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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한 단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강원도 영월.
▲ 장릉. 숙부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한 단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강원도 영월.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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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권력구조는 홍타이지를 정점으로 4대 친왕과 3대 군왕이 포진하고 있다. 대선, 아제격, 도르곤, 다택이 4대 친왕으로 핵심세력이다. 혈통으로 장자 호격이 있지만 생모가 정비가 아니라는 약점이 있고 복림은 여섯 살이고 귀비소생 보무보궐은 이제 겨우 2살이다. 여기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도르곤이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 장자승계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조선에서는 양녕대군을 밀어내고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으로 등극했고 왕좌에 오른 단종을 숙부 수양대군이 밀어내고 세조로 등극했다. 권력의 물줄기는 직선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구부러져 흐르기도 한다. 권력의 속성이 그런 것이다. 권력은 힘을 먹고 자라며 세(勢)를 지향한다.

장자 승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청나라에서는 철저하게 능력 본위다. 누르하치가 도르곤을 후계로 지명했지만 홍타이지가 등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타이지가 후계를 지명하지 않고 갑자기 죽었으니 청나라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이다. 작금에도 후계를 정하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최고 권력자가 있으니 귀추가 주목된다.

죽지 않기 위해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북경 접수를 눈앞에 두고 홍타이지가 사망했다. 대명전쟁 수행에 차질이 예상되지만 장비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받아들였다.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다. 홍타이지 없는 두 모자는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서열에서는 복림이 열외지만 권력을 넘봐야 한다. 권좌가 탐이 나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다. 생모가 정비라는 바탕이 자양분이다. 최고 실력자를 품거나 안기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변수가 많다. 이 때문에 목숨을 담보한 도박이다.

9월 21일. 심양의 가을은 짧다. 이제 머잖아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이다. 삭풍이 불어올 때 두툼한 옷을 찾으면 늦다. 미리 준비해야 한다. 밖으로 나온 장비가 주위를 살폈다. 찌는 듯한 늦더위가 한풀 꺾이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폐부를 파고든다.

"쑤모얼!"
장비는 낮은 목소리로 시녀를 찾았다.

"네, 마마!"

초조하게 기다리던 소말이가 어둠속에서 나타났다. 소말이는 장비가 입궁할 때 데리고 들어온 몸종이다.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소말이는 지극정성으로 장비를 모셨고 장비는 자매처럼 대했다. 소말이는 장비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혜란주에 빠진 홍타이지가 거들떠보지도 않은 상황에서 장비가 복림을 낳으며 산통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소말이는 하늘에 기도했다.

시녀 신분으로 황제와 평배 했던 전설적인 여인, 소말이

"마마를 낳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아무리 아파도 약을 먹지 않겠습니다."

소말이의 기도가 하늘에 통했을까. 산통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장비는 복림을 순산했다. 이후, 소말이는 아무리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훗날 순치제는 몽고족의 여성 존칭 고(姑)를 붙여 쑤마라고 부르며 평배했으며 강희제는 할머니처럼 대했다.

"예친왕부로 갈 것이다. 급히 채비를 놓아라."

황후가 왕을 찾아가는 것이 격에 어울리지 않지만 체신을 따질 경황이 없다. 신속하게 4인교가 준비되었다.

"예친왕부로 잰 걸음을 놓아라."

가마에 오른 장비가 명했다. 소나기가 퍼부어도 결코 뛰지 않는 가마꾼들의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가마에 흔들리는 장비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주변에 세 사람의 남자가 있다. 홍타이지, 도르곤, 복림. 세 사람에 의하여 내 운명이 결정된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세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 바람이지만 하늘이 부르는 것은 내 영역 밖이다. 이글거리던 태양도 계절을 비켜가지 못하지 않은가. 그래서 한 사람은 갔다.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

어둠속을 달려온 가마가 예친왕부에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린 장비가 정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쏜살같이 뛰어나오던 사내와 부딪쳤다. 머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내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전갈을 받은 도르곤이 튀어나왔다.

숲속에서 있었던 일을 반달은 알고 있다

"아닌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도르곤이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밖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습니다."
장비가 걸음을 옮겼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다.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장비가 발길을 멈추었다.

"좌우를 물리쳐 주세요."
도르곤이 따르던 수하를 물리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늘에는 별빛이 총총하다.

"그 때도 하현달이었지요?"
영문을 모르는 도르곤이 장비를 쳐다보았다. 장비의 눈동자에 반달이 떠 있다.

"뚜얼군!"
나직한 목소리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예친왕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많지만 '뚜얼군'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홍타이지에 의해 순장되던 어머니가 불러주었고 대옥아가 마지막이었던 같았다. 잊힌 이름 '뚜얼군'을 듣는 순간, 도르곤의 등줄기에서 뜨거운 전율이 흘렀다.

황제는 어머니를 죽인 원수다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났다. '도르곤을 후계자로 하고 다이산을 섭정으로 한다'는 누르하치의 유언을 들었지만 나이 어린 아들 도르곤을 살리기 위해 '홍타이지를 후계자로 한다'라고 거짓으로 홍타이지에게 밝히고 아들의 생명을 구걸하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홍타이지에 의해 순장되면서 "뚜얼군! 뚜얼군!"이라고 부르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장비가 도르곤을 쳐다보았다. 촉촉이 젖은 도르곤의 눈동자에도 하현달이 걸려 있었다.

