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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경기도 일산 사는 죽마고우가 날 찾아왔을 때의 에피소드이다. 고향의 죽마고우인데다가 초등학교 동창생이기까지 한 친구의 방문이었는지라 나의 반가움은 컸다.

 

친구는 이곳 대전에 사시는 외삼촌 자제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왔었다. 그처럼 하루 앞당겨 온 건 나를 닮아 친구 또한 두주불사의 ‘주당 총수’인 때문이었다. 친구는 대전서 별도의 모임을 가지고 있는 여자 동창생 둘을 불러냈다.

 

하여 넷이서 횟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싱싱한 생선회에 소주만 마시자니 맨송맨송하였다. 그래서 소주에 맥주를 섞어 마시고자 주인장에게 맥주 컵을 부탁했다.

 

그러자 일산 친구 역시도 그리 마시겠다는 것이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러지 말고 니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폭탄주 마시자.”

 

그리 꼬드겼으나 숙영(가명)과 정희(가명)는 금세 손사래를 쳤다. 더 웃겼던 건 이어진 숙영의 드라마 유행어를 빙자한 멘트였다.

 

“나는 그렇게 안 살아봐서 그런 술은 못 마셔.”

그러자 정희는 한 술 더 떴다.

“미친~”

 

그 말에 우린 모두 박장대소를 금치 못 했는데... 가정을 지키며 순탄하게 사는 사람은 되레 이상했던 드라마가 지난 10월 5일에 104회 방송을 끝으로 종영되었다. 그 드라마의 명칭은 SBS가 특별기획 드라마로 제작한 ‘조강지처클럽’이었다.

 

헌데 이 드라마는 구조의 얼개가 불륜과 파경, 그리고 배우자(동거녀)에 대한 폄훼와 폭력 등이 문제로 부각된 바 있었다. 또한 당초보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려 방송하는 바람에 드라마의 스토리가 취보반산의 갈짓자 걸음을 하여 많은 이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여하튼 ‘조강지처클럽’의 마지막은 주인공들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나화신과 구세주의 재회에 더불어 한원수와 모지란의 재회 외에도 한복수와 길억의 행복한 결혼생활로 해피엔딩을 맞았기에 그나마 억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안방극장으로도 불리우는 드라마는 히트와 동시에 무수한 유행어를 창출해 낸다. “나는 그렇게 안 살아봐서...”는 ‘조강지처클럽’에서 기구한 운명의 여인으로 나왔던 모지란이 무시로 내뱉던 말이었다.

 

“미친~” 또한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나화신이 한원수에게 퍼붓던 일종의 악담이었다. 아무튼 그처럼 화기애애하게 술을 마신 우리는 2차로 노래방에 갔다.

 

거기서 나는 평소의 애창곡인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조항조의 ‘만약에’를 불렀다. 숙영은 탬버린까지 흔들며 현숙의 ‘춤추는 탬버린’을 멋들어지게 열창했다.

 

정희와 일산 친구 또한 각자 선호하는 노랠 잘 불렀는데 다시금 내 차례가 왔다. 근데 가을이 되고 보니 문득 조용필의 또 다른 노래인 ‘마도요’라는 노래가 울컥 그리웠다.

 

‘화려한 네온싸인 깜박일 때면 / 언제나 도시는 우리들의 것 /

저마다 목 놓아 소리치지만 / 허전한 가슴을 씻어낼 수 없어/

 

아쉬워 하면서 떠나네/ 바다를 헤매이는 철새들처럼 마도요 /

우리는 서로 앞서가려 하지만 마도요 /

 

젊음의 꿈을 찾는 우린 나그네 / 머물 수는 없어라 /

내일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 언제나 세상은 우리들의 것/

 

저마다 옳다고 우겨대지만 /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어 /

아쉬워 하면서 떠나네 / 바다를 헤매이는 철새들처럼 마도요 /

 

우리는 서로 앞서가려 하지만/ 마도요 젊음의 꿈을 찾는 우린 나그네/

머물 수는 없어라 마도요/ ’라는 가사의.

 

마도요는 도욧과의 겨울 철새이다. 도요새 가운데 가장 크며 갈색에 검은 무늬가 많다고 전해진다. 부리는 길고 아래로 굽어 있으며 다리가 길다.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인데 봄과 가을 두 차례 우리나라를 지나고 동북아시아에서 번식한단다. 나는 평소 조용필의 노래라면 다 좋아한다.

 

아니 무조건 좋아한다는 표현이 적격일 게다. 그같은 연유는 조용필이 부산에서 아직 신인으로 있을 때, 그러니까 그의 출세작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대단한 히트를 기록하기 전부터였다.

 

그 때부터도 나는 그의 첫 앨범에 수록된 노래인 ‘너무 짧아요’에 흠뻑 매료되었다. 나를 닮은 아내 역시도 조용필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다!

 

가을이면 더욱 생각나는 노래인 ‘마도요’는 우선 가사가 맘에 쏙 든다. ‘화려한 네온싸인 깜박일 때면 언제나 도시는 우리들의 것’이라는 부분에 이르면 과거 화려한 도시를 장차엔 내가 돈을 맘껏 벌어 장악하리라 했던 다부진 결심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어진 실패와 실수의 잇따름은 오늘날 나를 겨우겨우 먹고살기에도 바쁜 필부로 전락시키고야 말았다. 그러한 실패와 실수는 나를 한 때 비탄의 강에 빠뜨림에 따라 ‘목 놓아 소리치곤 했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내 ‘허전한 가슴을 씻어낼 수는’ 없었다.

