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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샤~. 넌 어째 매번 그리 철이 없냐?"

 

그렇다. 백번 천번 옳은 말이다. 어제 일은 다시 생각해 보면 철없던 녀석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어떤 구차한 변명으로도 단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순간의 삐딱함.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오염된 나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녀석이 어찌 큰 뜻을 품고 여행 한답시고 거들먹거린단 말인가.

 

그래, 이 여행 다 집어치우고 어디 경치 좋고 인심 좋은 남미의 한 마을에 들어가 유유자적하며 살까 잠시 생각도 해보지만 역시 방랑세포가 온 몸에 전율하듯 흐르는 노마드(Nomad)의 피는 어쩔 수 없다.

 

  원래 못난 놈이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래도 좀 더 인간답게 변화되는 것. 이런 여행할 기회라도 있으니 제 먼지를 발견하지 그러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을까? 그래서 병과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도 누군가가 얼굴에 화끈한 불을 쏘듯 직언해 준다는 것, 누군가가 불쌍한 중생의 개과천선을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 아직 세상이 평화와 정의를 갈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증일 것이다. 나는 그래서 정형외과에서 식겁할 정도로 뼈저리게 반성하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 "짜샤~. 넌 어째 매번 그리 철이 없냐?"

 

한 번 잠을 자면 그대로 송장이 되어  

 

일찍 일어나리라는 지난 밤 의지와는 달리 침대에 벌러덩 나자빠져있던 난 7시가 넘어서야 겨우 감은 눈을 힘겹게 뜰 수 있었다. 간단히 세면을 마치고는 호텔 로비에서 짐정리를 마치고 차분히 준호를 기다렸다.

 

  며칠 간 준호는 페이스를 잘 맞춰 따라와 주었다. 과체 중 핸디캡을 안고 처음 도전하는 자전거 여행에 그만한 의지와 체력이면 만족할만하다 싶었다. 하지만 그도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 힘겨움을 토로했다.

 

  우선 잠이 많았다. 이것은 곧 출발준비가 늦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잠을 자면 그대로 송장이 되어 버린다. 가끔 강시처럼 눈을 뜨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몇 초 후 그대로 눈만 감아 버린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 준호는 세상만사 다 뒷전인 듯 '다다다다' 드릴로 책상 뚫는 효과음까지 첨부하며 침대 위의 꿀맛을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뿐이 아니었다. 좀 더 기민한 대처가 요구되는 여행에서 두 번째 과속재촉 턱을 넘어야 했다.

 

  호텔 3층에서 자전거와 짐들을 옮기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 번 작업을 하고 나면 육덕진 살집에서 육수가 좔좔좔 흘러흘러 꼬리뼈 부분까지 하강했다 살포시 팬티면에 젖어들어 떨떠름한 촉촉함을 전해 준다. 그런데 짐 정리를 다 마치고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준호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한참 만에 짐들을 가지고 내려와서는 그제야 천년 묵은 거북이 눈 껌뻑거리듯 출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준호와 내가 동시에 인지한 두 번째 어려움이었다. 서두름이 없는 것. 긴장이 없는 것. 여유와 게으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걸쳐진 곰님(준호는 스스로를 곰이라 한다)의 배포이신 것이다. 그러면서 해맑게 웃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얼굴이란.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상쾌하게 피부를 적시고 '쏴~' 달팽이관을 타고 대뇌피질까지 전달되는 파도 소리에 기분 째지고 청록빛 바다 내음이 후각기관까지 간질인다. 이렇게 펼쳐지는 카리브 해의 환상적인 풍경에 어찌 소년의 마음으로 출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최고의 코스는 요상하게도 바다 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이쯤되면 교차로가 나와야 할 타이밍인데 말이다.

 

눈치 하나는 무대책인 나조차도 감이 좋질 않았다. 사태를 파악하려는 듯 페달을 밟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기 시작하고, 눈은 사방팔방 어지럽게 돌아가고, 급기야는 급히 뻣뻣한 허리를 돌려 위치를 확인했다. 자신있게 앞서 나간 나였다. 그리고 준호는 아무 의심없이 천진하게 따라온 죄 밖에 없었다. 잠시 침을 고루 묻혀 입술을 위 아래로 핥고서는 후방에서 따라오는 준호에게 살짝 민망한 듯 바람 태워 소식을 보냈다.

"준호, 이 길이 아닌가벼."

