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1 -

저는 조갑제라고 하는 분을 좋아하지 않으나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이가 1970년대에 쓴 《석유 사정 좀 환히 압시다》 같은 책은 놀라운 다리품이 엮어낸 땀방울이며, 기자로 일하는 사람들한테 ‘사건 취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9월 9일치 〈인천일보〉를 보면, 3쪽 아랫자리 통광고로 ‘맥아더장군 동상 보존 및 안보결의 대회’ 광고가 실립니다. 우리 동네 벽마다 알림쪽이 붙어 있기도 해서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경품 : 배낭 2000개 (경품 추첨권 배부는 14시 30분부터 4000명까지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가뜩이나 제 배낭이 낡고 닳아서 새 배낭을 사야 할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배낭 하나 얻으러 갈까 싶습니다(그렇지만 갈 겨를도 없고, 굳이 가고 싶지도 않아서 안 갔습니다). 이 자리에는 특별연사로 김동길씨가 와서 이야기를 하기로 되어 있답니다.

맥아더 동상을 지키자면서 동네방네 붙여 놓은 포스터는 아직도 골목길 곳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 포스터 맥아더 동상을 지키자면서 동네방네 붙여 놓은 포스터는 아직도 골목길 곳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이승만 씨가 자유당 권력을 누릴 때 ‘미국을 섬기려는 뜻’에서, 1890년대에 우리 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공원인 ‘만국공원(각국공원)’이 하루아침에 난데없이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는데, 1957년에 새 이름이 붙은 그때부터 오늘날까지(맥아더 동상도 이때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되씹게 됩니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새만금을 지키겠다는 집회에서, 천성산과 북한산에 굴이 뚫리지 않도록 지키겠다는 집회에서, 미친소 고기를 들여오는 정부 정책에 맞서겠다는 집회에서,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한다는 집회에서, 성노예로 시달린 할머니들이 수요일마다 하는 집회에서, 언제 한 번이라도 ‘추첨권’을 나누어 주고 ‘경품’을 준 적이 있었는가 모르겠습니다. 촛불집회에서 경품을 나누어 준다고 할 때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였을까요. 추첨권과 경품이 나도는 촛불집회는 촛불집회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김수정 님 만화책 <꼬마 인디언 레미요>. 미완성 작품입니다.
▲ 겉그림 김수정 님 만화책 <꼬마 인디언 레미요>. 미완성 작품입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김수정 님이 1986년부터 한 해 동안 그리다가 만 만화 《꼬마 인디언 레미요》(서울문화사,1990)를 펼칩니다. 책 앞머리에 김수정 님은, “외풍이 작가를, 아니 작품을 어떻게 침몰시키는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한 본보기다. 아무리 좋은 기획과 튼튼한 구성을 바탕으로 시도되었다고 해도 작가, 편집자, 독자와의 호흡이 맞지 않을 때 그 인물(주인공) 들은 중도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책장을 넘깁니다. 꼬마 인디언 레미요 자기가 잘못하는 바람에 추장인 자기 아버지가 흰둥이한테 죽게 되었지만, 그런 줄도 모르는 레미요는 꾸밈없이 흰둥이들 마을에 내려가서 보안관 도우미를 합니다.

레미요한테는 계급도 지위도 돈도 이름도 힘도 아무 쓰잘데기없는 노릇, 부질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씩씩하고 튼튼하고 훌륭한 추장인 아버지 삶조차 레미요한테는 마음을 끌지 못합니다. 자연과 벗삼아 싱싱하고 살갑게 살아가는 일에만 마음이 끌립니다. 그렇지만, 깔끔한 그림결에 사랑스러운 줄거리로 솔솔 풀려나가던 만화책이 중간에 엉성하게 끝맺음을 하고 맙니다. 이 까닭을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쉬울밖에 없습니다.