 

노이무공(勞而無功)이란 좌절감에 한동안 해서는 안 되는 망상과 그 망상의 실제의 행동,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것까지도 안 해본 게 아니었다.

 

그러한 우둔한 작태는 동창회에도 나가지 못 하는 자격지심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하여 고향 초등학교 대전분회의 초대 회장이란 직책을 맡았음에도 중도에 스스로 그 직을 차버리고 수 년 동안이나 칩거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내 행동 반경은 ‘바다를 헤매이는 철새들처럼’ 등대 잃은 칠흑의 밤바다를 표류하는 난파선에 다름 아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그에 편승하여 그 누구보다 ‘앞서가려’ 하였지만 결과는 용두사미가 되고 보니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행시주육(行尸走肉)의 삶만을 점철했다가는 당시에 고교생과 중학생인 아들과 딸의 바라지는 물론이요, 장차엔 대학조차 보내지 못 한다는 당연한 귀결에 의지가 모아졌다.

 

“다시 뛰자!”

주식도 바닥까지 추락하면 더 이상은 내려갈 곳도 없어 반드시 반등(反騰)한다고 했던가. 하기야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었던 내 처지에서 당시의 새 마음은 어쩌면 선택 부재(不在)의 단 하나의 미로(迷路)였다.

 

기본급은 고사하고 건강보험료마저 지원이 없는 비루한 비정규직의 출판물 세일즈맨으로 다시 입사했다. 그리곤 누구보다 이른 아침 6시면 출근하여 열심히 뛰었고 더불어 열심히 살았다.

 

그러했음에도 한 번 얼크러진 내 삶의 지지부진은 영 그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두 아이를 대학에 보내자면 도시락을 지참해 점심을 해결하는 따위 외에도 뭐든 아끼는 외는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포류지질(蒲柳之質)의 나약한 몸임에도 아내는 부창부수로서 알바 일을 하여 내조에 나섰다. 남들처럼 사교육은 시킬 수 없었기에 대신에 아이들에게 나는 돈이 안 드는 방법을 택했다.

 

그건 바로 평소보다 무겁고 진득한 사랑과 칭찬, 그리고 배려와 이해라는 무기였다. 나의 그같은 열의의 실천에 아들이 먼저 화답해 주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대전권 제일의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한 아들은 나와 아내의 입을 귀에 가 걸리게 하였으니 말이다. 이어 딸 또한 서울의 명문대학에 역시도 장학생으로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는 그 때서야 비로소 고진감래(苦盡甘來)는 반드시 있구나... 란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동창회 대전분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 건 아이들이 이룬 그같은 혁혁한 ‘전과’(戰果)가 동인(動因)이었다.

 

동창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날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고생을 이담엔 반드시 보상받을 거야!”라며 위로하기까지 했다.

 

오늘이 10월 10일이니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 딱 이틀 남았다. 오늘 아침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었다. 받아보니 서울서 건 전화였는데 모 마케팅 업체의 상담원이었다.

 

“낼모레가 선생님의 결혼기념일이죠? 미리 축하드리면서...”

이어지는 상담원의 멘트는 ‘안 봐도 비디오’인 무슨 무슨 물품을 사서 “사모님께 드리라”는 것이었다. 

 

“고맙긴 한데 돈이 없어서요.”

그러자 상담원은 군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러한 현실에서도 보듯 나의 경제적 위상은 여전히 지리멸렬의 암울한 잿빛구름속이다.

그렇긴 하되 ‘마도요’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처럼 ‘젊음의 꿈’, 그러니까 여전히 미래의 장밋빛을 추구하는 것이 거개 인간의 속성이기에 나 또한 현재의 자리에서 ‘머물 수는 없어라’인 것이다.

 

그날 동창생들과의 자리는 너무도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서 노래방을 나온 뒤에도 우린 해장국집으로 가 소주를 또 마셨다.

 

거기서도 새삼 발견한 것이지만 우리들이 ‘내일(미래)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직도 여전히 ‘세상은 우리들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어’ 통분해 하고 그로 말미암아 ‘아쉬워 하면서’ 실의에 잠길 때도 적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마도요는 대부분의 철새들이 그러하듯 마도요 또한 무려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강행군을 하여야만 비로소 우리나라에 도착한다. 그러한 노력과 인내 없이는 포근한 서식지를 찾을 수 없는 때문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나는 ‘바다를 헤매이는 철새들처럼’ 살았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고행도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년이면 두 아이가 대학을 마치거나 대학 졸업반이 될 터이니 나의 어려움의 어두운 터널에도 시나브로 서광이 비추는 때문이다.

 

이틀 후면 맞게 되는 결혼 27주년 기념일에 우린 또 여행을 화중지병(畵中之餠)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하지만 삼겹살에 소주 한 잔씩을 나누고 노래방엔 가련다.

 

가서 ‘마도요’를 다시 부르면서 수천 킬로미터나 강행군을 하여 도착한 마도요의 끈기와 열정을 다시 배우고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가을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그 노래' 응모글입니다.


태그:#마도요, #일상 , #가을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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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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