  "……"

 

"이 길이 아닌가벼"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3km의 길을 되돌아 나와 아침은 길 가에서 파는 2페소짜리 빵으로 대충 때웠다. 우리는 뙤약볕 아래에서 계속 달려야 했기에 체력보충은 필수였다. 하지만 나는 맛없는 빵이라도 꾸역꾸역 주워 삼키는데 준호는 빵은 싫다하고 어찌 주스만을 계속 달라한다.

 

그래도 한 컵에 딸랑 1페소(24잔을 마셔야 1CUC라는…하악하악)니 이곳이 지상낙원일세! 깊은 산 속 옹달샘 찾아 마시러 온 목마른 토끼눈마냥 뭔가 애절한 듯한 맥없는 준호를 보고 있자니 주스라도 원 없이 먹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처음과 달리 준호도 이젠 제법 속도를 따라잡는다. 하지만 그 흐름을 이어가지 못하고 중간에 준호의 가방이 짐받이에서 몇 번이나 흘러내렸다. 한두 번도 아니고 시간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짐 좀 흘리지 말란 말야! 버럭!'이라고 생각만 하고 행여 맘 상할까 깊게 내뱉는 한숨으로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다. 생각해 보면 특별히 잘못한 사람도 없고, 화 낼 사람도 없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감정 조절을 못하고 '버럭질'해서 남는 건 후회뿐이다. 

 

  오후에 카르데나스와 콜론의 중간쯤 위치한 작은 마을에 들러 주스만 먹다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30분간 잠이 들었다. 고단했다. 준호는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건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이다. 식욕이 없어보였지만 의욕은 더욱 없어보였다. 걱정이 되어 계속 권해봤지만 식욕 스위치는 이미 꺼져 있었다. 아예 의욕 두꺼비집까지 전원을 차단시켜 버렸다.

 

  말도 안 됐다. 바로 출발 전까지 냉장고의 먹을 거라곤 다 찾아서 먹었던 준호였다. 하루아침에 이토록 변하다니. 뭔가 불만 같은 게 있다면 과식투쟁이라도 하던가. 그런데 또 그런 연유도 아닌 듯 했다. 지쳐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안락했던 파나마에서의 삶을 잠시나마 포기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무슨 위로라도 해 줄까 하다 원래 고민이 많으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심리를 잘 알기에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버스정류장에서 밤 새는 건 어떨까요?"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하는 건? 바로 숙소찾기! 갑자기 준호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형, 우리 들판에다 텐트치고 잘까요?"

  "비 오면…."

  "그럼 나무 아래는요?"

  "거긴 명당자리가 아니라서…."

 

  우리는 도로를 달리면서 텐트를 칠만한 마땅한 자리를 탐색했다. 콜론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도시를 빠져나와 숙소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은 일이다. 자전거 여행자가 들으면 가장 힘 빠지고 분기탱천 하는 말. "되돌아갈까요?"

 

  슬슬 거친 땅에 적응력을 높여 가던 준호는 오버로 의심되는 호기를 내뿜었다.

"형!"

  "왜요?"

  "여기는 어때요?"

 

  뒤따라 오던 준호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도 마땅한 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요?"

  "여기요 여기. 버·스·정·류·장! 여기서 밤을 새는 건 어떨까요?"

 

  What? 이게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나? 모기는 둘째치고 노출된 공간에서 밤을 지샌다니. 그는 거칠 게 없었다. 어차피 피곤해서 금방 쓰러질 거 그래도 비라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이면 OK이지 싶었나 보다.

준호의 말을 사뿐히 흘려들어주시고(나쁜 형-_-+) 나는 아주 점잖은 미소로 말했다.

 

  "저긴 어떨까요?"

  "네? 저기요? 집인가요?"

 

사위가 제법 어두워졌을 무렵 조금 멀리 떨어진 내가 지적한 대상을 멀뚱히 쳐다보던 준호는 여전히 사물이 파악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뭘 그리 유심히 보시나) 폐간데. 비나 바람을 피할 정도는 되는 것 같고, 그래도 버스 정류장보단 낫지 않겠어요?"

 

  이 말을 들은 준호의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폐가요? 와우, 알았어요! No problem, Sounds good! 오늘은 그럼 저기서 자는 거죠?"

