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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렇지요. 물론 그런 감정이 늘 샘솟는 것은 아닙니다. 가슴이 뭉클하기는커녕 얼굴만 보면 원수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소가 닭 보듯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너무 가깝다보니 마치 자기 자신을 대하듯 함부로 대하는 경향도 없지 않지요. 

삼사년 전이던가요. 담임을 맡았던 반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여섯 가지만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것은 컴퓨터·휴대폰·돈·친구·나 자신·가족 등이었습니다. 여기서 덜 중요한 순서로 하나씩 지워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습니다. 

그래도 컴퓨터와 휴대폰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이어서 덜 심각한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친구와 나 자신, 그리고 가족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여기저기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날 대다수 학생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돈도 친구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듯이 피붙이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 같은 것은 다분히 어른들의 몫이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철없는 아이들이야 가족의 소중함을 알아도 먼 훗날의 얘기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로서는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촌은 무슨? 그냥 아빠로 해요"

지난 13일~14일 순천효산고등학교(교장:이상욱)학생 20명과 가족, 교사 20명이 고흥 나로도 바닷가로 '가족 러브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 고흥 나로도 해수욕장 지난 13일~14일 순천효산고등학교(교장:이상욱)학생 20명과 가족, 교사 20명이 고흥 나로도 바닷가로 '가족 러브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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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늦은 저녁부터 휴무 토요일인 다음날까지 고흥 나로도 바닷가로 '가족 러브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애초에는 학생 20명과 학부모 20명이 함께하는 가족여행을 염두에 두었지만 요즘은 맞벌이 부부가 많아 엄마와 딸, 언니와 동생, 이모와 조카 그리고 교사와 학생이 한 가족이 되어 다녀온 가족나들이였습니다.

'가족 러브 캠프'를 떠나기 보름 전쯤, 저는 한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너 가족 러브 캠프에 참여하기 어렵다고 했다면서?"
"예. 부모님이 모두 직장에 다니시는데 시간을 내시기가 어렵다고 해서요."
"그럼 선생님이 네 아빠 노릇해주면 안 되겠니? 아빠 싫으면 삼촌으로 하든가."
"삼촌은 무슨. 그냥 아빠로 해요."
"그럼 너 승낙한 거다!"

그날 하루 종일 참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순순히 승낙을 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나 봅니다. 아마 녀석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의 일입니다. 정규 수업시간에는 들어가지 않고 방과후 수업시간에만 만나다보니 정을 붙이고 말고 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수업태도 운운하며 가끔씩 퉁이나 주고 했으니 사이가 좋아질 리 없었지요. 그래도 녀석은 왠지 저의 잔소리를 싫어하지만은 않은 눈치였습니다.    

가족과의 여행이 여의치 않은 학생들에게 대신 부모 노릇을 해준 교사가 저 말고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동료교사는 가족캠프에 참여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서로 서먹함을 없애고자 먼저 학교 복지실에서 순천 YMCA 고상연 부장님의 사회로 가족간의 정을 나누는 친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 친목의 시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서로 서먹함을 없애고자 먼저 학교 복지실에서 순천 YMCA 고상연 부장님의 사회로 가족간의 정을 나누는 친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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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요휴무일에는 친구들하고 낚시를 갈 계획이었는데 아 고 녀석이 나를 선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니까요. 헌데 내가 특별히 잘 해준 것도 없는데 왜 나를 지목했는지 그게 아직도 궁금하단 말이죠. 친구들이 약속 어겼다고 벌금을 물으라고 난리지만 녀석이 나하고만 가고 싶다는데 어쩔 겁니까? 허허허."    

제가 근무하는 학교가 정부가 지원하는 교육복지투자사업 학교로 선정된 것은 이태전의 일입니다. 교육복지투자사업이란 학교와 지역사회가 함께 도시지역의 점점 심화되고 있는 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하여 저소득층 자녀에게 학습, 문화체험, 신체·정신적 건강 등 삶의 전 영역을 지원하는 국가차원의 사업입니다.

부모의 경제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교육복지투자사업의 근본 취지인 셈이지요.

그런 사업목적도 물론 적극 공감하지만, 무엇보다도 학교에 교육복지실이 만들어져 점심시간이면 그 곳에서 북적대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저로서는 가장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누나나 언니 같은 젊고 해맑은 김민아 복지사 선생님이 학교에 오신 것도 그렇고요. 그런데 복지사 선생님의 정식명칭은 지역활동전문가라고 하지요 아마.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가족 러브 캠프'는 토요휴무일을 통해 학부모와 함께 하는 가족 여행 프로그램으로 제가 소속한 특별활동부에서 사업 진행을 맡다보니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해보는 프로그램이라 모든 것을 새롭게 구상하고 고민해야 했지만, 학교에 복지사 선생님이 계시고, 거기에 사업을 기획하고 총괄하는 교육복지투자사업팀(팀장: 최상경 교무부장 선생님)도 조직되어 있던 터라 큰 어려움 없이 즐겁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은밀한 유대를 나눈 밤