"커얼친의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커얼친,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몽골의 초원이다. 장비의 얼굴이 붉으스레 상기되었다. 도른곤의 가슴도 방망이질 쳤다. 지평선과 맞닿은 드넓은 초원. 말 달리던 소녀 대옥아를 발견하고 참새 가슴처럼 콩닥거리던 소년 도르곤. 이제야 도르곤이 감이 잡혔다.

몽골의 막강 실력자 보얼지지터의 초청을 받아 형 홍타이지와 함께 방문했던 커얼친. 푸른 초원에서 흰옷에 검은 말을 타던 소녀를 발견하고 무작정 말고삐를 당겼던 도르곤. 지평선 끝까지 달려가 마상에서의 포옹. 그 소녀가 형수가 되었어도 입술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았고 황후가 되었어도 도르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았었다.

"뚜얼군!"
"네, 마마."
"뚜얼군의 소망은 무엇이에요?"
도르곤을 바라보는 장비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빛났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도르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북경이지요? 말하지 않아도 난 다 알아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도르곤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르곤에겐 첫째도 북경, 둘째도 북경이다. 오로지 중원을 어떻게 손에 넣느냐가 그의 관심거리다.

"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커얼친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에요."
장비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뭇가지에 걸친 상현달이 구름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어렵지도 않은 소원인데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을 했지만 도르곤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장비가 사랑하는 사람은 형이고 형이 죽었으니 같이 죽으라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한 번 뱉어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도르곤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장비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흘러간 구름사이에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뚜얼군!"
장비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 황후마마."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장비가 놀랐다. 자기가 제일 빨리 전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늘나라로 가던 홍타이지가 동생에게 알려 주고 떠났단 말인가.

홍타이지가 위독에 빠지자 세력가들의 신경이 온통 황궁으로 쏠렸다. 홍타이지의 이상 유무가 행보에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도르곤도 황궁에 첩자를 심어놓았기에 장비의 전언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셨군요."

허탈했다. 하지만 장비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추리해보니 문에서 부딪혔던 그 사내가 궁에서 많이 보았던 사내였다. 무섭다. 전장의 호랑이로만 알고 있던 도르곤이 황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장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박판에서 패를 잡은 여인, 죽기 아니면 살기다

"폐하께서 복림을 후계로 하신다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폭탄발언이다. 진위가 밝혀지면 목이 달아나고 세상이 뒤집어질 말이다. 하지만 장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복림을 살리고 자신이 죽어간다면 복림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 아들과 자신은 어차피 같이 죽고 살아야 하는 공동 운명체다. 장비가 일생일대의 도박판에 뛰어들어 패를 잡은 것이다. 홍타이지가 하지 않은 말을 거침없이 터트리며 몰아가는 여자. 야심을 넘어 무서운 여자다.

"황제 폐하의 유언이라면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르곤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도르곤은 두 눈을 감았다.

'아버지 누르하치와 함께 여진족을 규합하고 몽골을 점령했다. 형 홍타이지와 함께 조선을 정벌하고 북경을 두드렸다. 대륙을 손아귀에 넣는 것은 시간문제다. 허나, 형이 여섯 살 배기 어린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유언했다지 않은가. 믿을 수 없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유언쯤은 뒤집을 수 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장비와 시녀 몇 명을 묶어 고문하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을 죽이고 복림을 없애버리면 황위는 내 거다. 호격? 그는 형의 장자이지만 정비 자식이 아니지 않은가. 다이산 형님? 그분은 연세도 많이 되셨고 예전 아버지가 형 홍타이지를 제치고 나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거칠 것이 없지 않은가?'

검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현재 나에게는 황위보다도 북경이 더 중요하다. 언제 북경에 들어가느냐가 나의 최대 관심사다. 조카 복림이 황위에 있더라도 북경을 접수하는 것은 바로 내가 아닌가? 복림은 형의 아들인 조카지만 내 아들과 다름없다. 대옥아의 아들이니까.'

마음을 비우고 나니 한결 가벼웠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현달이 곱다.

반달 + 반달 = 온달? "나를 안으세요, 난 황제를 안겠어요"

"뚜얼군!"
"네."

"뚜얼군의 눈동자에 반달이 떠 있습니다. 내 눈동자에도 보이나요?"
"네, 황후마마의 눈에도 반달이 떠있습니다."

"내 눈동자의 반달과 뚜얼군의 눈동자에 떠있는 반달을 합치면 온달이 되겠지요?"
"…"

도르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장비가 도르곤 쪽으로 쓰러졌다. 아니 농익은 32살 여인이 품속을 파고들었다. 순간 도르곤이 당황했다. 품속에 안겨오는 여자는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 황후다. 형수이면서 지엄하신 존재다. 밀어내야 할까? 끌어 당겨야 할까?

품속에 파묻힌 검은 머리칼에서 커얼친의 초원 냄새가 풍겨왔다.


태그:#도르곤, #장비, #단종, #뚜얼군, #커얼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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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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