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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이 여자, 이숙의

- 글 : 이숙의

- 펴낸곳 : 삼인 (2007.8.10.)

- 책값 : 16000원

 

 

 (1) 삶

 

 사람이 살면서 무엇인가 새롭게 겪어 볼 때에는 크게 달라진다고 느낍니다. 철없는 어린이가 철이 들어갈 때 새로워지고,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건너뛰면서 새로워집니다. 풋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첫마음을 간직할 때 새로워지고, 살가운 만남만큼이나 아쉬움 묻어나는 만남에 허우적거릴 때에도 새로워집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면서 대학교에 붙으면 붙는 대로, 붙지 않으면 또 붙지 않는 대로 새로워집니다.

 

 군대에 끌려가는 사내들과 군대에 안 끌려가는 사내들과 군대하고는 울타리 쌓고 지내는 여자들은 또 다 다르게 새로워집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다가 몸으로도 사랑을 하게 될 때에 새로워지는 한편, 뜻하지 않게 강간이라는 아픔을 받거나 몸 어느 곳이 부러지거나 잘리는 아픔을 겪을 때에도 새로워집니다.

 

 혼인을 하면서도 새로워지고 헤어지면서도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도 새로워지며 아이가 자라면서도 새로워집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혼인하고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때마다 새로워질 테지요.

 

 우리 삶은 늘 새로움이 이어집니다. 언제나 새로움이 가득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새로움이란 있을 수 없고, 꼭 치러야 하는 새로움 또한 없으며, 그냥저냥 겪고 지나칠 만한 새로움도 없습니다.

 

..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추구하면서 진실되고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신념과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  (261쪽)

 

 좋은 짝을 만나서 둘이 걷는 길을 걸어가면서 세상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혼자 걷는 길을 외로움 떨쳐내면서 제 나름대로 꿋꿋이 걸어가면서 새삼스러운 세상을 일구어 내기도 합니다. 짝짓기를 하면서 ‘짝짓기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만, ‘짝짓기를 안 하는 아름다움’ 또한 있습니다. 첫사랑을 이루는 일도 아름답지만, 깨지고 또 깨지다가 스무 번이나 서른 번째에 이르러 참사랑을 이루는 일도 아름답습니다. 아예 사랑 한 번 이루지 못하면서 삶을 마치더라도 그 나름대로 아름답습니다. 어느 한 가지 길이 가장 아름답다고, 그 한 가지 길을 겪지 않으면 ‘세상을 모른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 “이 선생, 누가 그걸 모르고 있는가? 그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공박하지 말아야지. 신상에 좋지 못해!” 잘못되어 가는 것을 지적하고 잘 되는 방향으로 애써 보자는 말이 왜 허물이 된단 말인가? 아무 소리 않고 꾸역꾸역 시키는 대로 조작된 통계나 보고하고 만족하는 것이 애국 애족하는 길이요, 정부 시책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평생직이니 천직이니 하고 일컬었던 교직 생활을 떠나게끔 한 동기가 되었다 ..  (248쪽)

 

 ‘아이 낳기’를 하면, 자기를 낳고 기른 어버이가 다르게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 낳기를 안 하고서도 자기 어버이를 다르게 볼 수 없었을까요.

 

 그동안 못 보던 모습을 보는 눈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늘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맴돌고 있다가, 어느 때에 이르러 톡 하고 터지면서 불거집니다. 마음밭이 기름져 있으니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지, 마음밭이 메마른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보지 못합니다. 기름진 마음밭이니 작은 일 하나를 겪으면서도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나날이 새힘을 얻어요. 메마른 마음밭이니 큰 일 숱하게 겪으면서도 어느 하루도 새로워지지 못하는 한편 나날이 어두워만 갑니다.

 

.. 삯바느질을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생계 수단이었다. 경험이라곤 사범학교 당시 운동복 한 벌을 지어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자신은 못 가져도 용기를 내야만 했다. 농번기 바쁠 때라 그래도 신여성이 재봉틀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이웃에서 몇 가지 주문이 들어왔다.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먹고살려면 어쨌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입던 옷을 견본 삼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상의 운동복 하나를 어찌어찌 궁색하게 만들어 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매우 만족하면서 “이렇게 잘하시니, 동네에 알려야겠군요, 공부하고 언제 이렇게 일까지 배웠노…….”라고 용기를 주었다 ..  (107쪽)

 

 새벽 한 시 사십사 분, 고단하게 잠든 옆지기와 아기를 옆에 누이고 불을 켜 놓습니다. 전등은 소포종이로 갓을 씌워서 불빛이 어둡게 해 두었습니다. 모자라나마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한 밝기입니다.

