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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거침없이 연병장 입구로 달려 들어왔다. 김좌진은 흠칫 놀랐다.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날랜 동작으로 말에서 내리더니 아주 정숙한 걸음으로 말을 끌고 오고 있었다. 아마도 훈련 중인 병사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예의를 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마에서 옥색 두건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잠자코 두고 보기로 했다.

그녀가 병영 쪽을 보며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훈련을 지휘하고 있던 교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범석이었다. 이범석은 모자를 벗어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이범석과 악수를 나눴다. 둘이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문 밖에서 흙먼지를 터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크와 동시에 이범석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 말을 타고 온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오신 백주원 동지입니다."

그녀는 김좌진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법무부장 신규식 선생의 연락관입니다."
"아, 신규식 선생님 언제나 한 번 뵙고 싶은 분인데."

백주원은 서일에게 안내되었다. 서일은 신규식의 안부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눈물이 쑥스러웠던지, "역시 예관 선생은 문장과 글씨가 다 출중하시다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김좌진은 보며 "예관 선생은 우리 김 장군처럼 한시에 조예가 깊으시답니다"라고 말했다.

"그 분은 이미 중국에도 시인으로 알려지신 분이고 저는 그에 비하면 소꿉놀이 수준입니다."

김좌진의 한시 실력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평이 나 있었다. 백주원은 그가 겸손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김좌진이 말한 소꿉놀이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그 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름은 가물거리지만 양지 바른 곳에서 소꿉놀이 하던 소꿉동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김좌진은 나름대로 유머가 있는 청년이었다.

"조국이 가장 그립고 다음으로는 여자가 그리웠는데 조국의 여자를 만나니 두 갈증이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김좌진은 대체로 순박한 인상이지만 이마와 카이저 식 수염에 강한 의지가 묻어 있었다.

이범석은 민필호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민필호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백주원은 그들이 신규식의 집 아래층에서 함께 형제처럼 지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민 동지는 결혼하셨어요."

이범석은 민필호가 신규식의 딸과 결혼했다는 말을 듣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겉보기에는 그런 것 제일 안 할 것 같은 사람인데."

백주원은 이범석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민필호처럼 성실하고 무난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자기 것을 빨리 챙기는 경향이 있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김태수를 생각했다. 실속 없기로는 김태수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주원은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이려 한다는 정보를 전했다. 김좌진 측에서도 다른 정보망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려워지면 언제나 상해로 오시라는 신규식의 말을 전달했다. 동지들을 놓아두고 올 수는 없는 것이니 젊은 사람들은 오지 말고 서일이나 김규식 같은 원로들은 오셔서 나라 일을 함께 하자는 것이 신규식의 요망이라고 그녀는 전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두꺼운 봉투를 내놓았다.

"김태수 선생이 북로군정서에 내시는 겁니다."

백주원은 김태수가 아주 잘 알려진 사람이나 된다는 듯이 그의 이름 석 자만 말하며 봉투를 건넸다. 예상대로 아무도 김태수를 모르는 것 같았다.

김좌진이 말했다.

"제가 견문이 좁아 그 분을 저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이 누구신지요?"

그러자 서일이 말했다.

"사실은 나도 모른다오."
"경성 숭교방에 사는 거부 김인용의 아드님이십니다. 지금 상해에서 함께 일하는 동지이기도 하고요."

서일은 이렇게 많은 군자금을 한 번에 낸 사람은 아직껏 없었다고 말했다. 김좌진은 김태수의 나이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김태수, 김좌진, 백주원 셋이서 동갑이었다. 김좌진은 김태수에게 우정의 표시로 전해 달라며 작은 칼 하나를 백주원에게 주었다. 금동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진기해 보이는 칼이었다.

저녁에 독립군 병영에서는 대규모의 회식이 벌어졌다. 모처럼 술과 고기가 풍성하게 제공되었다. 백주원은 김규식을 비롯한 간부들이 고기를 바삐 먹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간부들도 저렇게 굶주릴 정도라면 젊은 병사들의 식생활은 오죽하랴 싶어서였다. 회식이 끝나고 오락회가 벌어졌다. 오락회는 독립군가의 합창으로 시작되었다.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이 때를 기다리는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군사여
자유 독립 광복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 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세 낙화같이 떨어지리라

독립군의 백만 용사 달리는 곳에
압록강 어별들이 다리를 놓고
독립군의 붉은 피가 내뿜는 때에
백두산 굳은 바위 길을 열리라

독립군의 날랜 칼이 빗기는 날에
현해탄 푸른 물이 핏빛이 되고
독립군의 벽력같은 고함 소리에
부사산 솟은 봉이 무너지누나.

*어별: 물고기와 자라
*부사산: 일본의 후지산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태그:#김좌진, #서일 , #북로군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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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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