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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에 모인 어른들

"새벽 3시까지 은성교회로 오세요."
"그렇게 빨리요? 왜요?"

순천 YWCA가 주관하고 한국전력 순천지점이 후원하는 '얘들아 밥 먹자' 캠페인을 며칠  앞두고 우리 학교 교육복지업무를 담당하는 선생님과 나눈 대화다. 새벽 3시까지 교회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2시 30분에는 눈을 떠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수업은 수업대로 해야 하는데…. 이런 걱정에 앞서 꼭두새벽부터 모여야 하는 그 이유가 나는 자못 궁금하였다. 

하지만 질문을 던져놓고 아차 싶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주려면 누군가 그 주먹밥을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올해로 4회째 전개되는 '얘들아 밥 먹자 주먹밥 나누기 캠페인' 대상 학교로 선정된 우리 학교 학생 수는 845명. 거기에 3을 곱하면 2천5백 개 남짓의 주먹밥을 만들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 새벽 3시라도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닌 것이다.   

다행히도 2시가 조금 넘어서 눈이 떠졌다. 시간을 확인하자 안도의 마음이 들어서인지 거실 커튼을 젖히고 가로등이 켜진 밤 두 시의 정적과 잠시 조우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와 처음 사랑을 나누던 시절, 밤 두 시는 내가 즐겨 깨어 있곤 했던 시간대였다. 그 무렵에 쓴 시다.     

밤 두 시는, 나무로 말하자면
뿌리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어둡다는 점에서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꽃피울
내일을 떠받치고 있다는 점에서.

-졸시, '밤 두 시'

굳이 비유하자면, 주먹밥을 만들기 위해 교회에 당도해야하는 새벽 3시는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주먹밥 나누기 행사의 뿌리에 해당하는 시간이리라. 내 상상력이 그 뿌리의 시간대까지 미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세상을 허투루 살았거나 사물을 피상적으로만 바라본 결과일 것이다.   

YWCA 김현미 부장이 주먹밥 만드는 방법을 자원봉사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좌상). 주먹밥을 만들기 전에 자원봉사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우상).
▲ 주먹밥 만들기 YWCA 김현미 부장이 주먹밥 만드는 방법을 자원봉사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좌상). 주먹밥을 만들기 전에 자원봉사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우상).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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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에게 밥 먹입시다!

그런 반성을 되씹으며 오랜만에 새벽길을 걸어 교회에 도착하니 30여 명의 YWCA 지도자와 회원, 한국전력 순천지점 사회봉사단원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분주하게 몸을 놀리는 것이 이미 몸에 배인 듯했다. 그들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꽃피울 내일을 떠받치고 있'는 뿌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밥 먹자!' 주먹밥 나누기 캠페인은 청소년의 발육을 저해하는 먹을거리로부터 소비자인 청소년을 보호하고 사회전체가 안전한 먹을거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자는 뜻에서 YWCA가 후원단체의 협조를 받아 전국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생명사랑소비자운동이다. 그러니까 순천YWCA의 후원단체는 한국전력 순천지점인 셈이다.        

"모든 직원들이 3개 팀으로  편성되어 사회봉사활동에 다 참여합니다. 한 달에 개인당 5천 원씩 회비를 내는데 이것을 회사에서 120%로 다시 환급을 해주지요. 그 돈까지 합하여 사회봉사활동 기금으로 사용합니다."

주먹밥을 만들어 봉지에 담는 마지막 공정이 진행되고 있다.
▲ 주먹밥 만들기 주먹밥을 만들어 봉지에 담는 마지막 공정이 진행되고 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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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민, 교사, 학부모 모두 신나게 만든 주먹밥

회사에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직원들이 몇 분이나 되느냐, 후원금은 직원들이 내느냐, 회사가 내느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변이다. 한국전력 순천지점은 해마다 한 차례씩 하고 있는 주먹밥 나누기 캠페인 말고도, 순천시에서 지원을 받아 순천 YWCA가 운영하고 있는 경로복지식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장애인 복지회관이 주관하는 장애우 집 고쳐 주기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인스턴트 음식, 청량음료에 길들여진 청소년들의 건강을 걱정하며 새벽부터 정성으로 준비한 주먹밥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운동에 젊고 발랄한 대학생들과 시민 자원봉사자,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까지 합세하여 시작부터 화기애애하고 풋풋한 자리가 되었다.     