 

 조금 앞서 우리 아기가 물똥을 어마어마하게 누어서 기저귀 두 장으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넘쳐서 방수담요까지 똥자국이 덕지덕지 묻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아기가 방수담요에 누거나 지린 똥오줌이 솔찬합니다. 이를 어찌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지기가 둘둘 말더니 저한테 건넵니다. 빨아야겠다고.

 

 아기를 낳은 옆지기는 작은 물건 하나 집어들기 힘들고, 설거지나 빨래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불어터지는 젖 짜기에도 고달플 뿐더러, 젖먹이기에도 젖이 아픕니다. 자리에 드러누워서 “여보, 목 말라요.” “여보, 배고파요.” 하고 말할 수는 있으나, “내가 밥해 줄까요?” “당신은 힘드니 내가 기저귀 빨게요.” 하고 나설 수 없습니다. “나는 언제쯤 빨래를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묻는데, 참말 언제쯤 신나게 빨래를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려나요.

 

 저도 몸이 고단해서 그냥 드러눕고 싶기는 하지만, 적어도 새벽 두어 시까지는 억지로 잠을 좇으면서 두 사람 곁을 지킵니다. 그나마 옆지기가 새벽 두어 시까지라도 아기 걱정을 않으면서 느긋하게 잠들도록 해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도 무쇠가 아닌 피가 흐르는 살덩이 사람인지라, 새벽 세 시쯤 넘기면 눈꺼풀이 천 근 만 근이고, 잠깐 자리에 등을 붙이면 그대로 곯아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여보, 오줌 쌌어요.” 하는 모기만한 소리에 퍼득 깨어나서 제대로 뜨이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젖은 기저귀를 갈고 새 기저귀를 받친 다음, 젖은 기저귀를 들고 뒷간에 가서 물로 헹구어 목초액 물통에 담급니다. 이때까지 목초액 물통에 담가 놓고 있던 빨래는 다시 물로 헹군 뒤 털어서 빨랫줄에 널고, 옆지기가 뒷간에 가면서 갈고 담가 놓은 피 기저귀도 빱니다.

 

 조금 앞서까지 똥오줌 범벅이 된 방수담요를 빨았고, 여러 번 거듭 빨아야 비로소 똥기운이 빠지는 똥기저귀를 빨았습니다. 그 김에 몸도 씻습니다. 어제 새벽부터 오늘밤까지 내내 땀에 젖어 있던 몸뚱이입니다. 그러나 제 몸뚱이를 씻을 겨를이란 없고, 아기 몸 씻고 아기 밥 챙기고 옆지기 팔다리 허리 어깨 엉덩이 주무르며, 젖짜기를 거들고,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치릅니다.

 

 땀과 때를 싹 걷어내니 개운해서 잠을 자면 아주 달게 잘 듯한데, 잠은 좀 미루기로 합니다. 아기한테 읽어 주기도 하고, 함께 누운 옆지기한테 읽어 주기도 하는, 내 가슴에 눈물겨이 파고든 책 하나를 찬찬히 곱씹고 싶어서요. 이제는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삶을 차근차근 되새기면서 지금 내 삶은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가를 되새기고 싶어서요. 홀몸으로 딸아이를 키우면서 갖은 애를 다 쓰고 갖가지 들볶임과 시달림을 견디어 낸 그 삶을 되돌아보면서 지금 내가 겪거나 부대끼는 삶은 어떠한가를 맞대어 보고 싶어서요.

 

.. 산다는 것이 이렇게 뼈를 깎는 고통으로 쌓여지는 것일까? 놀고먹을 수 있는, 흥청망청하는 자들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잠시 분노에 젖기도 했다.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앗아 가고 있단 말인가? … ‘너희들은 우리를 짓밟았다고 여기겠지만, 우리의 희망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 가엾어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참되게 살았던가를 알 날이 있을 것이다.’ ..  (144∼145, 139쪽)

 

 

 (2) 사랑

 

 옆지기 부모님 댁에서 몸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이서 몸풀이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부러 이곳으로 왔습니다. 우리 둘이 낳은 아이요, 우리 둘이 키울 아이입니다만, 이 아이 하나로 옆지기 부모님 댁에 감도는 기운을 살며시 바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리로 와서 지내고 있습니다.

