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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반촛불 의병' 발언을 보도한 <동아닷컴> 기사에 붙은 댓글 중 일부.
 이문열의 '반촛불 의병' 발언을 보도한 <동아닷컴> 기사에 붙은 댓글 중 일부.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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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이문열님 같은 정직한 지식인이 많이 나와 왜곡된 촛불문화를 바로 잡아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누리꾼 'gil8942'의 <동아닷컴> 댓글)

"모두 미친 줄 알았는데 용기 있는 분이 계시군요. 이 나라의 지성인이란 작자들은 정말 비겁하다. 쥐새끼들같이 몰려다니는 우매한 민중의 눈치만 보아 왔고 올바른 말 하나 할 줄 몰랐다. (중략) 진정 용기 있고 지혜 있는 지도자는 이문열 작가뿐이구나."(누리꾼 'gohgc'의 <동아닷컴> 댓글)

작가 이문열의 '반촛불 의병' 발언(6월 17일)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에 달린 댓글 중 일부다. <동아일보> 사이트에조차 이문열의 발언이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댓글들이 있지만,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것보다는 이문열을 칭송하는 댓글이었다.

위 댓글들 외에도 "흉포한 시민 독재 권력 앞에 보수적 인사들이 무서워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을 때 용기 있는 주장을 해줘서 고맙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100명보다 낫다, (중략) 누구 하나 나서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작가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 발언" 등의 반응도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었다.

이런 반응들을 접하며 기자는 이문열을 '용기있는 지식인의 전형'으로 이해하고 있는 한국 사회 일각의 분위기가 매우 우려스러웠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용기 있는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1840~1902)였다.

이문열=한국판 에밀 졸라?

에밀 졸라.
 에밀 졸라.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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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는 자연주의 소설을 대표하는 <목로주점>과 광부의 비참한 현실을 형상화한 <제르미날> 등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지만, 에밀 졸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러한 작품들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드레퓌스 사건이다.

1894년 말 독일군에 군사 비밀 정보를 넘겨준 스파이 혐의로 고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드레퓌스 대위를 에밀 졸라가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바로 그 사건 말이다.

1898년 1월 13일 <로호르(새벽)> 신문 1면에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대위에게 죄가 없다고 정면으로 천명하고, 당시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유대인 배척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드레퓌스는 알자스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워 죄인으로 몰아간 과정에서 유대인 배척주의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3만여 부가 팔리던 이 신문은 에밀 졸라의 글이 발표된 날엔 30여만 부가 배포되는 기록을 세웠고, '나는 고발한다'는 프랑스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드레퓌스파와 반(反)드레퓌스파로 선명히 갈라졌는데 드레퓌스파는 공화정 지지파와, 반드레퓌스파는 공화정 반대파와 겹쳤다. 두 진영의 치열한 공방은 드레퓌스가 법정에서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1906년까지 지속됐다. 이 공방에서 작가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개인은 물론 프랑스 공화정을 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1898년 무렵 작가로서 에밀 졸라의 명성은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러한 명예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에밀 졸라는 그야말로 용기있게 나섰다.

시민과 공화정 위해 싸운 에밀 졸라, 시민을 표적으로 삼은 이문열

일각에서 '용기 있는 지식인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이문열은 어떨까?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시국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는 에밀 졸라와 닮았다. 그러나 닮은 점은 거기까지다. 에밀 졸라와 이문열이 보여준 행동의 맥락과 사회적 의미는 전혀 닮지 않았다.

에밀 졸라는 '유대인 배척주의'와 '국익 우선'이라는 당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프랑스 정부는 진범이 다른 사람(에스테르하지 소령)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음에도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에스테르하지 소령은 처벌되는 대신 북아프리카로 원지 발령을 받았을 뿐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에밀 졸라는 억압 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쳤다. 이 시기에 졸라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이 글을 발표함으로써) 일부러 내 자신을 전부 드러내놓았다. 여기서 내가 벌이고 있는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는 데 쓰이는 하나의 혁명적인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경우 상황은 현저하게 다르다. 누명을 쓴 한 시민과 공화정을 지키고자 한 에밀 졸라와 정반대로, 이문열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누리꾼)을 자신의 표적으로 삼았다.

