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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2월 22일 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8살배기가 된 <오마이뉴스>는 올해 여러 가지 연중기획 가운데 하나인 '백인보-희망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독자 여러분에게 찾아갑니다. '백인보-희만사'는 작지만 소중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 의미있는 도전과 실험을 하는 사람들, 우리 사회 희망의 싹을 틔우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땀방울이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편집자말]
올해로 20돌을 맞은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은 마지막 남은 인문사회과학서점이다.
 올해로 20돌을 맞은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은 마지막 남은 인문사회과학서점이다.
ⓒ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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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길을 묻거든 고개 들어 관악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희성의 시구를 빌어서라도 좀 폼 나게 소개하고픈 곳이 있다. 관악산 자락 아래 녹두거리에 가면 오렌지빛 간판의 서점이 있으니, 마지막 남은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이하 그날)이다.

1988년 문을 연 이곳은 사회변혁세력의 몰락과 학생운동의 급퇴조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올해로 스무 살, 성년이 됐다. 고된 땀방울로 '그날'을 늠름히 키워낸 주인공은 김동운·유정희 부부다. 1990년부터 운영을 맡아왔다.

올해로 스무살, 20돌 기념행사 성황리에 마쳐

고된 땀방울로 오늘의 '그날이 오면'을 키워낸 주인공 김동운·유정희 부부
 고된 땀방울로 오늘의 '그날이 오면'을 키워낸 주인공 김동운·유정희 부부
ⓒ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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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이 스무 돌이었어요. 조촐한 기념행사를 두 가지 치렀지요. 작년 말에 20돌 기념 서평대회를 열었는데 응모작이 80여 편이나 됐습니다. 또 3월에 박노자씨 초청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새내기들 중심으로 500명이 몰리는 성황을 이뤘습니다. 두 행사 모두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생각보다 호응이 좋았어요. 큰 기대 안 했는데 놀랐습니다."

설핏 미소를 머금는 김동운씨. '요즘 같은 분위기'란 말을 유독 강조한 그는, 지루한 투병을 마친 회복기의 환자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희망의 불씨 지피는 설레는 음성으로 지나온 '그날의 생애'를 되짚었다. 

1990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동운·유정희 부부는 지인의 소개로 서점을 인수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 대학가의 인문사회과학서점은 150여 곳에 이르렀다.

하나같이 이름도 결연한 인문사회과학서점은 단지 책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당대의 새로운 사상과 이론이 가장 먼저 흘러드는 '핫플레이스'였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동지들의 미더운 '연락방'이었다. 시대를 고민하던 젊은이들은 서점에 한나절이고 머물며 책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진보의 아지트' 사회과학서점 150곳은 어디로

그날이오면 내부
 그날이오면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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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과 책이 뒤섞여 뜨거운 시대정신을 부화해내던 '진보의 아지트'가 점차 위기를 맞게 된다. 사회변혁의 전망이 붕괴되고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대가 열렸다. 부지불식간에 세상은 달라졌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서점은 할인경쟁 등 막강한 자본력으로 도서유통 구조를 왜곡시켰다. 대학에는 학회와 동아리가 줄어들고 동네에는 작은 서점이 사라졌다. 인문사회과학서점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90년대 중반 즈음에는 그날도 운영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그날' 자리인 '전야'서점으로 확장 이전했습니다. 매출이 늘었고 숨통이 좀 트였지요. 앞으로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큰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매번 어려움에 떠밀려 수세적으로 방어하기보다 더 능동적이고 공세적으로 돌파해나가자고 판단했지요."

김동운씨는 다채로운 실험을 도모했다. 97년 말에는 10주년 기념행사로 서평 공모대회를 열었다. 98년에는 자비를 들여 <그날에서 책 읽기>라는 자체 잡지도 발행했다. 100여 쪽 분량에 격월간으로 만든 <그날에서 책읽기>는 주로 인문사회과학서적 서평을 담았고, 양질의 콘텐츠와 참신한 시도로 주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날'을 이용했던 서울대 졸업생 이경근씨는 "<그날에서 책읽기>에 서평을 쓰면 해당 도서는 10% 할인권을 주었다. 그날 아저씨는 서평을 거절하지 못할 심성 착한 학생들을 잘 선별해서 원고를 청탁하곤 했다(웃음)"고 추억했다.  