 

 옆지기 부모님은 우리 아이를 보면서, ‘옆지기 어릴 적을 쏙 빼닮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를 제 부모님 댁에 데리고 갔다면, 틀림없이 제 부모님은 ‘제 어릴 적을 아주 빼닮았다’고 말할 테니까요.

 

 가시버시는 서로 닮아간다고 하는 만큼, 우리 아이는 옆지기를 닮기도 하고 저를 닮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 얼굴은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 자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아도 아기 귀와 발은 제 귀와 발 모양 그대로이고, 눈코입은 지금 옆지기 눈코입인데, 날마다 자라나는 아이 눈코입은 또 날마다 바뀌면서 제 눈코입을 닮았구나 싶기도 하고, 또다른 새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속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벼리는 고스란히 벼리 얼굴이구나. 벼리는 벼리 그대로 태어났구나.’ 하고.

 

.. 그러나 나는 냉소했다. 그이에게 견준 나 자신의 무능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만큼 능력이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  (28쪽)

 

 아이는 옆지기 몸에서 열 달을 자란 다음, 스물네 시간 배앓이를 거쳐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옆지기가 열 달 동안 아이를 몸에 안는 동안, 옆지기가 먹을 밥을 제 손으로 챙겨 주었고, 옆지기가 스물네 시간 배앓이를 하는 동안, 곁에서 손을 잡고 등과 허리를 주무르고 터져나오는 양수와 피를 제 몸과 이불로 받아 가면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나온 지금은, 서로 번갈아가며 아이를 팔에 안아 주기도 하고 젖을 먹이기도 합니다. 옆지기 한쪽 젖꼭지가 많이 헐어서 곧바로 젖을 먹이기 어렵게 되어, 젖을 따로 짜 놓은 뒤 젖병으로 물려서 먹입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밥을 먹는 아기이고, 옆지기 젖도 두 시간마다 불어서 한쪽 젖을 먹이더라도 다른 쪽 젖을 짜 놓아야 합니다. 밤이라서 안 먹고 낮이라고 더 먹지 않습니다. 밤이라고 안 불고 낮이라고 더 불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밤이건 낮이건 느긋하게 잠들 틈이 없고, 언제나 아기한테 붙어서 아기를 돌보고 자기 몸을 추슬러야 합니다.

 

 이때 옆에서 아이 어머니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이 어머니는 제 몸을 추스르기도 어려울 뿐더러 아이 돌보기도 몹시 어렵습니다. 아이와 아이 어머니 모두한테 안 좋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산후조리원이라는 곳이 부쩍 늘어나고 있으며, 조리사로 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느 가시버시라면 돈이 많이 들어도 산후조리원에 아이와 아이 어머니를 넣을 텐데, 우리는 산후조리원은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둘이서 기를 생각이었고, 아이를 낳고 세이레가 되는 이날까지도 둘이서 잘 해내고 있습니다(옆지기 부모님 댁에서 장모님도 많이 도와주셨고).

 

.. 1989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 아이들 동화책, 이름 있다는 작가의 소설 등 많은 책을 사 왔다. 그중에는 이전부터 보고 싶었던 이태의 《남부군》도 있었다. 책 몇 군데에서 그의 이름(박종근)이 기재된 것을 보고 놀랐다.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이의 활동 일부가 소개되어 있었다 …… 더군다나 그가 1952년 3∼5월경에 전사했다고 뚜렷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은가? 아직껏 우리 가족들 가슴에는 박종근이라는 이름 석 자가 어둠 속에 가려져만 있는데, 그렇게나 천연덕스럽게 기록되어 있다니……. 나는 그 책을 읽은 후 너무나 크고 깊은 가슴앓이로 그만 기운을 잃고 말았다. 오랫동안 헤어날 수 없는 사무침과 쓰라림으로 멍하니 보냈다. 다 청산된 마음이라고 여겼던 내 가슴을 날이면 날마다 쑤셔 오던 상처들로 미쳐 날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밤마다 홀로 숨죽여 흐느꼈다 ..  (174쪽)

 

 아기를 팔에 안고 어르면서, 젖병을 물리면서, 똥오줌 기저귀를 애써 빨아서 널고 다림질을 하면서, 하루에 한 번쯤 책을 읽어 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도 여느 가시버시처럼 ‘돈 더 많이 버는 일’에 몸을 바쳐서 산후조리원에 넣었어야 했느냐고. 여느 가시버시들은 ‘돈을 덜 벌거나 안 벌며’ 한두 달쯤 몸풀이를 하더라도, 두 사람이 늘 함께 있으면서 서로 돕고 북돋우면 한결 낫지 않느냐고.

