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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피터 홉커크 지음.
▲ <그레이트 게임> 겉그림. 피터 홉커크 지음.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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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중심부를 가로지른다는 이유보다는 세계사적 대립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기에 주목받는 이곳. 냉전에 깃든 차가운 기운보다 더 차가운 그 무엇이 고지대의 그것보다 더 뜨겁게(?) 몰아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지 모를 이곳.

말 그대로 ‘거대한 게임’이 거대한 막 뒤에서 오랜 기간 옷을 바꿔 입으며 재현되고 있는 이곳을, <그레이트 게임>(정영목 옮김/사계절 펴냄)을 지은 저널리스트 출신 영국 작가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는 중앙아시아로 소개한다.

중앙아시아의 역사적 중요성과 그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한 사건이 지난 8월에 그루지야에서 있었다. 그 사건의 한 주인공은 그루지야. 또 다른 주인공은 러시아였다. 그루지야는 아래로 터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이웃하고 있고 위로는 여전히 거대하고 강력한 나라인 러시아와 이웃하고 있다.

그런데, 옛 소련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루지야와 러시아 사이에서 벌어진 이 짧고도 긴 전쟁은 ‘세계의 화약고’ 한 부분이 다시 터진 것처럼 보였다. 친서방 정책을 펼쳐온 그루지야와 강대국의 면모를 다시 세우기에 바쁜 러시아가 충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나라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짙고 오랜 흔적을 안고 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벌어진 충돌은 그 오랜 '그레이트 게임'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이 오래된 게임의 첫 주인공은 제정 러시아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었다. 재밌는 것은 처음에는 프랑스가 전자 역할을 할 뻔했다는 것과 영국이 했던 역할을 지금은 미국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판을 형성하는 나라들 면면으로도 이미 거대한 이야기를 형성하는 ‘그레이트 게임’은 오래 전에 시작되어 지금껏 그 질긴 목숨을 이어가는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강대국들의 수 싸움에 시달리는 중앙아시아의 오래된 고민

“그는 사실 변장한 영국군 장교였다. 제6벵골원주민경기병대 소속의 아서 코널리 중위로, 엘렌버러 경이 캅카스와 카이베르 고개 사이의 군사적·정치적 무인 지대(러시아군이 침략한다면 이곳을 통과한다고 보았다)를 정찰할 임무를 맡겨 현장에 파견한 젊은 피 가운데 선두 주자였다. 과감하고, 재기 넘치고, 야심만만한 코널리는 그레이트 게임 출전 선수의 원형이라 할 만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기억에 남을 만한 표현을 만들어낸 사람도 코널리였다. 코널리는 놀라운 일을 겪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그의 뒤를 이어 중앙아시아의 거친 무법 지역으로 들어오게 될 사람들에게 조언해줄 말도 많았다.”(171쪽)

아서 코널리(Arthur Conolly)가 처음 만들어냈고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의 <킴(Kim)>(1901)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레이트 게임’은 몽골제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부흥의 기치를 높이기 시작한 러시아의 부흥기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해,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명칭은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과 힘겨루기를 표현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국들의 미묘한 갈등과 대립이 지리적 특성과 많은 자원, 유전 문제 등과 맞물려 지금껏 수시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몽골제국의 그림자를 벗어난 뒤,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 이후 국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는 영토 확장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지리상 맞닿은 아시아로 진출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인도를 점령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깃발을 아시아에서도 제 맘대로 휘날리던 영국은 지금껏 드넓은 지역을 거머쥐고 있는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 소식에 바짝 긴장하게 된다.

뜻하지 않은 소식에 놀란 영국은 러시아가 그러했듯 정보 수집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대방을 극도로 자극하는 일을 무작정 벌일 수 없던 양국은 개인 첩보원들을 순례 여행객, 상인 등으로 위장시켜 두 국가 사이의 ‘무풍지대’에 불게 될 회오리 조짐을 다각도로 탐색했다. 나중에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만큼 확대된 이 게임은 이렇듯 손에 땀을 쥐는 정보전에서부터 벌어졌다.