13일 오후 6시에 학교 복지실에 모여 '교육복지투자사업에 대한 이해'라는 제목의 특강(양동준 교감선생님)을 먼저 듣고, 서로 어색함을 달래고 가족끼리 떠나는 짧은 여행의 의미를 새겨보는 친목의 시간을 가진 뒤, 관광버스를 타고 고흥 나로도 학생수련관에 도착한 것은 밤이 이슥해진 뒤였습니다. 학생과 가족들은 정해진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곧바로 세족식을 하기 위한 장소로 모두 모였습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면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이 시간 우리 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했지요.
▲ 세족식 장면 세족식은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면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이 시간 우리 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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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발을 씻겨줌으로써 가족과 깊고 은밀한 유대를 나누고, 남에게 군림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의 뜻에서 마련한 세족식이 끝나자, 밤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로도 해수욕장의 고운 모래를 함께 밟아 보았습니다. 덕분에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다음날 아침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맞이 시간은 새벽 5시 17분. 하지만 끝내 우리의 기대를 외면한 해맞이 대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 바다를 산책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오행시 시제인 '나로도일출'도 '나로도바다'로 바꾸어야했지요. 아침을 먹고 난 뒤 패러디와 오행시 짓기, 미니체육대회 등의 프로그램에 진행하다보니 제 아들이 되어준 고마운 녀석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하긴 그것이 염려되어 떠나올 때부터 동료교사에게 녀석의 짝이 되어줄 것을 부탁해놓은 뒤였지만. 그래도 아침 산책을 하면서 우리는 남자끼리 좀 야하다 싶을 만큼 뜨겁고 깊은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바다 저편까지 들리도록 사랑한다는 말도 목이 터져라 외쳤고요. 모든 프로그램을 다 마치고 1층 로비에서 마지막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이 곳에 올 때만 해도 몸살기가 심해서 몸이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낸 지금은 몸이 아주 말짱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나 봅니다. 여러분도 즐겁고 행복하셨습니까?"
"예, 아주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듯 넌지시 물음을 던지자 금방 물 위에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졌습니다. 다음은 학생과 가족이 쓴 소감문, 윤동주님의 서시 패러디 그리고 '나로도바다' 오행시입니다.   

너무 가까운 사이여서 가끔은 함부로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엄마 미안해요,그리고 사랑해요!"
▲ "엄마 사랑해요!" 너무 가까운 사이여서 가끔은 함부로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엄마 미안해요,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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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와 함께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주변 환경에 장애가 많아서 계획만 하고 실천이 되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엄마와 1박 2일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과 친해질 계기도 부족했는데 선생님들의 참여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 가족 러브 캠프에 참여하게 되어서 너무 즐거웠어요. 처음에 언니를 따라 여기에 오는 것이 설레기도 했지만 조금 어색할 것 같아서 걱정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언니들도 다 착하고, 선생님들도 정말 재미있으시고, 좋더라고요. 저희 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가족러브캠프'에 다녀왔으니 가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도록 노력하겠어요.

- 엄마와 그동안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해 이번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캠프로 인해 엄마와 더 많이 가까워지고 자신감도 기를 수 있었다. 난생 처음 엄마의 발을 씻어주면서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 속 썩이지 말아야지…하고 말이다. 그리곤 10초 동안 엄마 얼굴 마주보는 것도 있었는데 5초도 채 못 보고 어색했다. 엄마랑 이런 관계였구나! 했는데 이제 캠프를 마치고 나니 그 어색함이 많이많이 풀어졌다.  

너무 가까운 사이라 가끔은 원수처럼 지내기도 하는 것이 가족이지요.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 "엄마 사랑해요!" 너무 가까운 사이라 가끔은 원수처럼 지내기도 하는 것이 가족이지요.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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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 전에 실은 귀찮아서 가기 싫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새벽바다가 너무 멋져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혜택을 보는 학교가 몇 안 된다고 하는데 내가 그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했다. 이번 기회로 나의 소극적인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학교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흡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분들의 하나하나 멘트가 너무 감동적이고 마음의 자유가 찾아온 것 같아서 정말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된 것 같아서 매우 흡족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1박 2일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가족에 대해 서로가 모르던 점들을 알고 평소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평소 진짜 좋아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 학교에서 느끼지 못한 부분들도 알게 되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번 가족캠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관광경영과 3학년 1반 학생들이 김금삼 담임선생님과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몸짓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며 관광경영과 3학년 1반 학생들이 김금삼 담임선생님과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몸짓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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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님의 서시 패러디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미국 소고기를 먹지 않기를
잎새주와 먹자는 제안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한우를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미국소를 묻어버려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술을 마셔야겠다
오늘밤에도 삽질에 미국소가 묻혀간다

1박2일 짧은 일정을 마치고 아쉬운 마음을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1박2일 짧은 일정을 마치고 아쉬운 마음을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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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노)도바다> 오행시 세 편

나의 인생에 초록불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노랑불일 때 생각을 잘 하여라.
도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인생의 교통사고가 나지 않게
바다처럼 깊고 넓은 생각을 하여라.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인생을 헛된 추억으로 보내지 않기를. 

나는 느낀다, 세상을 살면서
노(NO)라고 단정 지을 정도로 극단적인 현실은 없는 것이라고
도대체 어떤
바보가 NO라는 단어를 남발하는가? 모두가 다 항상 'ON'처럼 켜져 세상을 밝히는 인간이 되자.('NO'거꾸로 하면 'ON'이 됨)
다름 아닌 너와 우리,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

나는 순천효산고등학교 학생이다.
노다지 같은 학교이다.
도저히 다른 학교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고
다 체험할 수 있다.


태그:#가족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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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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