 

 스물네 시간을 함께 붙어 있자면, 마땅한 이야기지만, 지아비 되는 사람은 바깥으로 볼일을 보러 다닐 수 없고, 일터에 나갈 수 없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서도 느끼는데, 아기한테 책을 읽어 준다는 핑계로 다문 열 쪽이나 스무 쪽을 읽기는 하지만, 책을 읽을 짬을 거의 내지 못합니다. 이 심부름 저 심부름 이 주무르기 저 주무르기 이 빨래 저 빨래 ……. 하루가 참 길면서 금세 지나갑니다. 금세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밤입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있는 하루, 옆지기와 함께 지내는 하루는 마음과 몸이 홀가분합니다. 글 한 줄 못 쓰고 책 한 권 못 펼칠 뿐더러 동무들 못 만나고 술자리에 가지 못하는 가운데 돈벌이 일을 한 가지도 할 수 없습니다만, 세 식구가 하루 내내 가까이 붙어서 이야기하고 어르고 안고 씻기는 보람은 무엇으로도 따질 수 없습니다.

 

 뭐, 저는 다른 이들처럼 여느 일터에 나가지 않는 몸이고 집에서 일하는 몸이니, 하루 스물네 시간 붙어 지내기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꼬박꼬박 일터에 나가야 할 뿐더러, 일터에서 접대라는 일도 해야 하니, 저처럼 아이와 옆지기를 돌볼 수 없다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일터에 나가는 몸이었다고 해도, 아이와 옆지기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한 달, 또는 두 달, 아니면 석 달이나 반 해쯤 말미를 얻어서 집에서만 눌러지냈으리라 봅니다. 일터에서 긴 말미를 받아 주지 않으면 아예 일터를 그만두고 아이와 옆지기하고 함께 지내려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몸이 느낍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 하는 수 없이 시아버지를 찾아가 아이 장래 문제를 의논했고, 나의 입적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때 시아버지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남편이란 자도 없고, 다시 온다는 희망도 없는데 네가 입적을 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것은 정말 내가 할 말이었다. 그때까지 무관심 속에 버려 두었던 부모로서의 의무를 정녕 자책조차 하지 않는단 말인가? 결국 1960년 1월 22일자로 소은이의 출생신고를 하면서 나도 박씨 집 호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21일생이 12년 만에 비로소 뿌리를 찾고 엄연한 박종근의 딸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  (225쪽)

 

 

 (3) 세상

 

 우리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주 고달픕니다. 아이가 의무교육으로 다녀야 할 학교는 아이 마음과 넋을 아름답게 가꾸는 데에는 젬병입니다. 갖가지 지식쪼가리와 영어 나부랭이를 머리속에 채우는 데에만 골똘합니다. 그나마 초등학교 때에는 ‘교과서 아닌 책이라도 읽힐 수 있는 때’이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녀야 하면 ‘교과서 아닌 책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때’가 됩니다. 아이들한테 책읽을 틈을 안 주니까요. 가만히 살피면, 책읽을 틈뿐 아니라 놀 틈도 안 줍니다. 동무들끼리 어울리거나 사귈 틈도 안 줍니다. 숨을 돌리면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틈을 안 줍니다.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면서 들판에 자라나는 꽃을 즐길 틈을 안 줍니다. 파란 바다를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시원함을 느낄 틈을 안 줍니다. 두 다리로 이 나라 구석구석 걸어다닐 만한 길이 없습니다.

