상처를 자랑스럽게 쓰다듬으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어본다.       

동일방직 해고 30주년을 맞이해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합창하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
 동일방직 해고 30주년을 맞이해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합창하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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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명자, #해고노동자, #동일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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