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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개인택시를 직접 운전해도 홍수같이 쏟아지는 자동차와 고유가, 고물가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60년대만 해도 알뜰한 아내와 사는 트럭 기사들은 셋 정도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저축도 해서 차를 사들여 운수업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차가 귀했던 당시에는 트럭 한 대만 있어도 동네에서 부러움을 샀는데, 큰 누님네는 화물회사 두 군데에 각각 4톤짜리 트럭을 가지고 있었으니 괜찮은 살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주가 운전기사를 두고 운영해도 월급을 주면서 다섯 식구가 중산층 생활을 유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큰 누님 권유로 시작한 '알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트럭 조수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서울 장안의 기생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인력거를 보냈다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자동차 기사였던 큰 매형이 80년대 초까지 운수업을 했는데요. 그 덕에 원도 한도 없이 트럭을 타봤고 용돈도 벌어 쓸 수 있었습니다.

1964년 4월의 어느 일요일로 기억합니다. 건너 동네에 사는 큰 누님이 허겁지겁 달려와 저를 부르더니 "조수가 갑자기 나오지 않아서 그런다. 용돈은 줄 테니까, 조수 대신 네가 따라가야겠다. 빨리 옷 챙겨 입고 회사로 가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씨구나!' 하고 다녀왔지요.

여행이라고 해야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부모를 따라 외가가 있는 '계화도'에 다녀온 것과 6학년 때 수학여행이 전부였으니 조수든 심부름꾼이든 '좋아라!' 할 수밖에요. 조수이긴 하지만 여행도 하고 용돈까지 받으니 그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다녀오면 20-30원씩 받으며 달콤 쌉싸래한 추억을 만들었던 아르바이트는 그날을 시작으로 3년 가까이했는데요. 처음에는 얼마나 좋았던지 '언제 먹던 호박떡이냐!'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횟수가 늘어날수록 엉덩이도 아프고 피곤이 몰려오는 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타고 다닌 트럭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트럭(이스스)이었고, 국도 대부분이 2차선에 자갈길이다 보니 엔진 고장이 잦았고 타이어 펑크도 잘 났습니다. 왜놈들이 쓰던 낡은 트럭이라서 서울이든 전주든 엔진을 손보거나 타이어를 갈지 않고 논스톱으로 다녀오는 날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자갈이 깔라지 않은 시골길에서 대형트럭과 마주치면 소독약을 뿌리는 방역차처럼 뽀얀 흙먼지가 안개처럼 일었는데요. 요즘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엔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름방학 때가 긴장과 졸음으로 고생을 더 했고 엉덩이도 더 아팠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가 전국에 거미줄처럼 엮여 있어 6시간이면 국내 어디든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저녁에 군산에서 출발하면 중간 휴게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음날 새벽에야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도로 사정이 열악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경찰들의 횡포는 기사들을 더욱 짜증 나게 했습니다.  

기사 휴게소의 진풍경

서울에 가려고 군산에서 출발해서 천안쯤 가면 전국 각지에서 상경하는 기사와 조수들이 밤참을 먹고 쉬는 휴게소가 있었는데, 잠자는 방이 작은 운동장만 했습니다. 처음 갔을 때는 술 냄새와 코 고는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반찬은 입에 맞아 좋았습니다. 특히 백반에 딸려 나오던 뼈다귀 해장국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시래기와 선지가 들어가서인지 개운하고 고소했는데요. 낯선 지방을 여행할 때 기사식당을 즐겨 찾는 습관도 그때부터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모시고 다니던 기사 아저씨는, '기사들이 여러 간디서 모이다 봉게로 별별 괴팍한 일들이 다 벌어진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짜 듀폰 라이터와 선글라스 장수들이 기사들을 유혹하고, 괜히 시비를 걸어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한일협정과 국회의원 선거 등 시국 문제를 놓고 고성을 지르며 토론하는 기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음주운전을 잘하는 것도 큰 자랑거리가 되어서 그런지 잔뜩 취한 얼굴로 흥얼거리며 술을 마시는 기사들도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밤새도록 화투를 치는 기사들도 있었고요. 거래처에 전해줄 수표를 노름으로 날려버리는 바람에 회사 간부가 와서 기사를 모셔가는 진풍경도 자주 벌어진다고 하더군요.

휴게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서울에 도착하면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는데요. 그렇게도 을씨년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를 할 만한 곳도, 반겨줄 친척이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 싸늘한 새벽공기가 사춘기 소년의 피부에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겠지요.