 

.. 경찰서에는 입구에서부터, 마룻바닥, 본당, 시멘트 바닥 할 것 없이 무수한 남녀노소들이 꿇어앉히거나 쓰러져 있고 넘어지거나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신나게 곤봉을 휘두르면서 무어라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정말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사람 몸에 부딪치는 곤봉 소리, 살을 에는 듯한 비명 소리,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두들겨팰 수 있단 말인가? 어디에서 배운 솜씨인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의기양양한 금수 같은 인간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을 어찌 사람이라고 부를 것인가? 머리고 가슴이고 얼굴이고 아랑곳없이 발로 차고 사정없이 매질하는, 그러다 죽으면 그만 끌어내 던져 버리는 그런 권리를 대체 누가 주었단 말인가? ..  (51쪽)

 

 다짐은 하고 있으나, 많이 두렵습니다. 아이가 학교를 좋아한다면 보내겠으나, 아이가 학교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학교에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인 우리 두 사람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서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은가를 놓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차근차근 헤아려 보고 있습니다. 학교에 다니게 되더라도 집에서 우리가 할 몫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로 대안학교에 넣을 마음은 없고,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학교처럼 ‘이름으로도 농사짓는 학교이고 속내로도 농사짓는 참 학교’쯤 되는 곳에는 넣을 마음이 있습니다.

 

 학교란 지식을 쌓는 곳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커 나가는 길을 익히는 곳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학교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아 나가면서 어울리는 길을 찾고 깨닫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학교란 혼자서 바라보는 틀과 눈을 다스리면서 나 아닌 사람 눈길을 느끼고 나 아닌 사람 얼을 곱씹어 보는 배움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시험점수로 대접받는 곳입니다. 초중고등학교 모두 그렇고, 대학교마저도 시험점수로 들어갈 뿐입니다. 시험점수로 들어간다고 하여도, 대학교 강의 얼거리가 사람 됨됨이와 매무새를 추슬러 주도록 짜여 있다면 우리 두 사람 허리가 휘어도 넣을 뜻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학 교육은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지요? 한 해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바칠 만한 값이 있는가요? 비싼 돈도 비싼 돈이지만, 교수와 또래 동무들은 ‘배우고 가르치는 뜻’을 얼마나 속깊이 깨우치고 있습니까?

 

..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서에는 내 이름을 맨 윗자리에 썼다. 간첩단의 우두머리로서 수많은 세포를 조직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각 직장에서 쟁의를 일삼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이렇게 꾸며 씁니까?” “하는 수 없지요. 이렇게 해야 우리도 한 건 올리게 되니까요.” 이런 식의 조작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고통 받고 죽어 갔을까? 이렇게 되고 보면 나 또한 살아날 구멍이 없지 않는가? ..  (195쪽)

 

 아이 앞날을 헤아린다면, 아이가 보람을 느끼면서 즐겁게 할 만한 일거리가 무엇일까 싶어 속이 탑니다. 오로지 지식놀음을 해서 지식장사를 하는 일거리를 찾는 보람이란 무엇일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새로움을 빚어내지 않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장사꾼 틀을 깨기 어렵다면 구태여 도시에서 살아갈 까닭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돈이 아니라, 일하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고, 아이가 돈을 버는 일자리가 세계평화와 사회복지와 지구환경 모두한테 이바지할 만한가 모르겠습니다.

 

 노동자가 되더라도 자동차공장이나 화학공장에서 일한다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지식인이 되더라도 책상물림이 되고 만다면 그지없이 불쌍합니다. 월급쟁이 교사로 일한다면 꼴도 보기 싫어질 테지요. 쇠밥그릇 공무원이 되어 탱자탱자 먹고산다고 하면 한숨만 푹푹 나옵니다. 《내 마음속의 자전거》에 나오는 씩씩한 딸내미처럼 ‘자전거가게 기능공’을 꿈꿀 수 있다면,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이오덕, 임종국, 미승우 님들처럼 꼿꼿한 선비이자 학자로 제 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갑습니다.

 

.. 1984년 8월 1일, (손주) 슬기와 보람이를 데리고 나선 8년 만의 귀국길이었다. 별천지에 온 듯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변하고 발전했다. 경주, 대전, 서울로 다니면서 두 놈을 마음껏 즐기게 했다. ‘여기가 너의 조국이다. 너희들의 고향은 이렇게 아름답단다…….’ 그때도 대구에 닿은 지 일 주일이 채 되지 못했을 때, 정보부에서 만나자고 했다. “우리 과장님이 참으로 서운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이 여사님께서 왜 딸과 사위를 올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해 서독에서 반정부운동에 가담하게 하고 있느냐고요.” “언니야, 어쩌노? 그 지긋지긋한 일이 또 닥치는구나.” 동생은 벌벌 떨었다. 그때 그 과장은 나에게 누님, 누님 하던 의성 원당동 출신의 김창학 씨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독이라면 적색분자가 우글거리는, 동독을 끼고 북과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  (253쪽)

