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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8일까지 매주 월요일 아침에 배달되였던 '문학집배원 안도현의 시배달;
 지난 4월 28일까지 매주 월요일 아침에 배달되였던 '문학집배원 안도현의 시배달;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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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문학광장 [문장]'의 문학집배원인 안도현 시인이 월요일 아침마다 배달해주는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내게 빼놓을 수없는 한갓 즐거움이다.

아 참, 이제는 집배원이 나희덕 시인으로 바뀌었지. 이제부터는 이 새로운 집배원이 배달해 주는 시를 즐길 일이다.

지난 4월 28일, 안 시인은 한 해 넘게 꾸준히 해왔던 시 배달을 마치면서 웬 이름이 낯선 한 시인의 시를 배달해 주었다.

'렴형미- 염씨는 들어보았어도 렴씨라니?'

아, 그러고 보니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성씨이구나. 그러니까 남쪽 식으로 하자면 염씨라는 말이렸다.  

안도현 시인은 이 낯선 이름의 북한 시인이 쓴 이 시를 소개하면서 "심장이 마구 요동쳤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몇몇 생경한 어휘들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진한 인간의 냄새 때문이었습니다"라며 사뭇 감동하고 있다.

자, 그럼 어떤 시인지 '찬찬히' 되씹어 보자.

음악과 함께 시가 흐르고 있다
 음악과 함께 시가 흐르고 있다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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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며
 

                                         렴형미

처녀시절 나 홀로 공상에 잠길 때 며는
무지개 웃는 저 하늘가에서
날개 돋쳐 나에게 날아오던 아이
그 애는 얼마나 곱고 튼튼한 사내였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나에게 생긴 아이는
눈이 크고 가냘픈 총각 애
총 센 머리칼 탓인 듯 머리는 무거워 보여도
물푸레아지 인 양 매출한 두 다리는
어방없이 날쌘 장난꾸러기입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고삐 없는 새끼염소마냥
산으로 강으로 내닫는 그 애를 두고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를 탓 합니다
다른 집 애들처럼 붙들어놓고
무슨 재간이든 배워줘야 하지 않는가고

그런 때면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까맣게 탄 그 애 몸에 비누거품 일구어댑니다
뭐랍니까 그 애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데
정다운 이 땅에 축구공마냥 그 애 맘껏 딩구는데

눈 올 때면 눈사람도 되어 보고
비 올 때면 꽃잎마냥 비도 흠뻑 맞거라 
고추잠자리 메뚜기도 따라 잡고
따끔따끔 쏠쐐기에 질려도 보려무나
푸르른 이 땅 아름다운 모든 것을
백지같이 깨끗한 네 마음속에
또렷이 소중히 새겨 넣어라
이 엄마 너의 심장은 낳아 주었지만
그 속에서 한생 뜨거이 뛰어야 할 피는
다름 아닌 너 자신이 만들어야 한단다

네가 바라보는 하늘
네가 마음껏 딩구는 땅이
네가 한생토록 안고 살 사랑이기에
아들아, 엄마는 그 어떤 재간보다도
사랑하는 법부터 너에게 배워주련다
그런 심장이 가진 재능은
지구 우에 조국을 들어올리기에…

북녘 땅에서 여섯 살배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어머니인 렴형미 시인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80년대 말부터 시를 발표해 왔다. 렴 시인이 1999년 '전국군중문학현상모집'에 내놓은 시초(詩抄) '시련과 녀인'은 1등에 당선 되었다.

북의 고난의 행군 시기, 어렵고 고달픈 나날 속에서 버거운 삶을 살아나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당선작 '시련과 녀인'을 발표한 뒤, 줄곧 여성들의 다양한 삶과 운명을 노래한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북한 문단에서 꽤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마음이 어디 북쪽이 다르며 남쪽이 다를까만, 남쪽의 어머니들 중에도 '아니, 어쩌면 내 마음을 이렇게도 잘 읊었을까'하고 '탁' 무릎을 친 이들이 적잖으려니 싶다.

우리가 지난날 보다는 북한에 대해 좀 더 잘 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한반도의 북쪽에 대해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이를테면 북한의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남쪽 사람들이 여전히 깜깜하다. 고작 안다는 것이 북한의 문학은 맨 저들의 체제를 찬양하는 것일  뿐, 순수문학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렴형미의 시 '아이를 키우며'를 본 남쪽의 독자들이라면 우리가 북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그릇되었나를 금방 깨달았을 것이다.