경찰에게 돈 건네는 게 일이었던 '트럭 조수' 

트럭 조수가 하는 일은 기사 아저씨의 담배 심부름을 하거나, 엔진이 열 받으면 물을 떠 오고, 타이어를 갈아 끼울 때 옆에서 거들어주는 게 전부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럭이 오는 것을 용케 알고 나온 파출소와 지서 경찰들에게 현금을 나눠주는 일이 주요 업무더라고요.  

중학생 때 부정한 돈을 주는 알바를 했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지요. 월급이 적어 가난하게 사는 경찰들의 생활비를 지원했다거나, 근무하느라 고생한다며 수고비를 주었다면 보람이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철이 없던 당시에는 돈을 나눠주는 재미가 괜찮더라고요.

제가 알바를 했던 트럭은 호황기를 맞고 있던 한국합판 원목을 전주에 있는 제재소로 나르는 일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돌아올 때는 '덕진천'에서 모래를 싣고 와서 건재상에 팔면 기름 값을 빼고 남았습니다. 모래 채취 허가를 받은 곳이라서 인부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건비만 주면 얼마든지 싣고 올 수 있었거든요.   

추석이 가까워지면 완주군 봉동으로 감을 가지러 가거나, 고물을 싣고 서울 영등포 주물공장에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기억을 되살려 옮겨봅니다.

'오늘은 서울에 다녀와야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슴이 벅차오르더라고요. 수학여행 때 건성으로 봤던 서울 시내와 트럭을 타고 오가며 산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항상 저녁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돌아오기 때문에 몸만 더 피곤했습니다.      

1천 원짜리 지폐가 없던 시절, 큰 누님이 5백 원짜리 두 장을 가지고 와서 모두 10원짜리로 바꿔오라고 하면 그날은 '서울을 뛰는 날'이었습니다. 당일 코스를 뛸 때는 잔돈을 바꿔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지 않거든요. 

1천 원을 10원짜리 지폐로 바꾸면 모두 1백 장이 되었는데요. 10원짜리 세 장과 다섯 장으로 나눠 연애편지 접듯 정성을 들여 20여 개를 접습니다. 너무도 유치찬란해서 글을 쓰면서도 쓴웃음이 나오는데요. 당시로는 연료 이상으로 중요했습니다. 돈을 건네주지 않으면 차가 움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딱지까지 끊어야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뇌물을 바쳤다고 해야 할지, 통행세를 냈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스스로 줬다고 해야 할지, 착취를 당했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헷갈리네요. 

10원짜리를 곱게 접으면 30원짜리는 얇고 50원짜리는 조금 두터웠는데, 까다로운 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는 50원을 건네주고, 30원짜리는 그보다 순진한(?) 시골 지서에 줬습니다. 올라갈 때 그냥 지나친 곳은 다음날 내려올 때 꼭 줘야 했는데요. 알고 보니 돈을 받은 차는 번호를 메모해둔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지서나 파출소에서 잠을 자거나 일을 보는 경찰이 어떻게 우리 차가 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별들도 잠든 밤이었으니 멀리서도 엔진 소리가 들렸을 것이고, 불빛을 보고도 알아냈을 것 같더라고요. 더구나 돈이 생기는 일이니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봤겠습니까.

경찰들은 자기들 돈을 우리에게 맡겨놓은 사람처럼 한 치의 양보나 빈틈이 없이 받아 챙겼습니다. 치안을 그렇게 꼼꼼하게 살폈으면 도둑은 물론 간첩도 꼼짝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코웃음이 나옵니다.   

트럭 조수 알바를 시작한 다음해 여름방학 때는 인천의 둘째 누님댁에 다녀왔는데요. 공교롭게도 앞집에 사는 아저씨가 경인도로에서 사이드카를 타는 교통경찰이더라고요. 그런데 하루에 1천 원 이상을 꼬박꼬박 집으로 가져온다는 얘기를 누님에게 듣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경찰 대부분이 서민을 착취했던 사실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트럭 조수 알바를 하면서 지서와 파출소에 건넨 30-50원이 저를 위시한 몇몇 사람으로 그쳤겠느냐는 것이지요. 불혹의 나이가 넘어서도 승용차 기사들이 경찰관에게 현금을 건네주는 장면을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 번의 경험이 있고요. 

민중의 지팡이인지 민중의 몽둥이인지 헷갈리는 요즘 경찰을 보면 파출소와 지서에 돈을 건네던 추억들이 자꾸 떠오르는데요. 뇌물이 오가는 혼탁한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저도 일조했다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합니다. 모두가 달콤 쌉싸래한 추억들이지요.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추억’ 응모글



태그:#트럭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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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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