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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득 채우기 전에 당신은
또다시 수위를 낮추고 맙니다.
빠져나가면서 물은 최고로 아름다운 물빛을 냅니다.
절벽 앞쪽으로 해가 지기 때문입니다.
별수 없습니다.
당신으로 다 채우기 전엔 기암절벽 천층석이 있다 해도
소렌토에서 놀 기분이 아닙니다. - 155쪽, '당신으로 다 채우기 전엔' 모두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것이, 불볕더위를 칙칙 식히는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처럼 읽는 이의 먹구름 낀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내린다. 산문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한 것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총총걸음으로 다니며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이 되어 쓰라린 상처를 내기도 하고, 아름다운 황홀에 빠지게도 한다. 

얼마 전 시인 황학주가 펴낸 포토에세이집 <당신,이라는 여행>이 그러하다. 이 책을 펴면 글과 그림이 시가 되었다가 산문이 되었다가 흑백사진이 되었다가 형형색색의 멋진 풍경이 된다. 그렇다면 시인 황학주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은 누구일까. 그 당신이 누구이기에 시인의 마음을 꼬옥 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행여 그 당신은 시인과 함께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여기저기를 다닐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사진을 찍었던 사진작가 중의 한 명일까. 아니면 이탈리아 수상버스들을 스치며 반짝이는 그 길 하나였을까. 그도 아니면 아프리카에서 만난 송아지와 아이들, 말과 코끼리, 배 나온 가난한 아이들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은 시인이 눈으로 직접 바라보고 귀로 직접 듣고 피부로 직접 느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모든 풍경과 모든 동식물이니까. 시인은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당신'과의 지독하고도 깊은 사랑은 "사실이자 환상이며 그 둘의 그림자이자 그것들의 결합"이라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은 그 골짜기와 물무늬 속에 있다

올해로 15년째 아프리카를 위해 손땀 발땀을 흘려온 시인 황학주(54)가 포토에세이집 <당신,이라는 여행>(랜덤하우스코리아)을 펴냈다
▲ 시인 황학주 <당신,이라는 여행> 올해로 15년째 아프리카를 위해 손땀 발땀을 흘려온 시인 황학주(54)가 포토에세이집 <당신,이라는 여행>(랜덤하우스코리아)을 펴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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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자국을 디디며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다녔다. 그곳엔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커다란 폐허가 있으며 그 내력엔 무엇보다 '당신'이 있다.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당신'의 뒷모습과 걸음걸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는지, 그것을 그리면서 짧은 이 글을 썼다." - '글머리에' 몇 토막

올해로 15년째 아프리카를 위해 손땀 발땀을 흘려온 시인 황학주(54)가 포토에세이집 <당신,이라는 여행>(랜덤하우스코리아)을 펴냈다. 이 책은 시인이 구호 운동을 펴고 있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를 오갈 때 들렀던 이탈리아에 대한 자잘한 물무늬가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는 포토시산문집이다.

책갈피 곳곳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걸려 있는 사진도 예쁘다. 사진이 한 편의 시가 되고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람소리를 내며 살아 꿈틀대는 듯하다. 이 사진들은 피스프렌드 스태프로 시인과 함께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쏘다닌 이상윤, 박태희, 오지혜, 드니스 맥길이 찍었다. 

시인은 이 책에서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삶의 풍경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을 생각한 것도 사람살이를 주제로 다루려는 의도"도 없다. 그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느낀 여러 가지 감정의 골짜기와 마음의 물무늬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은 그 골짜기와 물무늬 속에 있다.

시인은 말한다. "내게 있어 여행은 숫제 사랑을 따라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라고. 시인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중간 중간 습한 세상과 마음이 가는 사람을 바라보지만 내 시선은 언제나 괴로움이 지나온 '당신'에게 가 멎고 여정은 마지막 남은 '당신'과의 서사시이며, 시다. 이 책 속에서의 '당신'은 내가 세상에 없던 아주 오랜 과거의 시간을 다룰 때조차 나와 관계하고 실재한다"라고.