여론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끌고 가는 한국의 새 정부에 맞서는 대신, 정부에 항의하며 두 달 가까이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 시민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시민들이 정당하게 저항하는 상황을 '내란'에 비유하고 그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게재된 1898년 1월 13일자 <로호르(새벽)> 1면.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게재된 1898년 1월 13일자 <로호르(새벽)> 1면.
ⓒ http://www.oxygenee.com/images/J_Accuse-813K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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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과 닮은 사람은 따로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이문열을 한국판 에밀 졸라처럼 이해하는 한국 사회 일각의 반응은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매우 우려스럽다. 에밀 졸라와 이문열은 본질적으로 닮은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문열의 모습은 당시 에밀 졸라를 대놓고 비판했던 또 다른 작가 모리스 바레스(1862~1923) 쪽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모리스 바레스는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하면서 프랑스가 독일에 빼앗겼던 로렌 출신이다. 그러한 '국가의 치욕'을 어린 시절에 겪은 모리스 바레스는 반드레퓌스파를 대표하던 국가주의자로서 무엇보다 프랑스의 이익과 관련된 정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는 다음 말에서 잘 드러난다.

"드레퓌스가 무고한지, 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약 그가 무고하다면 프랑스에 죄가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드레퓌스 사건 초기에 변호사 레옹 블룸(훗날, 나치의 위협이 전 유럽을 뒤덮었던 1936년, 파시즘을 막기 위해 좌우가 합작한 인민전선 정부를 이끌게 되는 인물이다)은 유명한 작가이던 바레스를 드레퓌스파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바레스의 눈에 드레퓌스파는 프랑스 군대를 모욕하고 사법권을 인정하지 않는 반역자로 비칠 뿐이었다. 바레스는 반드레퓌스파의 선두에 서서 유대인 배척 사상을 전파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바레스가 드레퓌스파를 강하게 비판한 대목은 그들이 국익을 침해하는 일이 있더라도 무고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시민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국익 추구의 출발점임을 바레스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거리를 메운 상황을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내란'으로 이해하는 이문열과 바레스는 닮았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강렬한 체험이 그 후의 삶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바레스는 어린 시절 '국가의 치욕'을 겪었고 이문열은 좌익 부친의 월북 때문에 연좌제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왜 프랑스 지식인들 중엔 좌파가 많았을까

한 사회에서 지식인이 맡아야 할 중요한 역할은 정부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제동을 걸어 제대로 된 길을 찾게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다수 시민들과 함께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예전에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던 것도 우파 정부에 대항하는 시민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소설가 이문열씨(자료 사진).
 소설가 이문열씨(자료 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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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바레스는 '지적인'이라는 형용사로만 쓰이던 엥텔렉튀엘(intellectuel)이란 말을 '지식인'이라는 명사로 만든 사람이다. 바레스는 에밀 졸라를 비롯한 드레퓌스파를 엥텔렉튀엘로 지칭했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모욕의 의미가 강했다.

그러나 시민의 권리와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싸운 에밀 졸라를 사람들은 칭송했고, 엥텔렉튀엘도 긍정적인 의미의 지식인을 뜻하는 말로 폭넓게 쓰이게 됐다. 모리스 바레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문열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리고 그가 '내란'으로 비유한 시민들의 촛불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지식인'이라는 명사를 널리 퍼지게 만들었지만 참된 지식인이라는 명예는 적수였던 에밀 졸라에게 돌아가게 만들었던 바레스의 전철을 따라, '내란' 주동자로 몰린 시민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의병이라고 기록된다면 '반촛불 의병'을 주창한 이문열은 역사에 어떤 이름으로 남게 될까.


태그:#이문열, #에밀 졸라, #모리스 바레스, #지식인, #촛불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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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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