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5월 24일, 부산 민주공원에서 한국 원폭2세 피해자였던 고 김형률 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참석자들 중 일부는 실제 원폭피해자들이었다. 이중에는 원폭1세도 있었고 2세도 있었다. 2세 중에는 온몸으로 원폭의 아픔을 겪어내고 있는 '2세 환우'들이 있었다. 이 '또 다른 김형률씨들'은 추모제를 마친 뒤, 부산에서 고속선을 타고 나가사키·히로시마로 평화기행을 떠났다. 5박 6일의 일정으로 진행된 이번 평화기행에서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뿐 아니라, 한국인이 원폭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강제연행의 땅 치쿠호 등도 방문했다. <기자 주>
 

 

"당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강을 따라 가다 보면 바다가 나올 것이고, 그 바다를 따라가면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아 감시초소가 생겼고 붙잡힌 사람들을 데려다 때리고 고문했습니다."

 

나가사키를 출발해 치쿠호로 가는 길녘이었다. 야다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아버지 이야기를 하던 중 배동록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온가 강의 잔잔한 물줄기는 후쿠오카 지역의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비옥함을 상징하지만, 탄광을 따라 강제징용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아픔이 집중되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온가강 강둑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싶어라

 

 

잔혹하리만치 아름답고 평화로운 온가 강을 지나, 차창 밖으로 아소 가문이 소유한 드넓은 땅이 펼쳐졌다. 근방이 모두 아소 가문의 땅이며, 아소 다로 자민당 간사장의 대저택도 숲으로 둘러쌓인 이 근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에서 잘 나가는 집안인 아소 가문은 조선인에겐 침략의 가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하 1만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징용한 아소 탄광의 창업주가 아소 다로 간사장의 증조부이며, 아소 간사장의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을 수탈한 장본인이다.

 

아소 다로는 외상 재임 시절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 없다"는 망언을 일삼아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인의 지독한 미움을 받는 이 인물은 실제 일본에서는 인기인이다. 1979년 후쿠오카현에서 중의원에 당선된 뒤 9선을 연임하며 집권 자민당 내 극우파의 기둥 노릇을 해왔고, 아소광업의 이름을 아소시멘트로 바꾸어 1997년까지 사장직을 지냈다. 

 

 

1939년부터 1944년 말까지 아소탄광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1만여 명 중 절반 가량이 작업 중 사고, 일본인 현장감독의 구타 그리고 굶주림과 중노동 등으로 숨지거나 도주했다. 일본 측의 한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된 한국인은 모두 70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11만여 명이 후쿠오카 지역의 41개 광업소에 배치돼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아소탄광은 그 가운데서도 한국인 징용자에 대한 비인도적인 노동착취가 가장 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소 가문은 공식으로 피해 당한 조선인들에게 사죄하거나, 조선인 강제징용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는 한국의 요청에 성의있게 응한 적이 없다. 1954년 아소광업이 아소산업으로 개명했고, 다시 1969년 주식회사 아소로 바뀌었기 때문에 관련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소광업과 지금의 아소는 같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법인이 소멸되었으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변명은 누가 들어도 무책임한 태도다. 이러한 배경의 아소 다로가 아직도 이 지역에서 실질적인 유지고 전 일본 열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통탄할 노릇이었다.

 

평화기행 참가자 중 누군가는 아침에 식당에서 서비스로 받은 날계란을 아소네 집 근처에 다다르면 던져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으나, 아소 다로의 저택 앞까지는 가지 못했다.

 

개 고양이의 무덤보다 못한 조선인의 묘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와 온가강을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치쿠호 마을공동묘지였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개와 고양이의 작은 무덤과 묘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집에서 키우던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땅에 묻어주고 묘비를 세워준다.

 

그런데 이 묘비들을 지나 좀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이름도 묘비도 없는 곳에 작은 돌멩이만 놓여 있었다. 이곳저곳에 드문드문 돌멩이들이 놓여 있었는데 누군가 그 옆에 대롱을 꽂아두었다. 꽃송이를 그 대롱 속에 끼우라는 표시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덤인지조차 알아챌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가족이 있었습니다. 지하 수백 미터 땅 속에서 굴을 파면서 혹독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죽어서도 이름 없이 이렇게 묻혔습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저는 가슴이 찢어집니다. 하지만 이곳에 와보지 않고는 여러분이 조선인 강제노역자들의 아픔을 절절하게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안내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강제징용당한 조선인 부모의 아들로서 가슴 속에 슬픔이 많은 배동록씨는 숙연하게 향을 피우고 꽃을 꽂으며 잡초를 뽑았다. 그리고 치쿠호까지 끌려와 고초를 겪었던 조선인 안영환 할아버지가 생전에 잘 불렀다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숱 파로왔느냐…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였네… 십오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라다가 뚜드려 맞았네/ 몽두리 맞고서 굴 안에 끌려와서/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여기저기에서 죽은 사람은 많았는데/ 초상치는 것은 한 번도 못봤네."