<그날에서 책읽기> 발행·세미나 카페운영 등 활로 모색

18년 째 서점을 운영 중인 '그날 아저씨' 김동운씨
 18년 째 서점을 운영 중인 '그날 아저씨' 김동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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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발간으로 인문학의 향기를 널리 퍼뜨린 '작은 서점'은 99년 건물 2층에 카페를 열기도 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나래를 편다'라는 멋진 이름에 걸맞은 복합문화 공간이었다. 녹두거리에 다시금 세미나의 열기가 살아났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와 홍세화씨 등 저자와의 대화를 갖는 등 풍성한 담론이 꽃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새천년 접어들며 카페 이용자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무료 배부였던 <그날에서 책읽기>와 카페의 침체는 급기야 서점운영까지 영향을 미쳤다. 1999년 12월 <그날에서 책읽기>는 발행이 중단되었고 2004년 말 '미네르바의 부엉이'도 안녕을 고했다.

"2003,4년도까지 가까스로 버텼는데 매출이 떨어져 월세 227만원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월세 내고 아르바이트생 인건비 주고 나면 아무것도 없이 부채를 떠안는 구조가 됐죠. 관악구의원이었던 아내의 활동비로 겨우 생활했습니다. 서점은 제 개인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주변 사람들과 서점 정상화 방안을 논의했고 후원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날'의 역사를 만든 이들이 주축이 되어 '그날'을 사수했다. 장경욱 전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차장이 후원회장을 맡고 200여 명의 회원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탰다. 인문사회과학서점의 전형성을 지닌 서점 하나 지켜낼 수 없다는 건, 진보운동의 상징적인 몰락이라는 것에 대해  '그날'을 거쳐 간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2006년 9월 정식 후원회를 발족한 것이다.

200여 명의 십시일반으로 월세 227만원 충당
 

'그날이오면'은 200여 명의 후원회원이 십시일반 힘을 보태 운영되고 있다.
 '그날이오면'은 200여 명의 후원회원이 십시일반 힘을 보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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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 고비를 넘긴 '그날'은 현재 가까스로 현상유지에 힘쓰는 형편이다. 후원회가 300여 명은 돼야 재무구조가 개선되는데 아직은 역부족이다. 김동운씨는 하루 종일 서점에서 일하고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상황을 지나 기존의 부채가 누적되어 추가로 금융비용까지 발생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매출이 현 상태를 유지해도 그의 경제적 부담은 조금씩 늘어나는 것.

그럼에도, 늘 개인적인 것을 돌보기보다 전체적인 상황에서 판단한다는 김동운씨는 "서점 문을 닫는 것은 단 한 번도 고려대상에 넣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더 열악한 조건에서 신념을 지키며 일하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편하고 좋은 조건"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단호한 겸손이다. '지혜로운 배신'조차도 고려의 대상이 아닌 듯했다. 그 시절 용어로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닐 수 없다.

허나 진중한 표정과 투박한 어투에서 오랜 투사의 이미지를 읽어낼 순 없다. 그렇다고 허허실실 소탈한 주인장 캐릭터도 아니다. 또 그도 말했듯이 대한민국에서 아이 둘 키우며 사는 부모가 느껴야 하는 현실적인 부담과 갈등은 위압적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일까. 마치 주가 그래프처럼 부침이 심했던 격동의 20년을 '그날 아저씨'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유정희를 석방하라' 학생들 눈빛 못 잊어

"제가 지향하는 바와 생활의 방편이 일치되어 좋습니다. 손님들이나 아르바이트생까지 상호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에서 만나고 상호소통이 이뤄집니다. 대부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소외되고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힘든 경우가 많은데, 서로 소외되지 않는 일터라는 건 큰 장점이지요. 자기를 가리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으니 좋지요."


가끔씩 떠올리면 힘이 솟는 멋진 추억도 있다. 때는 1997년, 김영삼 정권 말기에 고대 앞의 '장백서점', 성대 앞의 '풀무질', 서울대 앞의 '그날이 오면' 세 곳에 국보법 위반으로 압수수색이 이뤄졌고 대표가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서점 명의가 아내의 이름으로 돼 있어서 아내가 붙잡혀 갔지요. 아내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고 저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받았습니다. 서점에 오느라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학생 500~600여 명이 서점 앞 도로까지 나와 항의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아, 헛되이 살진 않았구나' 싶었지요. 그들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저 바람과 의지를 잘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학생 중 150여 명은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까지 가서 '유정희를 석방하라'며 항의했다고 한다.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그날 동시에 구속된 고대와 성대에는 이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그가 슬며시 귀띔했다.