 

 아이가 ‘끄으응’ 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척입니다. 밤하늘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아파트 마을 깊은 밤. 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고, 옆지기도 식식 콧소리를 내면서 고단히 잠들어 있습니다. 젖먹고 크느라 바쁜 아이입니다. 젖먹이며 키우느라 힘겨운 옆지기입니다. 아이 소리로 보아하니 오줌이구나 싶어 기저귀에 손을 대 보니 촉촉합니다. 아직 따끈하니 오줌 눈 지 얼마 안 된 듯 싶습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잊지 않고 오줌이나 똥을 누어 줍니다. 아이는 자느라 바빠서 지 아버지가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눈을 비비고 있을 줄 알려나요. 어쩌면, 먼 뒷날,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쯤 지나고 나면 알는지 모릅니다. 또, 몰라도 괜찮습니다. 굳이 아이가 지 아버지 일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올곧게 살아갔다고 느껴진다면, 그때에 이르러서 지 아버지 걸음걸이를 곱씹어 주면 됩니다.

 

..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을 부르짖기 시작하고부터 교육계에도 새마을 바람이 휘몰아쳤다. 새마을 교육이라는 기치 아래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소위 교육을 발전시키고 교사들을 위해 연구하고 일해야 할 장학사들이, 날이면 날마다 밤나무 심는 묘포장이 어느 정도인가 확인하고 그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통계를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예고도 없이 불시에 아이들 점심시간에 습격해 혼분식 상황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렇게 웃지 못할 거짓 통계, 조작된 보고를 꾸미기에 급급했으니 날이 갈수록 견디기가 힘겨웠다 ..  (239쪽)

 

 오늘은 밤에도 더위를 느낀다는 옆지기는 이불도 안 덮고 잡니다. 이제 깊은밤으로 접어드는 만큼 얇은 이불 하나 살며시 펼쳐서 배 언저리까지 덮습니다. 아이도 옆지기도 이불을 걷어차지는 않습니다. 옆지기 동생은 이제 막 일터에서 돌아와서 씻습니다. 일산에서 용산까지 날마다 오가며 일하는데, 이렇게 느즈막하게 돌아오고 나서도 이튿날 새벽바람으로 또다시 일터에 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이 깊은밤에 잠들지 못하고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내일이 마감인 잡지사 청탁 글을 마무리지어야 하고, 제 나름대로 책 하나 엮어내려고 쓰는 글도 갈무리해야 합니다. 읽어 주는 이는 거의 없지만, 우리 말을 알맞춤하게 쓰도록 도와주는 글도 쓰고, 헌책방 문화를 돌아보는 글도 써야 합니다. 제 가슴에 깊이 파고든 책 이야기도 쓰고, 참 형편없었다고 느낀 책 이야기도 써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아이를 낳는 동안 겪은 이야기, 아이를 기르면서 느끼는 이야기, 아이 앞날을 내다보는 이야기도 써야 합니다. 이번까지 열두 번째가 되는 사진잔치 이야기도 글로 쓰고, 9월 마지막 주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벌이는 ‘보수동 책방골목 잔치’에 사진을 보내면서 붙이는 글도 써야 하고요.

 

 이 글 저 글 쓰는 글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 저 글 부지런히 쓰는 동안 제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거의 없습니다. 어제 낮, ㅍ이라고 하는 영화잡지사에서 제 사진을 몇 장 쓰고 싶다면서 허락해 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사진을 쓴다니 마땅히 사진값을 치러야 할 텐데, 육 분 가까이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사진값 치르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거저 먹으려는 셈인가? 지들이 만드는 잡지가 무료잡지도 아니고, 잡지사 직원이 일삯 안 받고 일하지 않을 테며, 잡지에 글 쓰는 사람들한테 글삯도 안 주는 일은 없을 텐데, 사진 몇 장은 대가 하나 안 치르고 가져가서 써도 되는가?’ 스스로 ‘진보’ 쪽에 있다고 밝히는 분들이 오히려 ‘다른 이가 땀흘려 일구어 낸 보람’을 대가 한 푼 치르지 않고 가져가려고 하는 일이 잦아서 몹시 슬픕니다.