정각 3시가 조금 넘어서자 순천YWCA 김현미 부장의 진두 지휘 아래 드디어 주먹밥 만들기 행사가 시작되었다. 주먹밥을 담을 봉지에 '얘들아 밥 먹자'라는 글씨가 써진 라벨을 붙이는 것이 내가 맡은 최초의 임무였다. 오랜만에 해보는 단순 작업이었지만 손에 익기까지는 긴장이 됐다. 다음 임무는 주먹밥 만들기. 적당한 양을 가늠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것도 차츰 손에 익으니 해볼만 했다.

문제는 슬슬 허리가 아파온 것이었다. 왼쪽 어깻죽지가 결리기까지 했다. 식당 벽에 달린 시계를 흘금 바라보니 시침은 겨우 4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그 후 두 시간 가량이 더 흘러 시침이 6시를 가리킬 때는 허리도 어깻죽지의 통증도 말끔히 가시고 없었다. 그때 나는 주먹밥을 봉지에 넣는 마지막 공정에 투입되어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어둡고 긴 터널 하나를 통과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초심자의 진지함 같은 것이었을 터이니,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라!     

새벽 3시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자원봉사단원들과 학부모들.
▲ 애들아, 밥먹자! 새벽 3시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자원봉사단원들과 학부모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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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맛을 안다는 것은 인생을 안다는 것

모두 힘을 합하여 정성을 다해 만든 주먹밥을 차에 싣고 학교에 당도하자 말쑥한 정장차림에 가슴에 띠를 두른 순천농협중앙회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해 어른들이 나서준 것이 고마워서였을까? YWCA의 젊고 발랄한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손에 익은 솜씨로 행사장 세팅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교문을 바라보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밥처럼 맛있는 것이 또 있을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경 나이 지긋한 어른이리라. 밥맛을 안다는 말은 인생을 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밥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하지만 인스턴트 음식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나이 어린 청소년들이 그런 진짜배기 맛을 알기는 어렵다. 

언젠가 학교 식당에서 맛있는 무공해 사과가 후식으로 나왔는데 상당수 아이들이 그것을 먹지 않고 음식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이해가 되지도 않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들을 탓할 일만도 아니었다. 그들의 잘못된 식생활 습관을 바로 잡아주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 아닌가. 

드디어 두 명의 여학생이 행사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그때 왜 내 가슴이 쿵쾅거렸을까?
▲ "애들아, 밥먹자!" 드디어 두 명의 여학생이 행사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그때 왜 내 가슴이 쿵쾅거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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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4일, 순천YWCA가 주관하고 한국전력 순천지점이 후원한 '애들아, 밥먹자' 주먹밥 나누기 캠페인이 전남 순천효산고 교정에서 진행되었다. 교사, 학부모, 시민자원봉사자들이 새벽 3시부터 만든 주먹밥을 일찍 등교한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 "애들아, 밥 먹자! 밥이 최고야!" 지난 5월 14일, 순천YWCA가 주관하고 한국전력 순천지점이 후원한 '애들아, 밥먹자' 주먹밥 나누기 캠페인이 전남 순천효산고 교정에서 진행되었다. 교사, 학부모, 시민자원봉사자들이 새벽 3시부터 만든 주먹밥을 일찍 등교한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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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두 명의 여학생이 행사장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해돋이를 구경하기 위해 새벽같이 나섰다가 드디어 떠오르는 해를 볼 때 느끼는 감정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첫 교단을 밟고 아이들을 만났을 때의 그런 떨리고 흥분된 기분이랄까?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리허설까지 마친 봉사단들의 일종의 퍼포먼스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도 그들이 힘차게 내지르는 함성을 따라 이렇게 외쳐 보았다.

"얘들아 밥 먹자, 밥이 최고야!"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전력 순천지점 사회봉사대원들과 순천농협중앙회 직원들.
▲ '애들아, 밥 먹자'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전력 순천지점 사회봉사대원들과 순천농협중앙회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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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아 밥 먹자!  주먹밥 나누기 행사를 마치고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 주먹밥 나누기 자원봉사자들 애들아 밥 먹자! 주먹밥 나누기 행사를 마치고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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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주먹밥 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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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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