1907년에 영-러 협약을 맺어 1차 게임을 종결짓게 되는 영국과 러시아는 결과적으로 이곳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도 쉽게 오갈 수 없는 지리적 특성을 많이 지닌 이곳은 그루지야 사태에서 보듯  여전히 강대국들의 조용하고도 날카로운 대립이 가장 극심한 지역 중 하나이다. 또한, 확실히 지금보다는 더 소문에 민감하고 개개인의 첩보활동에 많이 기댈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 양국은 필요 이상으로 서로 경계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현실이 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이 게임의 무대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민족과 나라들은, 카스피해와 흑해를 거쳐 저 멀리 아시아 동쪽 끝까지 선을 이어보면 그 위 아래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수놓은 그 수많은 민족과 국가는 강대국들에게는 진공 상태로 보였을 그곳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 나름대로 부침을 거듭하고 스스로 역사를 쌓아왔다. 중앙아시아의 '주인'들 몰래(?!) 시작된 이 못된 게임이 여전히 끝나지 않는 이유는 시간, 공간, 규모 모든 면에서 아무도 쉽사리 멈출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려 끝없이 그 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레이트 게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우선, 이 책이 감당하고 있는 시기에 벌어진 1차 ‘그레이트 게임’은 1800년대부터 1907년 영-러 협약까지 지속되었고 주 무대는 중앙아시아 중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이었다. 물론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은 이 못된 게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2차 게임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1945년 2차대전 종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소련 붕괴 전후로 발생한 냉전과 신냉전의 찬바람들 속에서 3차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한 이후,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부제)는 아예 다른 대륙으로 무대를 옮기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그 암울한 역사를 지금껏 반복해가고 있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중앙아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을 설명하는 피터 홉커크의 방식은 딱딱한 정세분석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함께 만들어낸 진땀나는 모험들을 전체 흐름에 따라 엮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책 첫 부분은 ‘그레이트 게임’ 명칭 탄생의 주역인 아서 코널리의 끔찍한 사망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고 이러한 전개 방식은 내내 계속된다.

어찌보면 이 책은, 너무 큰 무대에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위대한' 개개인의 숨은 역사를 역사의 빠른 흐름 속에서 가능한 한 많이 끄집어내려 한 '대영제국' 후예의 애정어린 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득, '그레이트 게임'의 제물이 된 또 다른 희생자들, 아니 진정한 희생자들이라고 할 중앙아시아의 이름 모를 이들부터 되살려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옮긴이가 말했듯,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땅을 침범한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한 모험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레이트 게임의 종결판? 아직은 아무도 몰라...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강력한 두 선수, 즉 미합중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가스와 석유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이 지역을 평화롭고 협조적인 상태로 유지하기를 바란다. 사실 세계 무대에서 러시아의 새로운 힘은 송유관을 자신들이 통제한다는 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

미국과 러시아 외에도 이 지역의 다른 강국, 특히 중국, 인도, 파키스탄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곳을 유심히 살피며 우려를 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중앙아시아는 다시 역사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 셈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오직 용감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만이 미래를 예측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중앙아시아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뉴스의 한복판으로 돌아왔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12쪽)

사막과 산맥을 가로지르듯 이 나라 저 나라, 이 민족 저 민족을 넘나들며 벌어지고 있는 ‘그레이트 게임’은 여전히 끝날 줄을 모른다. 지은이 말처럼 소비에트 중앙아시아라 부르던 시절에 한꺼번에 묶어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이곳은 더 이상 한 묶음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민족과 나라 수부터 복잡한 곳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세계사를 통째로 끌어들여 이해해야 하는 곳이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경우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러시아, 유럽과 아시아 모두에 깊은 상처와 발자취를 남겨온 미국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과거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파키스탄, 인도, 중국 등 주변국가들도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 게임에 수시로 참여하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의 시선은 흔히 말하는 중동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지구촌의 슬픈 눈물은 차라리 이곳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레이트 게임’의 판은 더 커지고 더 단단해질 뿐 결코 약해지지 않을 듯하다. 중앙아시아에 드리운 무거운 그림자들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저 멀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고 또 좀 더 가깝게는(심리적으로는 중동보다 오히려 더 멀어보이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어지고 있는 강대국들의 알력과 갈등은 우리 한국에게도 늘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던 누군가가 지은이의 말을 빌려 갑자기 이 시대의 현재와 미래를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설명하려 들지 않을까 싶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그레이트 게임-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사계절, 2008. 2만 9,500원
(원제) The Great Game: On Secret Service of High Asia by Peter Hopkirk(1990, 2006)



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사계절(2008)


태그:#그레이트 게임, #중앙아시아, #피터 홉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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