 

 

 (4) 사람

 

.. 해방 직후 내가 의성 중부국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그해부터 여름이면 삼베로 불라우스를 해 입었고, 겨울엔 여덟 세나 되는 무명에 물감을 들여서 치마저고리를 해 입었다. 어머니는 내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예쁜 옷감으로 치장하지 않는다고 성화였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드디어 딸을 자랑스러운 여교사로 만든 어머니로서의 마땅한 욕심이었으리라. 여름은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내 옷차림은 곧 아이들에게는 대환영이었고, 선생들에게도 대단한 인기였다. 아이들은 “야! 이것 봐라! 우리 선생님도 삼베옷 입었다!” 하고 환호성을 올리며 베옷밖에 입을 수 없었던 그들의 찌든 가난을 더는 탓하지 않게 되었고, “이런 옷을 입어도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면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계기로 삼았다 ..  (301쪽)

 

 어제 ㅇ이라는 언론사 취재를 받았습니다. 촬영기를 들고 와서 제 ‘인천 골목길 사진잔치’를 찍어 갔습니다. 사진을 왜 찍느냐 묻고, 골목길이란 낡은 대상이 아니냐 묻고, 또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사진은,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이니 찍는다고, 먼 데로 찾아가서 찍는 사진도 나쁘지 않을 터이나, 무엇보다도 자기가 사는 동네를 제대로 알고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골목길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제법 많기는 한데 모두들 그럴싸한 그림만 찍으려 할 뿐, 정작 골목길에 깃든 사람들 삶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겉치레 사진에다가 추억이니 풍경이니 사라져 가는 곳이니 하는 대상으로만 본다고, 골목에 사는 사람 스스로도 골목을 제대로 말하고, 골목 바깥에 사는 사람도 골목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헌책방이나 골목길은 ‘오래오래 시간을 먹은’ 곳이지, 헐어 가는 ‘낡은’ 곳이 아니며, 지금부터 앞으로도 죽 읽힐 만한 값어치가 있으니 헌책방이나 도서관 책들에 뜻이 있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골목집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머물며 살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아파트는 때 되면 재개발을 안 하면 위험한 곳이라서, 두 집터에 깃든 문화와 느낌이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ㅇ뉴스 사람들은 이날 저녁 아홉 시에 곧바로 방송을 내보냅니다. 저는 이들한테 틀림없이 ‘골목길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하고 몇 차례 힘주어 이야기했으나, 방송에 나온 이야기는 ‘사라져 가는 추억’인 골목길을 찍은 사진잔치라고 소개해 놓습니다.

 

.. 윤이를 희생 도구로 삼아 전 학급의 수업 분위기를 구제해 보고자 했던 나의 안일함, 어른이라는 무기로 아이들을 휘잡아 보고자 했던, 참으로 비교육적이고 잘못된 성취감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어른의 권위로 어린이를 대한다는 것, 교사의 권위에 학생들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진정한 교육자의 길이 아니며, 권위 의식에 젖어 있는 한은 선생과 아동 사이에 인간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는 결국 자라나는 아이들을 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  (314쪽)

 

 사람을 믿으면서 살고 싶은데, 고운 믿음을 선보이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은데, 아름다운 마음씨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사라집니다.

 

 너무도 좋은 핑계인 ‘먹고살기 힘들다’ 한 마디로 자기 삶을 아주 망가뜨린다고 느낍니다. 먹고살기 힘들면 대충 막 살아도 되나요. 먹고살기 힘들면 전쟁무기 만드는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해도 되나요. 먹고살기 힘들면 이 나라 삶터와 자연을 무너뜨리는 개발을 끊임없이 일으켜도 되나요. 먹고살기 힘들면 기름값이 하늘 높이 치솟아도 자가용 끌고 다니기를 안 멈추어도 되나요.

 

.. 변화된 현실을 무시하고 막연한 통념에 사로잡힌 반쪽의 진실을 가르치는 교과서, 그리고 그 내용을 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과 위선에 환멸을 느꼈다. 올바른 사회생활에 관한 교육이라면 분명 이렇게 변모한 사회에서 그에 따라 역시 변화한 여성상을 새로이 정립하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전해야 함이 마땅한데, 살림 잘하는 여성만을 고마운 어머니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것은 일종의 눈가림이거나 안일하고 보수적인 태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  (355쪽)

 

 제가 느끼기로는, 오늘날 이 땅 사람들은 조금도 ‘먹고살기 힘들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기 싫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기 싫을’ 뿐이구나 싶습니다. ‘콩 한 알 반으로 가르는 넉넉한 마음은 내다 버리고 싶을’ 뿐이지 싶습니다. 가슴을 툭 터놓고 어깨동무하기는 도무지 내키지 않구나 싶어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돈굴리기 하는 아파트만 짓잖아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더 빠르고 큰 차가 씽씽 내달리기만 하는 찻길만 닦잖아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정책이 아닌, ‘경제 살리기’라는 허울을 내걸면서 우리 모두가 ‘돈버는 기계’가 되도록 길들이고만 있잖아요.

