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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 하면 내겐 무엇보다 먼저 경기민요〈흥타령〉에 나오는 '천안삼거리'가 떠오른다. "천안삼거리 흥 - 능수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흥- 휘늘어졌구나"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 소고춤을 추면서 불렀던 노래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다. 중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타본 비둘기호 기차 속에서 호두과자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비들기호 기차 안에서 카트를 밀고 다니던 홍익회 아저씨가 가장 많이 파는 것이 심심풀이 땅콩과 오징어, 그리고 호두과자였다. 천안 광덕면은 호두과자를 만드는 재료인 호두나무를 맨 처음 심었던 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지었다는 천 년 고찰 광덕사 부근이 바로 그곳이다.
 
토요일(5. 24) 오전, 광덕사를 향해 길을 나섰다. 길엔 광덕산 산행에 나선 사람들로 넘쳐난다. 1987년에 세웠다는 '호두나무 전래 사적비'를 지나자 일주문이 나그네를 맞는다. 일주문 곁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 성(聖)과 속(俗)을 갈라놓는 경계라는 일주문. 허다 못해 신발에 묻은 흙이라도 털어내며 옷깃을 여밀 만도 하건만…. 
 
호두나무의 최초 시배지인 광덕사
 
일주문을 지나자 눈앞에 '지장도량 광덕사'라 쓰인 현수막이 나그네를 맞는다. 지장도량이라, 특별히 지장보살의 자비와 영험을 앞세우는 절인가 보다. 이윽고 광덕사 아래에 당도한다. 2층 누각인 보화루와 그 우측에 있는 범종루가 삐죽 얼굴을 내밀며 나그네에게 끄덕 인사를 건넨다.
 
 돌계단을 밟고 절 마당으로 올라간다. 계단 우측엔 커다란 호두나무 한 그루가 마치 사천왕처럼 버티고 섰다. 호두나무 앞에는 '유청신 선생 호도나무 시식지'라 쓴 돌비석이 서 있다. 이 호두나무의 높이는 18.2m이며 나이는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호두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다. 그렇다면 누가 호두나무를 우리나라에 맨 처음 가져다 심은 것일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16년(1290) 9월, 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고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유청신이 호두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한다.
 
수령으로 보아 이 호두나무가 그때 심은 나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유청신은 요샛말로 치면 문익점과 더불어 우리나라 유전자 확보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게다가 오늘날 천안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한 공이 얼마나 큰가.  
 
2층 누각인 보화루 누하를 지나간다. 나무 판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다. 상체를 벗은 몸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한쪽 다리를 쳐든 모습이 꽤나 역동적이다.
 
인간적 체취를 느끼게 하는 대웅전 계단 돌사자
 
 
절 마당으로 올라서자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은 대웅전과 명부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기단 아래 마당 죄우엔 적선당과 육화당이 있고, 대웅전·명부전 맞바라기에는 보화루와 범종루가 자리 잡고 있다. 'ㅁ' 자형가람 배치다.
 
광덕사는 남쪽에 있는 태화산 마곡사와 등을 맞대고 있다. 그래서 일주문 현판에도 광덕산 광덕사가 아니라 '태화산 광덕사'라 쓰여 있는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흥덕왕 때에 이르러 진산조사가 다시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기 전에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 중 하나였다고 한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찰이 완전히 소실되어 조선 선조 때 희묵 스님이 다시 중창했다고 한다. 1983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처음보다 크게 지었다 한다. 
 
불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아미타여래와 우측에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삼존 모두 둥근 얼굴에 큰 귀, 짧은 목, 좁은 어깨에 짧은 팔과 넙적한 손 모양을 하고 있어 매우 어색해 보인다. 이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뒤에 걸린 후불탱이다. 건륭 6년(1741)이라는 화기(畵記)가 적혀있는 이 탱화는 매우 우아하다. 그러나 최근에 보수하면서 채색을 덧칠하여 원형이 손상된 것이다. 제대로 손질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손대지나 말 것이지. 요즘 같은 시류 속에서 지키지 못해 미안한 것이 어디 한둘이랴마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형태다. 1층 몸돌에는 문 모양을 새겨넣었으며 그 안에 다시 자물쇠를 새겨 놓은 것이 특징이다.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 모양)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탑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다.
 