갈피 곳곳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걸려 있는 사진도 예쁘다
▲ 당신,이라는 여행 갈피 곳곳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걸려 있는 사진도 예쁘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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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있는 당신의 차가운 맨발을 감싸주고 싶다

"바다 위의 겨울은 춥고, 바람은 사납습니다. 비까지 많아 홍수가 지면 이 광장도 물바다가 됩니다. 당신 없는 물의 광야가 됩니다. 개펄이 꽁꽁 얼 때를 기다리면 산 마르코에서 푸치나까지 당신을 찾아 바다를 걸을 수 있겠습니다. 어제는 안개 가득한 베베치아의 겨울, 그로 인해서만 눈으로 확인되는 연한 금발에 키가 큰 베네치아인들의 실루엣을 만끽했습니다. " - 30쪽, '겨울 베네치아' 몇 토막

이 책은 모두 3부에 140편의 시산문이 실려 있다. 제1부 베네치아 컬러에 '사랑의 주유소' '베네치아의 눈사람' 등 32편, 제2부 이탈리아의 아가에 '로마엔 밤에 오세요' '당신으로 다 채우기 전에' 등 36편, 제3부 초록의 아프리카에 '당신은 산호 해변에 반사되어버리고' '우리가 노을로만 된 가슴으로 갈 수 있을지' 등 72편이 그것.

시인 황학주는 겨울 베네치아에서 두터운 가죽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아스라한 안개 속에서 슬며시 나타났다 유령처럼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암갈색 나무 책상에 앉아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억지로 말이나 생각 따위를 끼워 맞춰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느낀 이미지를 펜 가는 대로 쓴다.

"관광객이 떠난 겨울 베네치아는 학생과 예술가들의 도시"라고, "카페와 바에서 들리는 음악소리를 따라 도서관 문을 밀고 나가면 열쇠 꾸러미 소리가 회랑을 지나 당신을 마중" 나가고 있다고 쓴다. 시인은 겨울 베네치아 곳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을 만난다. 둥근 다리 위에서는 춤을 추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의 차가운 맨발을 감싸주고"도 싶다. 

하지만 시인은 두렵다. 시인이 마음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당신의 차가운 맨발을 감싸주면 당신이 겨울 베네치아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새벽 빵 굽는 냄새가 새어나오는 어시장이 부산해지는 그 시간"이 되면 "당신이 내 안에서 춤을 멈출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를 탕진해 지상에 세우고 싶었던 사랑

"집이 어딘가를 향해 오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온 나는
폼페이의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맙니다.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하품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탕진해 지상에 세우고 싶었던 사랑,
그 부서진 계단이 몇 채씩 떠오르면
사뭇 졸린 척 양 볼이 발개져서 말이지요."
- 153쪽, '사랑의 정상' 몇 토막

시인은 이탈리아 곳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에게 보내는 시를 쓴다. 콜로세움에서는 계단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당신이 머리를 젖혀 내 목선에 파묻고" 있는 것을 느끼고, "사랑을 받아들인 자궁의 밤하늘"을 달이 잔잔하게 날갯짓하고 있는 것도 본다. 로마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에서도 당신을 기다리고, 140명의 성인상에서는 화강암 옷자락 날리는 소리를 듣는다.

로마에서는 "작은 그릇들을 당신이 누워 있는 창가에 죽 늘어놓으면 달빛이 한 가지씩 그 어딘가를 받아내 줄 것"만 같다. 테르미니 역 뒤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는 "여신이 있어서 제멋대로 구애하고", 스스로 구애를 당할 것만 같다. 나폴리에서는 로마 군병의 투구처럼 생긴 소나무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 "당신 쪽으로 머리를 둔 채 떠 있는 섬"이 곧 자신인가 하고 되묻는다.   

휴양도시 폼페이에 가서는 "물에 비친 폐허 하나가 노랗게 바다를 물들일 때, 대리석을 입고 넘어오는 당신"을 만난다. 그 대리석에 상아 꼬챙이를 찔러 "아프게 아프게" 당신의 실루엣을 그린다. 피렌체에 가서는 "당신이 집어든 강돌에서 우리가 주스를 만들어 마시던 갓 딴 무화과 냄새"를 맡는다.