자본의 논리도 비켜가고 이념의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김동운씨의 고집스런 삶의 원리는 의외로 소박했다. 비정규직 철폐 등으로 몇백일 씩 천막치고 싸우는 이들에 비하면 자신은 편안하고 좋은 조건이라는 것. 인간의 소외됨 없이 서로 터놓고 존중하는 일터에서 밥벌이할 수 있다는 것. 오랜 시간 믿고 함께 한 이들에 대한 신의를 다하겠다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부터 <The left>까지, 사회과학서적 박물관

'그날이 오면'을 찾은 학생들은 김동운씨에 대해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닌 책을 아는 사람으로 '경력 17년차의 북마스터'"라고 말했다.
 '그날이 오면'을 찾은 학생들은 김동운씨에 대해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닌 책을 아는 사람으로 '경력 17년차의 북마스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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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는 반가운 책이 많다. <전태일 평전><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은 '그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또한 최근 화제작 유럽 좌파의 역사를 다룬 <The Left>부터 88년 판 <친구는 멀리 갔어도>(풀빛, 5천원)까지 가히 인문사회과학서적의 박물관이라 할만하다.

반들반들한 새 책 사이에 누렇게 바랜 '오래된 새 책'과의 조우가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한국농민운동사><동향과 전망> 등등을 보노라면 이것들이 아직도 살아 있음에 기겁하고, 5천원 안팎의 헐한 책값에 놀라고, 다소 비장한 내용에 슬며시 웃음이 인다. 김동운씨는 절판된 책 중 소장가치가 있는 책 500여 권은 별도로 챙겨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책 구경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드문드문 학생들이 들어선다. 서울대 정치철학 학회에서 활동 중인 김일환(사회학과 06학번)씨와 오학준(언론정보학과 06학번)씨는 세미나에 필요한 책을 구입하기 위해 들렀다고 한다. 두 학생 모두 새내기 때 선배의 소개로 왔다가 단골이 된 경우다.

"여긴 책들이 모여 있어서 좋아요. 다른 서점에 가면 띄엄띄엄 있어 책을 찾기 힘든데 그날은 분류도 잘 돼 있고요. 최신 동향을 알 수도 있죠. 보통 서점에 갈 땐 살 책을 정해서 가지만, 여긴 그냥 왔다가 아저씨가 추천해주는 걸로 사기도 해요."

김일환씨의 말에 오학준씨도 "아저씨는 경력 17년차의 훌륭한 '북마스터'"라며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아는 사람"이라고 호응했다. 그들은 아직 학생신분이라 후원회 가입은 안 했지만 10~20% 저렴한 인터넷 서점 대신 이곳을 이용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동운 씨는 학생들과 곧 있을 대동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런두런 정겨운 담소가 오가자 그의 얼굴이 생기를 띤다.

경력 17년차의 북마스터, "책 파는 사람 아닌 책 아는 사람"

그는 책을 일일이 비닐로 포장해준다.
 그는 책을 일일이 비닐로 포장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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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분위기가 좋아 기념촬영을 권했다. 김동운씨는 좀 그럴듯하게 두꺼운 책을 들고 사진을 찍자며 무려 1028쪽 짜리 <The left> 흰색 표지와 검은색 표지를 들고 왔다. "아, 우리 이 책 안 읽었는데요~" 영판 쑥스럽고 책이 무겁다며 낑낑대는 학생들에게 그는 책 표지를 번갈아 짚어가며 "이게 바로 흑백논리"라며 장난을 친다.

그는 또 책을 사면 일일이 비닐로 포장을 해주었다. 한 손에 책을 쥐고 가로 세로로 돌리며 가위질하는 손길이 마술사처럼 날래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자 조금 전 그의 이야기들이 비로소 와 닿았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어울려 일하고 꿈꾸며 사는 즐거움' 말이다.

그러니 김동운씨가 지킨 것은 '그날이 오면'이 아니라 그의 삶이다. 삶의 가치를 음미하는 자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불편을 적극적으로 누렸고, 인생의 기로에서 '나'보다는 '우리'로 사는 삶의 양식을 택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예상치는 못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이 대한민국 인문사회과학서점의 '마지막 잎새'에서 '희망의 새순'으로 소생하리란 것을.

덧붙이는 글 | 그날이오면 홈페이지 http://gnal.co.kr



태그:#김동운, #그날이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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