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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배다리 문화축전’이라는 어우러짐마당이 벌어졌습니다. 올가을, 남녘땅 부산에서 ‘보수동 헌책방골목 잔치’가 벌어집니다. 같은 때, 서울에서는 ‘와우북페스티벌’이 벌어집니다. 해마다 봄에, 서울에서는 ‘서울국제도서전’이라는 자리가 있습니다. 올해부터, 부산에 있는 ‘인디고서원’이라는 곳에서는 ‘유스북 페스티벌’을 연다고 합니다.

 

어우러짐마당이 열리는 자리가 다르고, 마당을 여는 사람들이 다르며, 마당을 여는 뜻이 다릅니다. 모임자리를 꾸리는 사람에 따라서, 또 모임자리를 어떻게 가꾸고 싶은가 하는 생각에 따라서, 한판 어우러지는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토박이말 ‘잔치’를 빌어 이름을 붙입니다. 어떤 이는 일본 한자말 ‘축전(祝典)’이나 ‘축제(祝祭)’를 따와 이름을 내겁니다. 어떤 이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다는 이름인 ‘페스티벌(festival)’을 적어 이름을 삼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책’이지만, 누군가한테는 ‘도서(圖書)’이며, 누군가한테는 ‘북(book)’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하고픈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누군가 시키는 일만 억지로 해야 한다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쓰고 일하고 노는 자유가 틀림없이 있으며 잘 지켜져야 합니다. 토박이말을 사랑하니 토박이말을 쓰고, 우리가 중국한테 많이 매일 뿐 아니라 일본하고도 어깨동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자말을 쓰게 되며, 좁은 한국땅에서만 웅크리면 잘 살 수 없다는 믿음에 따라서 영어를 가르치고 배웁니다.

 

잠을 자는 집이라 ‘잠집’이지만, 어느 잠집도 ‘잠집’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인숙’이라 합니다. 다음으로 ‘여관’과 ‘모텔’이 쓰이고, 더 비싸고 급이 높다 하여 ‘호텔’입니다. 밥을 먹는 집이라 ‘밥집’이지만, 어느 밥집도 ‘밥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식당’이라 합니다. 다음으로 ‘음식점’과 ‘경양식점’이 쓰이고, 더 비싸고 급이 높다 하여 ‘레스토랑’과 ‘카페’입니다.

 

저는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서 저를 알리는 자리에 서면, 제 일감 그대로 ‘책 만드는 사람’이라 합니다. 글도 쓰며 살아가니 ‘글쓰는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사진도 찍고 있어서 ‘사진 찍는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동네에서는 조그마한 도서관을 꾸리고 있어 ‘도서관 지킴이’라는 이름도 쓰고,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면서 헌책방 이야기를 잡지로 엮어내기에 ‘헌책방 즐김이’라는 이름도 씁니다. 예전에 출판사에 몸담을 때에는 ‘엮는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제 둘레에 계신 분들은 ‘편집자’와 ‘에디터’라는 이름으로만 당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나들이를 가고 있습니다. 가장 더디 달리는 무궁화를 타고 조그마한 역도 구경합니다. 들판에 누렇게 익어 가는 곡식을 보고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봅니다. 책을 덮고 잠깐 고개를 들면 제 눈높이로 ‘코레일(Korail)’ 광고가 보입니다. 저는 틀림없이 철도노동자한테서 표를 끊어 기차를 탔다고 생각했지만, 잘못 생각했구나 싶습니다. 졸립습니다.

덧붙이는 글 |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는 글입니다.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책잔치, #책방골목잔치, #와우북페스티벌, #국제도서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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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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