 

본래 치쿠호 일정은 강제징용으로 고통을 받았던 조선인을 위해 활동을 펼쳐온 시바씨가 맡아주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시바씨는 얼마 전 동네 사람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병환 중이었다. 주민들의 조상이 묻힌 땅에 자꾸만 조선인들의 삶을 보고 배우러 오는 외부인들이 늘어나고,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이 벌어지는 것이 주민들 입장에서는 몹시 불편하기 때문에 시바씨 같은 사람은 집단적인 이지메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치쿠호에서는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 활동가들이 자원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나, 그들에 대한 일본사회의 눈은 따갑기만 하다.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활동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 나라도 먹고 살기 힘든데, 왜 남의 나라 사람을 더 도우려 하느냐?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우리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지 않느냐?"라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지점도 있다.

 

조선인들의 무덤 곁에서 박현주 합천군의원은 무릎을 꿇고, 합천자연학교에서 함께 온 박진필씨는 손수건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 히로시마 원폭의 후유증으로 아들을 잃은 김봉대씨는 무덤들을 오가며 술을 한 잔씩 뿌렸다. 내내 입을 앙다문 그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조선인을 고문하고 끓는 물에 던진 일본인 묘비가 어떻게 이곳에... 

 

자리를 옮겨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나무에 '전남' '광주'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전남이나 광주 지역에서 일본으로 끌려온 이들을 기억하려는 몸짓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칼로 새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등뒤편으로는 제법 잘 꾸며진 묘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일본인의 무덤이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배동록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시 일본인 사이에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발생했습니다. 증거도 없이 도난사고의 범인으로 조선인 한 사람이 지목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끓는 물에 던져졌습니다. 그는 끓는 물에 던져질 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몇 개의 무덤 중에는 그 조선인을 죽인 일본인 노무자의 무덤이 있습니다. 후손이 여기다 자기 조상이라고 묘비를 크게 세워준 것입니다."

 

하필 조선인을 죽이고 학대한 노무자의 무덤과 이름도 못 남기고 죽어간 조선인 노동자들의 무덤이 한 공간에 뒤섞여 있다는 것이 몹시 분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지만 침을 뱉고 뺨을 후려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진경숙 한국원폭2세환우회 사무국장은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맞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이모님, 외삼촌 이야기를 하며 눈밑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저희 친정은 일제시기 히로시마에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두살 때였습니다. 외삼촌과 이모님은 학교에 간다고 나가고, 할아버지는 출근을 했다가 원폭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시신이 어디에 묻혀 계신지도 잘 모릅니다. 혹시 우리 할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묻혀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평화기행단은 배씨의 안내를 따라 치쿠호 지역의 탄광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고 죽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을 모셔둔 '무궁화당'도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추모의 시간을 갖고, 현장강의를 들으며 뒷편의 전시물을 관람했다. 그리고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잡초를 뽑았다.

 

저녁에는 숙소에서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치쿠호 지역의 활동가들과 교류회를 가졌다. 유골을 본국에 돌려주고, 개, 고양이보다 못한 무덤 속에 방치된 조선인들의 아픔과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일본 활동가들의 입 속에서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잔잔하지만 단단한 이 일본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역사 속에 묻혀졌던 조선인들의 아픔이 밝혀질 수 있었다. 또 한국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일본 사회 속에서 자기 나라의 잘못을 건드리고 파헤치는 이들의 작업은 쉽지만은 않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활동은 아주 소중한 것이다.

 

우리도 피해자라는 일본의 외침, 그러나 치쿠호가 역사의 진실 외쳐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후부터는 오직 '피해자 의식'만이 전국민적 기억이 되어 버린 일본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 기억과 참회는 지금껏 불가능했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슬로건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고 교육한 일본 정부 탓에 일본 국민도 "우리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책임을 질 것이 없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일본인들은 "마치 태풍이나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처럼 느닷없이 원자폭탄의 재앙이 닥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일본 역사교육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왜 원자폭탄이 떨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생략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치쿠호는 말한다. 원자폭탄의 처참한 비극에 앞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조선인, 중국인들을 일본 각지로 강제연행해 탄광과 공장, 전쟁터, 위안소 등에서 노예처럼 부리다 내버린 역사가 있었다고.

 

조선인은 식민지배에 고통당하고 차별과 수탈 속에 살아왔지만, 일본으로 끌려와서 개 고양이보다 못한 취급을 받다가 죽었고, 유골과 묘지마저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또다시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 죄없이 죽어야 했다. 그들이 왜 조선 땅이 아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어야 했는지, 왜 그때 원자폭탄을 맞아야 했는지를 치쿠호는 말해주고 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의 백성이었고, 이들은 피폭 후에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치료도 못 받고 죽어 까마귀의 밥이 된 경우도 허다했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죽어간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뿐 아니라 치쿠호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땅이다.  

덧붙이는 글 | '원폭의 기억에서 평화의 길을 찾다-원폭피해자와 함께 떠나는 나가사키· 히로시마 평화기행' 
기간 : 2008년 5월 24일~5월 29일 
장소 : 군함도·다카지마→ 나가사키→치쿠호→히로시마 
주최 : (사)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협력 :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태그:#치쿠호, #강제징용 , #조선인 노동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