"이 엄마 너의 심장은 낳아 주었지만/ 그 속에서 한생 뜨거이 뛰어야 할 피는/ 다름 아닌 너 자신이 만들어야 한단다"

남쪽에는 독자보다 시인이 많다고 할 정도로 시인이 많지만, 이만한 울림을 지닌 시를 쓰는 시인이 어디 몇이나 될까? 이처럼 맛깔스러운 말들을 마침맞은 자리에 마침맞게 앉혀놓을 수 있는 시인이 얼마나 될까?  

나는 렴형미의 시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저 북쪽에 살고 있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생각이나 삶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발견, 이 깨달음이 내겐 여간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곳은 획일적인 틀 속에서 온 인민이 한쪽 방향으로만 내몰리고 있는 것으로 알았더니, 지금껏 그렇게만 알고 있었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남과 북이 서로 체제가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경제수준이나 생활환경이 달라서 생각하는 것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와는 생판 다른 줄 알았더니,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구나. 그곳에도 '다른 집 애들처럼 붙들어놓고 무슨 재간이든 배워줘야' 해서 그곳 어버이들도 남쪽 어버이들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경쟁의 굴레를 지니고 있구나.

그런데 부럽다. 북의 저 어머니는 그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노래하고 있으니….

"그런 때면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까맣게 탄 그 애 몸에 비누거품 일구어댑니다/ 뭐랍니까 그 애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데/ 정다운 이 땅에 축구공마냥 그 애 맘껏 딩구는데"

이 시는 오로지 '일류'와 '출세'만을 향해 날마다 아이들을 옥죄고 있는 남녘의 학부모들을 심히 부끄럽게 한다. 그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가 내 것인 양 착각하는 우리 모두의 낯을 뜨겁게 한다.

그래, 그랬지. 우리들은 아이들의 생각과 희망이야 무엇이든 그저 어른의 생각의 틀 안에 아이들을 가둬놓고 어른의 입맛대로 아이들을 길들이고 있었지. 하지만 북쪽의 어머니 시인 렴형미는 다르구나. 누가 뭐라 든, 시어머니나 남편이 뭐라고 닦달을 하든 '그저 못 들은 척'하며 '정다운 이 땅에 축구공마냥 그 애 맘껏 뒹굴게'하고 있으니 그것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남쪽의 어버이들 중에도 북쪽의 저 어머니처럼 아이를 남다르게 키우는 이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하지 못하고 있어 그것이 부끄럽다 아니할 수 없다.

누가 뭐라는 것이 두려워, 행여 내 아이가 경쟁에 처질까 겁이나 아무 소신 없이 그냥 남들 하는 대로 영어로 피아노로 무용으로 논술로 수학으로 '뺑뺑이' 돌리며 아이들 자유를 마구 짓밟고 있는 우리네 짓거리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건 그렇고, '물푸레아지'며 '매출한'이나 '어방없이'·'쏠쐐기'·'한생' 이라는 이 말들이 무슨 말인가?

이처럼 북녘 사람들이 쓰는 어떤 말들을 남녘 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되었으니 분단 60 여 년이 참 무섭다 싶다. 하긴 북녘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남녘 말은 왜 또 없겠나.

이 시에 나오는 낯선 북쪽 말들의 뜻은 이렇다.
 
물푸레아지
[아지]는 '나무나 풀의 원줄기에서 뻗어 나온 줄기'를 일컫는 [가지]라는 말의 북한말이다. 따라서 [물푸레아지]는 물푸레나무의 가지 즉 [물푸레 나뭇가지]일 것으로 짐작된다. 
 
매출한
'흠이나 거침새 없이 곧고 밋밋하다'는 뜻.
 
어방없이
[어림없이]의 북한말. 북한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가 발간한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어방없다]는 '어떤 대상이 어림조차 할 수 없게 도저히 될 가망이 없다' 또는 '터무니없다'라는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쏠쐐기
[송충이]를 일컫는 북한말.
 
한생
[일생(一生)], [평생(平生)]의 북한말.

그렇다고 이 시를 공연히 우리 식으로 '물푸레 나뭇가지처럼 밋밋한 두 다리는'이나 '어림없이 날쌘 장난꾸러기', '송충이에 쏘여보기도 해 보려무나', '평생토록 안고 살아갈 사랑이기에' 따위로 고쳐 읽을 일은 아니다.

시인이 나날의 말살이 속에서 자연스레 써오던 살가운 입말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제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품새가 이다지도 아름다운 것을…

걸핏하면 영어나부랭이나 어디서 들어 온지도 모를 남의 나라말, 아니면 한자말 쓰기를 좋아하는 남녘의 윤똑똑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지만 예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써오던 우리 토박이말이 이리도 곱고 맛깔스럽다는 것을 이 시는 일깨워주고 있다.


태그:#렴형미, #아이를 키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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