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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복궁을 품고 있는 심양 황궁. 황제는 없다.
▲ 심양고궁 영복궁을 품고 있는 심양 황궁. 황제는 없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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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의 여명이 밝았다. 어젯밤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는 동쪽에서 어김없이 떠올랐다. 밤사이 찬바람이 불어서일까? 첫서리가 내렸다. 이제 기나긴 겨울로 접어든 것이다. 도르곤은 수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어젯밤에 황제께서 승하하셨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난국에 미증유의 비상사태다. 부대는 한점 동요 없기 바란다. 위에투오는 즉시 서부전선으로 출동하여 현 상황을 유지할 것이며 뚜어뚜오는 황후와 복림을 철통같이 경호하라. 영복궁에 개미 새끼 한마리 드나드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 나머지 부대는 현 위치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알겠나?"
"네."

우렁찬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위에투오는 대선의 장자이며 양남기의 기주(旗主)다. 그의 아버지가 무언의 지지를 보내고 있으나 아직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양남기는 황도가 안정될 때까지 전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르곤의 방침이다. 뚜어뚜오는 정백기의 기주이며 도르곤의 동생 다택이다. 뚜어뚜오는 누나처럼 따랐던 대옥아를 호위하라니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나 매우 좋았다.

"난 지금 호격을 만나러 간다."
"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 8대신이 무장을 하고 모여 있다 합니다. 저희들이 따라 가겠습니다."

내전이냐? 군력승계냐?

양황기. 양홍기. 양백기. 양남기. 공포의 팔기군 깃발이었다.
▲ 팔기 중 4기 양황기. 양홍기. 양백기. 양남기. 공포의 팔기군 깃발이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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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 장수가 극구 만류했다. 도르곤이 홍타이지의 사망사실을 접한 거의 같은 시각. 홍타이지의 장자 호격에게도 황제의 사망사실이 알려졌다. 황궁에 심어둔 첩자에 의해서다.

전갈을 받은 양황기의 8대신이 호격의 집으로 속속 모여 들었다. 양황기는 팔기 중 하나로 누루하치의 직할 부대였으며 홍타이지를 황제로 배출한 전통 있는 기(旗)다. 하지만 호격은 기주는 아니었다.

호격의 집에 모인 투얼거, 수오니, 투라이, 시한, 공이다이, 아오바이, 판타이, 타잔 등 8대신은 호격을 황제로, 복림을 태자로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힘의 대결도 불사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적전 분열되어 내전의 늪으로 빠져드느냐? 군력승계가 순조롭게 이행되느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일없다. 저놈들이 감히 이 도르곤 앞에서 칼을 빼겠느냐?"

말을 마치자마자 도르곤이 말에 올라 바람같이 사라졌다. 호격 집에 도착한 도르곤은 살벌한 분위기를 느꼈다. 좌우를 휘둘러 본 도르곤이 눈알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황제께서 승하하신 비상한 시기에 각자 자기의 소속부대에서 대기해야 할 놈들이 여기에 모여 무엇들 하는 것이냐? 이런 베라 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여기 칼이 어디 있느냐?"

도르곤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호격 휘하 장수의 칼을 빼트리려 하자 8대신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호격이 도르곤 앞에 나섰다.

"억울하면 황제께 여쭈어 보아라"

"숙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의 불찰입니다."
"오냐, 너의 부주의를 용서한다. 어젯밤에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알고 있었겠지?"
"네, 알고 있었습니다."

"차기 황제를 복림으로 하고 호격을 태자로 한다."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억울하면 황제께 여쭈어 보아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얼 물어보라는 것인가.

"하오거! 황제께서 나에게 옥새를 맡겨두셨다는 사실을 넌 잘 알고 있겠지?"

도르곤이 호격을 노려보았다. 불응하면 옥새의 힘으로 처치하겠다는 무언의 암시다. 홍타이지는 평소 군권과 옥새를 도르곤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살기 띤 도르곤의 눈초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복림이 성년이 될 때까지 정진왕과 예친왕이 섭정을 한다."
"너무 하십니다. 숙부님."

호격이 울먹였다.