시인 황학주에게 있어서 이탈리아의 모든 삼라만상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이다. 그 삼라만상이 때로는 당신의 실루엣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당신의 몸짓이 되어 시인의 마음을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시인은 환상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옛사랑의 그림자를 애타게 찾고 있었을까. 

암갈색 나무 책상에 앉아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 당신,이라는 여행 암갈색 나무 책상에 앉아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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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없이는 어머니라도 견디기 어려운 사막의 밤

"연이 떴습니다. 한국연박물관에서 기증받아 온 가오리연들이 사하라 사막 하늘을 납니다. 연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금세 연줄을 쥐고 둔 앞으로 뜁니다. 그들이 또 다른 모래사막으로 소유했던 하늘의 수면에 몸을 넣어보기도 당겨보기도 하며 퐁당퐁당 연을 날립니다. '아름답다'고 물고기연을 쳐다보며 여자아이는 해저 속으로 달려갑니다."
- 238쪽, '연날리기' 몇 토막

시인 황학주가 당신을 만나는 것은 아프리카에 가서도 끊이지 않는다. 아니, 아프리카에서 시인은 당신을 더욱 가깝게 만난다. 사하라에서는 "사분사분 들러붙는 가늘디가는 모래와 땀 냄새 바람 소리"에서 "긴 머리를 자른 당신의 어머니"까지 만난다. 당신 없이는 어머니라도 견디기 어려운 사막의 밤이라 여기며.

카이미아 마을에 짐을 풀 때 시인은 남대문 시장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책가방과 옷, 신발, 의약품을 살 때 당신이 툭 던진 말을 떠올린다. "아이들 중에서 오직 살아난 아이들만을 그리고 살 수 있는 아이들만을 위한다는 행위 속에는 어떤 인륜적인 어긋남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그 말 한 마디.  

시인은 당신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언뜻 떠올리지 못해 "아, 모르겠습니다"라고 얼버무린다. 그때 문득 싸구려 봇짐을 풀고 있는 카이미아 마을에서 "당신이 슬픈 어머니처럼 밤새워 머리를 풀어헤치는" 모습이 보인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 시인의 가슴에 대못처럼 박혀 있는 그 당신은 대체 누구일까. 

사랑은 타향으로 가는 길이다

길을 가리고 주욱 들어선
엠베네키 흰 꽃이 너무 많아
당신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염려하지 마세요
나무 뒤에서 오줌을 발로 밟으며 아무리 수줍어해도
당신의 엉덩이를 못 알아볼 리 없고
보드라워져서 뼈에 닿고
붉어져서 살에 닿는 빗살이 다 당신의 꽃잎이지요
- 287쪽, '엘레라이' 몇 토막

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을 펴내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시인 황학주 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을 펴내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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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학주의 포토에세이집 <당신,이라는 여행>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을 애타게 찾아나서는 길고 긴 수행이다. 그 수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왜? 시인에게 있어서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당신이기도 하고, 시인 스스로 당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오랫동안 아프리카 구호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당신 찾기에 다름 아니다.

작가 김훈은 "황학주에게 상처와 사랑은 동의어이고 상처가 사랑을 밀어내서 길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말한다. 김훈은 이어 "그리하여, 그에게 사랑은 고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타향으로 가는 길이다"라며 "그가 사랑을 타향 쪽으로 가져갈 때 그는 '모든 것의 타향 쪽으로 가지 않으면 나는 더욱 어두워질 것 같은데…'처럼 아름다운 시행을 쓴다"고 평했다.

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을 펴내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루시> <저녁의 연인들> <아프리카 아프리카>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인디언 마을로 가는 달> <아프리카 마사이와 걷다> <고향>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세 가지 사랑>, 시선집 <상처학교>를 펴냈다. 지금, 탄자니아 레세카타타에 마사이 부족을 위한 예술유치원, 예술중고등학교, 박물관, 진료소, 농장 등이 딸린 조그마한 예술 공동체 피스프렌드빌을 짓고 있으며, 국제민간구호단체 '피스프렌드' 대표를 맡고 있다.


당신, 이라는 여행 - 황학주 포토에세이

황학주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8)


태그:#시인 황학주, #당신, 이라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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