 

 따뜻한 마음 없이는 통일운동이란 없습니다. 너른 넋 없이는 진보운동이란 없습니다. 애틋한 사랑 없이는 사회운동이란 없습니다. 즐거운 보람을 느끼는 가슴 없이는 환경운동이란 없습니다. 고즈넉한 믿음 없이는 교육운동이란 없습니다. 부드러우면서 씩씩한 매무새를 가꾸지 않고서는 언론운동이란 없습니다. 혁명은 총을 들고서 이룰 수 없습니다. 혁명은 펜을 들고서도 이룰 수 없습니다. 혁명은 맨몸뚱어리로 이룹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맨몸을 온통 내맡길 때 비로소 이룹니다.

 

 

 (5) 《이 여자, 이숙의》라는 두툼한 책

 

 남녘에서는 ‘빨갱이’요, 북녘에서는 ‘혁명운동가’ 대접을 받는 박종근 님 옆지기로 살아낸 이숙의 님이 피와 눈물로 적바림한 책 《이 여자, 이숙의》를 읽습니다. 《이 여자, 이숙의》를 쓴 이숙의 님 글을 덤덤하게 읽다가 얼결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고, 옆지기한테 몇 대목 읽어 주면서 울먹울먹하여 그예 다 읽지 못하고 책을 덮습니다.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이숙의 님 딸아이 박소은 씨가 적은 글과 글쟁이 김형수 님이 붙인 글도 아울러서, ‘이 책은 주제가 이렇습니다’ 하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서전이지만 자서전이 아니고, 역사이지만 역사가 아닙니다.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니고, 믿음이지만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옳다고 느껴진 길을 걸으려고 했던 사람들 몸부림입니다. 그예 아름답다고 느껴진 길을 놓지 않던 사람들 몸짓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훌륭하게 갈고닦고프던 꿈을 고이 가꾸면서 당신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하나한테까지도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하려고 했던 사람들 움직임입니다.

 

 길지만 길다고 느껴지지 않고, 눈물겹지만 눈물로만 읽을 수 없으며, 아프지만 아픔을 곱새기면서 더욱 튼튼한 나무로 자라도록 다그치는 이야기 매무새입니다.

 

 지아비한테 옆지기로서, 딸한테 어머니로서, 어머니한테 딸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집에서 며느리로서, 무엇보다도 이 땅을 당차게 디디고 일어서고 싶었던 여성으로서, 이숙의 님은 당신 삶자락을 한 올 두 올 풀어냈습니다. 고향나라이지만 조금도 고향냄새를 맡을 수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당신 손주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연필을 꾹꾹 눌러 쓰면서 이야기 한자락 세 올 네 올 엮어냈습니다.

 

 온삶을 무거운 짐을 이고 진 채 버티고 버티다가, 당신을 버티게 한 옆지기 마지막 소식을 들은 그날 저녁 병원에서 맑은 웃음 한 번 딸아이한테 보여주고 새벽녘 아주 조용하게 숨을 거둔 이숙의 님. 이 땅에서 어머니(여성) 되는 사람들 삶이란 무엇인가를 어느 누구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으니, 당신 두 손으로 이렇게 책 하나 여미어 냈군요. 이 땅에서 어머니(여성) 되는 사람들 발자취란 어떠했는가를 어느 누구도 느끼려고 하지 않으니, 당신 두 다리로 이렇게 걸어왔다고 통째로 내보이면서 살포시 껴안아 주는군요. 우리 어머니도 당신 삶을 풀어놓을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먼 뒷날, 우리 옆지기도 자기 삶을 펼쳐놓을 겨를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이 여자, 이숙의 -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

이숙의 지음, 삼인(2007)


태그:#빨치산, #빨갱이, #이숙의, #박종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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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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