"내 말을 잘 들어라 하오거! 내가 비록 섭정에 올랐지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북경이다. 너의 아버지와 나의 꿈은 북경이었다. 북경의 꿈을 너의 아버지와 함께 이루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황제께서 먼저 가셨다.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와 함께 북경의 꿈을 이루어 다오."
도르곤의 목소리는 떨렸고 진정성이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정남기. 정백기. 정황기. 정홍기. 공포의 팔기군 깃발이었다.
▲ 팔기 중 4기 정남기. 정백기. 정황기. 정홍기. 공포의 팔기군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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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격이 도르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때 호격 35세. 도르곤 32살이었다. 손아래 숙부였던 것이다. 호격이 나이 어린 숙부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촌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힘 앞에 꿇은 것이다.

당시 8기 중 양황기와 양백기 2개 기(旗)만 호격을 지지하고 나머지는 도르곤을 지지하고 있었다. 호격의 승복으로 후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원수가 죽었으니 이 아니 기쁠쏘냐

한편, 세자관에도 비상이 걸렸다. 황제의 죽음으로 황궁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 세자관은 웃음꽃이 피었다. 가만히 있어도 함박웃음이 피었다. 원수가 죽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소현이 관원들을 불러 모았다.

"대국은 황제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 있다. 너무 실없이 좋아하지 말고 표정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
"칸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조국 강산을 짓밟고 세자 저하를 이곳으로 끌고 온 철천지원수입니다. 그 불 돼지 같은 놈이 죽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북 치고 장구 치며 춤이라도 추고 싶습니다. 좋은 것을 좋다고도 못합니까?"

보덕이 이의를 제기했다.

"여러분의 심정을 이해한다. 나 역시 빈궁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참례를 하지 못하고 황제에게 조의를 표해야 하는 마음 찢어질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다. 적장이 죽어도 조문을 보내고 애도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다."
"그러한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악법도 지켜야 하고 악률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치다. 건국 초까지만 해도 성행했던 압슬형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 않았느냐. 하지만 대명률에는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다. 이것이 법이다. 필요가치가 사라지면 소멸되는 것이 법이다. 비록 강요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우리와 대국은 군신의 관계다. 우리가 힘을 비축하면 자연히 사라지겠지만 현재는 존재한다. 군신의 예에 합당하는 조의를 표하라."
"알겠습니다."

"정명수가 은자 1520냥을 내놓으며 종이와 단목(丹木)과 괴화(槐花)를 구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이곳의 장례는 완렴할 때 종이를 많이 쓴다. 조정에 알려 신속히 보내 달라 일러라.  개성에 부자 상인이 많아 백면지와 품질 좋은 익산지가 그곳에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 관소의 이름으로 그곳에서 물건을 구하여 부의(賻儀)하도록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세자관은 역관 이형장을 차비관으로 특명하여 개성에 급파했다.

복림이 어렸을 때 탔다는 그네. 심양고궁 내 영복궁에 있다.
▲ 영복궁 복림이 어렸을 때 탔다는 그네. 심양고궁 내 영복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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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공전(篤恭殿)에서 황제 즉위식이 열렸다. 홍타이지 사망 불과 5일 만이다. 순치(順治)제가 시작된 것이다. 신속하게 이루어진 승계 작업이다. 명나라와 전선을 대치하고 있는 청나라로서는 길게 끌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신속정확하게 매듭지어 대내외에 공표해야 했다. 청나라의 힘과 단결력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여섯 살배기 복림이 황제의 자리에 앉고 그 좌우에 우진왕과 예친왕이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비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도르곤의 지위는 숙부(叔父) 섭정왕에서 황숙부(皇叔父) 섭정왕으로 그리고 황부(皇父) 섭정왕으로 변화했다고 청사고(淸史稿)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문제의 당사자 효장은 홍타이지와 함께 심양 북릉에 묻히지도 못했으며 14명의 황후와 136명의 비빈이 묻혀있는 존하의 청동릉에도 묻히지 못했다. 청동릉 담장 밖에 홀로 잠들어 있는 효장에게 길가는 나그네가 '그대 진정 사랑한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지하에 묻혀 있는 장비는 뭐라 답할까?


태그:#소현세자, #도르곤, #효장, #순치, #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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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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