'죽어도 안 된다'고 생떼를 쓸 것 같은 귀한 집 외동아들의 '급'반색하는 표정이란. 건물의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도로에서 떨어진 외딴 그 집이 오늘 우리가 머물 숙소로 낙점됐다. 준호가 이렇게 활력을 찾는 건 오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다시 궁금해진다. 대체 그는 왜 종일 시무룩했던 걸까.

 

"차라리 우리 집 뒤뜰에서 자는 건 어때?"

 

  지친 준호는 잠시 버스 정류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는 다시 도로로 나왔다. 마지막 'Just one 10 minutes' 타임이다. 남자를 유혹하기에도 충분하다는 그 시간. 그렇다면 나에게도 천방지축 열나게 뛰어다녀 숙소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명당자리가 없나 주변을 최종점검을 하는 것이다.

 

  마감효과인지 우연인지 정겹게 담소를 나누는 가정이 있어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주변에 텐트를 칠만한 공간이 있나 물어보았다.

  "글쎄, 없지 아마?"

  "없죠. 여기 주변엔 없을 거예요."

 

  그들은 도리질을 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상냥함을 잃지 않았다. 포악한 건 주인 빽 믿고 낯선 방문자를 향해 정열을 다해 짖어대던 개 뿐. 알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사이에 체념이 들어선 공간을 비집고 아주머니가 제안을 해 왔다. 떼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지 말고 그럴 바엔 차라리 우리 집 뒤뜰에서 자는 건 어때요?"

  "그런데 현지인 집에서 자는 건 불법 아닌가요? 걸리면 벌금도 꽤 세던데."

  "하하, 그건 집에 들여서 재웠을 때 얘기겠죠. 집 안이 아닌 건물 뒤에다 텐트를 치면 별 문제는 안 될 것 같아요. 설마 그거까지 간섭하려구요?"

 

  다행히 함께 있던 그녀의 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이웃집 할아버지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감사하죠."

  "청년, 걱정 말라고! 우리는 자네를 환영한다니까! 이 집에서 마음 놓고 쉬어도 돼. 내가 단언하건대 여기 아주 좋은 사람들이거든. 잠 잘 걱정은 붙들어 매시고. 근데 식사는 했는감? 그리고 필요한 거 뭐 또 있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응? 자네가 여기 와서 난 무척 기쁘다네. 편히 쉬라고."

  '걸쭉하게 한 잔 들이키신 이웃집 할아버지 '쌩유'.'

 

  "저기 근데 제가 일행이 한 명 더 있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어서 가서 데리고 와요!"

  "감사합니닷! 야호!"

 

어두컴컴한 버스 정류장에는 어느 샌가 현지인 학생들과 스페인어로 잡담을 나누는 준호가 보였다. 난 크리스마스 날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챙겨 가는 산타클로스의 마음이 되어 준호를 힘껏 불렀다. 쩌렁쩌렁한 소리는 어둠을 갈랐다.

 

  "준호! 즉각 이동!"

  "무슨 일이에요? 저기(폐가)는요?"

  "헤헤, 최고의 명당자리 찾았음!"

 

  영문도 모른 채 쫓아 나온 준호는 갑작스런 숙소 이동에 마음의 정리가 안 된 듯 보였다. 그에게 일련의 상황들을 재생해주자 그제야 콜라를 들이킨 후의 북극곰처럼 만족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준호는 그들에게 일일이 '그라시아스(Gracias)'를 연발해 가며 고개 숙여 악수를 청했다. 폐가에서 자려던 호기가 따뜻한 마음에 확 녹아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 날 밤 현직 영어 교사인 와냐(Wanya) 아주머니 집에서 시원하게 샤워도 하고 융숭한 저녁까지 대접받으며 아주 멋진 숙소에서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배려 덕에 숙소가 폐가에서 순식간에 안락한 가정집 뒤뜰로 바뀐 것이다.

 

식사와 샤워는 배려의 대한 옵션일 뿐. 그렇게 기분 좋게 피로를 푼 우리였지만 단잠은 새벽 5시를 넘길 수 없었다. 우리는 본분에 꽤나 충실하던 홰치는 닭으로 인해 졸린 눈을 비비고 새벽의 찬 기운을 맞아야만 했다.

 

  오늘은 맘먹고 죽도록 달리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일까? 글쎄 해봐야 알겠지만 준호의 표정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이마에는 '나는 이제 죽었소'라고 큼지막한 판본체로 쓰여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문종성,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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