유독 내 흥미를 끈 것은 대웅전 계단 앞에 선 돌사자 한 쌍이다. 원래 보화루를 올라가는 돌계단 옆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받침돌을 따로 두지 않고 한 개의 돌로 조각하였다. 좌측 사자는 입을 다문 형상이며 우측 사자는 흐뭇한 미소를 띤 형상이다. 마멸이 심해 사자의 형상이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 얼굴 모양을 한 사자의 모습에서 이 석상을 새긴 석공의 인간적 체취를 느끼는 듯해서 좋다. 동물인 사자에게 인간의 모습을 투영시킨 석공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생명의 본질을 확인시켜 주는 불두화
 
 
대웅전 오른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명부전이 있다. 지장전이라고도 부르는 명부전은 명부 세계의 주인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이다. 지옥·아귀·축생·수라·사람·하늘 등 육도의 윤회에서 끝없는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보살이다. 고려말·조선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각광받기 시작한 지장신앙은 그 이후 크게 유행했다. '명부전'이라는 전각이 생겨난 것도 그때부터이다. 
 
전각 안에는 지장삼존·시왕·동자상·역사상 등을 모셨다. 지장보살은 둥그런 얼굴에 민머리를 하고 있으며 통견의 옷 주름은 매우 형식적이다. 생긴 모양으로 미루어 대웅전의 불상들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좌우에는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뒤쪽엔 지장보살탱이 걸려 있다. 지장보살 옆으로는 명부를 심판하는 시왕이 늘어서 있다.
 
명부전 앞엔 꽤 큰 불두화가 한창 탐스런 꽃을 피워내고 있다. 그러나 그루터기 아래를 바라보니 벌써 떨어진 꽃잎이 수북이 쌓여가고 있다. 생명은 아무리 싱싱한 것일지라도 본질적으로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싶다.
 
이번엔 산신각과 부도밭을 향해서 간다. 산신각은 대웅전에서 우측으로 한참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돌계단을 한참 올라간 뒤에야 닿을 수 있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에서 가장 호젓한 곳에 있는 산신각은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여덟 분의 신장상을 돋을새김한 아름다운 부도  
 
 
산신각을 내려와 부도밭을 향해 간다. 부도로 가기 전, 평지에 조성된 5층 석탑을 만난다. 생긴 걸로 봐서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80년대 초 국제 그룹 양정모 회장의 시주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라는데 옥개석의 곡선이나 전체적인 면이 너무 반듯하여 돌의 질감이 부족하고 정감이 없다. 이 탑을 오래 바라보다가는 마음속에 있던 신심마저 달아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5층 석탑 위로 난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4기의 부도가 자리한 부도밭이 나온다. 우암당 부도·적조당 부도·청소당 부도 등 팔각원당형 부도 3기가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고 조금 위쪽에 석종형인 부도 1기가 따로 자리 잡고 있다.
 
부도의 임자가 새져져 있지 않은 무명 부도다. 변형된 연꽃을 새긴 장방형 지대석 위에 간주석을 놓았다. 간주석 면마다 여덟 분의 신장상이 돋을새김 돼 있다. 신장상마다 제각기 표정이 다르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부도의 몸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를 얹어 놓았다. 매우 정성을 들여 조성한 흔적이 역력한 부도다. 전체적인 형태, 둥근 탑신의 모습 등으로 보아 4기 모두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부도밭을 내려와 개울 건너편에 있는 천불전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 천불전으로 간다. 천불전은 공사 중이다. 1975년에 예전 건물을 완전 해체하고 새로 세웠는데 1998년 12월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일어나 전소된 것을 다시 짓고 있는 것이다.
 
하릴없이 다리를 건너오다 입구에 서 있는 큰 바위 면에 새겨 놓은 금강역사상을 만난다. 아까는 못 보고 지나쳤던 것이다. 이건 또 어느 때 조성한 마애상일까.
 
금강역사상은 상체를 벗고 오른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고 왼손은 추켜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몸을 감싸는 천의(天衣) 때문에 더욱 역동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천불전을 지키는 수문장의 역할을 하라고 새긴 듯하다.
 
경내로 돌아온다. 대웅전 돌계단 돌사자 머리를 한 번 쓸어준 다음 광덕사를 나선다. 보화루 앞에서 그냥 떠나기 서운해 다시 호두나무한테로 다가간다. 문득 어린 시절 호두나무 열매의 살을 벗기다가 옻이 올라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호두 껍질을 깨고 알갱이를 먹을 땐 얼마나 고소했던가. 어쩌면 그 천진하던 마음속엔 나 자신도 모르는 부처가 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호두나무에 오르락거리던 그 천진불이 살던 그 시절에 귀의하고 싶다. 호두나무에 작별 인사를 건네며 광덕사를 떠난다. 그러나 호두나무는 아무 말이 없다. 400년 동안 호두알처럼 굳게 닫은 침묵을 어찌 섣불리 꺨 수 있겠는가.

태그:#광덕산 , #광덕사 , #호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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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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