흰둥이 계집아이와 꼬마 인디언 레미요는 오순도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넌 어쩌면 그렇게 총을 잘 쏘니? 나이도 어린 게?” “맞히려고 하면 잘 안 맞는데, 안 맞히려고 하면 맞아.”(101쪽)

 - 2 -

열두 번째 ‘사진잔치(사진전시회)’를 지난 9월 1일부터 하고 있습니다. 고향마을 인천으로 돌아온 지난 이태 사이에 느낀 골목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서, 동네 골목길에 자리한 문화쉼터에서 조촐하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20층 30층 40층 아파트가 세워져서 도시내기나 시골내기나 거의 마찬가지 삶으로 바뀌어 가는 오늘날, ‘골목길 사람’은 바깥으로 한참 밀려나 있는 듯 보이지만, 골목집과 골목길과 골목사람은 예나 이제나 조용히 제자리를 지켜 오고 있습니다. 지붕 낮은 조그마한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예나 이제나 ‘현실’인 골목 문화입니다. ‘까마득한 옛날 풍경’이나 ‘흘러간 추억’이나 ‘사라지는 아름다움’이 아닌 골목 삶터입니다.

그렇지만, 몸소 살아내지 않으니까 이렇게밖에 못 느끼지 싶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생각을 굴린다 할지라도, 몸뚱이로는 부딪히지 않고 온몸으로 부대끼는 매무새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책은 읽어도 책에 담긴 줄거리를 자기 삶으로 녹여내지 않고, 대학교를 나오고 나라밖 나들이나 유학을 다녀오기는 했어도 지식과 정보를 자기 걸음걸이에 담아내지 않으니, 달리 손쓸 수 없는 노릇이지 싶습니다.

사진잔치를 알리는 쪽지를 만들어서 ‘골목집은 삶이고 골목길은 문화고 골목꽃은 예술’이라고 적어 놓는 한편, 사진잔치를 취재하는 기자한테도 같은 말을 입이 닳도록 들려주지만, 정작 기자들이 자기 일터로 돌아가서 쓴 기사를 보면 ‘사라짐-추억-풍경’ 같은 낱말만 가득가득.

골목길을 찍은 사진을 걸어 놓고, 골목길 한켠에 자리한 <시 다락방>에서 사진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 사진잔치 골목길을 찍은 사진을 걸어 놓고, 골목길 한켠에 자리한 <시 다락방>에서 사진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1983년 5월부터 12월까지 〈소년동아일보〉에 이어실었다고 하는 만화 《미스터 점보》를 봅니다. 이 만화는 김수정님이 아주 짧은 동안에 조금만 그리다가 만 작품입니다. 여덟 달쯤 그렸다고는 하지만, 다른 작품이 으레 이태쯤 그렸음을 헤아린다면 ‘그리다 만’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만화 《미스터 점보》가 퍽 사랑스럽습니다. 한 번 보고 다시 보고 또 보게 됩니다.

“하지만 15년 평생에 개미새끼 한 마리 다쳐 보지 않은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쳐?(71쪽)” 중학생 ‘순보(점보)’는 덩치가 산 만하고 키도 아주 큽니다. 둘레 사람들은 ‘순보’를 무서워하며 ‘점보’라고 부르지만, 순보는 순보라는 이름대로 아주 부드럽고 여리고 착한 아이입니다.

고봉을 누르고 눌러서 먹어도 배가 고프지만, 자기가 밥을 많이 먹어서 홀로 살림을 꾸리는 아버지가 힘겨워한다고 느끼면서 부러 밥을 굶기도 합니다. 순보는 얌전히 학교를 다니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은데, 둘레 사람들은 덩치도 크고 힘도 센 ‘점보’를 꼬드겨서 야구 대회에도 내보내고 권투 대회에도 내보내고 또 뭐도 시키려고만 합니다.

“아빠는 네가 (권투 대회에서) 비겁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잘 싸운 것으로 족하다. 푹 쉬어라.(93쪽)”

다른 말 없이 아이 어깨를 토닥이고,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고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 이 아버지한테서 받은 사랑과 믿음을 제 둘레 사람한테 기꺼이 나누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순보. 그러나 순보가 펼치는 사랑을 거의 몰라주는 세상 사람들.

덧붙이는 글 |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는 글입니다.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절판, #김수정, #맥아더 동상, #골목길, #헌책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