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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길  이 길은 부산의 동구 중구 서구를 아우르는 산등성이를 따라 끝없이 이어져있다.
▲ 산허리길 이 길은 부산의 동구 중구 서구를 아우르는 산등성이를 따라 끝없이 이어져있다.
ⓒ 전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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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산복(山腹)의 복자를 배 복(腹)자로 썼지만, 실상은 산의 허리를 베어 길을 내었으니 '산허리길'인 셈이다.

오랜만이다. 실로 오랜만이다. 1990년대 초에 이곳을 떠났으니 어느새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 다시는 오지 않을 듯 훌쩍 떠났던 여기를 다시 와서, 멀리 눈에 와 닿는 부산 앞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자니 지난날의 추억들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떠오른다.

내 소년 시절과 젊은 날을 보냈던 이곳을 내가 다시 찾은 것은, 부산시가 '도시재생마을전문가양성사업'의 일환으로 신라대학교에 위탁해 개설한 '마을전문가과정'의 제2기 교육생으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교육을 받다 보니 문득문득 산복도로 위, 아래를 헤매고 다녔던 내 유년의 아린 상처들이 되살아나기도 했거니와, 내가 바람직한 마을전문가로 활동하자면 아무래도 부산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는 산복도로와 산동네를 더 속속들이 들여다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내년에는"... 우리집 형편은 끝내 펴지지 않았다

옛 산복도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산복도로 위 아래 산동네는 이랬다.
▲ 옛 산복도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산복도로 위 아래 산동네는 이랬다.
ⓒ 부산광역시 동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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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정동 산동네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그 전에 시내 도심인 대청동에서 살면서 그 곳 남일국민학교(지금의 광일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우리 집 형편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그랬으나 아버지가 당시로서는 꽤 반반한 직장이었던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지금의 대한통운 전신)'을 퇴직한 뒤 시작한 사업이 곤두박질을 치면서 서서히 가세가 기울게 됐다. 먼저 도심에서 한참 먼 당감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이 우리 집 가난한 가족사의 서막이었다. 당감동은 그 당시만 해도 논밭이 널려있는 한적한 외곽 지대였었다. 그렇게 옮겨간 당감동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영주동 산동네를 거쳐 1950년대 말 마침내 수정동 산꼭대기까지 올라오게 됐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6남매. 모두 아홉 식솔이 고단한 삶의 둥지를 튼 곳은 수정초등학교에서 성북고개를 치오르는 길 왼편의 산비알(산비탈) 해발 100m, 수정5동 419번지였다. 아버지는 그 곳에 ㄱ자로 흙벽돌을 쌓아올리고, 베니어공장에서 흘러나온 베니어 자투리를 그저 줍다시피 해 그것을 지붕에 겹겹이 얹었다. 그만해도 꽤 번듯한 보금자리였는데 나중에는 벽에다 흰 페인트칠까지 해 우리 집은 동네에서 '하얀 기역자집'으로 불렸다.

나는 거기서도 학교는 줄곧 대청동의 남일국민학교를 다녔었다. 비록 가세는 기울었어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서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철저한 일류주의자이셨다. 당시 남일국민학교는 영남의 최고 명문이었던 경남중학 합격률이 가장 높은, 말하자면 국민학교의 명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경남중학에 합격을 하고서도 입학은 할 수 없었다.

'내년에는…' '내년에는…'하던 우리 집 형편이 끝내 펴지지 않았던 탓이다. 내 진학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렵사리 경남중학을 졸업한 형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부산여고를 다니던 누나도 겨우 2학년을 마치고는 공부를 접고 말았다.  

그 때는 참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쳐다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괴로웠다. 그리고 자꾸만 뭔지도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던 내가 그 무렵 우연히 시인 '살매 김태홍'의 시 '춘한(春恨)'을 발견했다.

다들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던 날/ 짚신을 신은 소년은/ 뒷산에 올라 개미싸움을 붙이고/ 매양/ 이기는 놈은 모조리/ 손톱으로 문질러 죽였다.// 땅거미 차차 짙어/ 소나무에 기대어 서니/ 깜깍깜박/ 애기 별도 느껴 울었다.

어찌 이리도 내 심정을 잘 표현했나 싶어 나는 이 시를 뇌고 또 뇌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 수 없이 치밀어 오르던 마음 속의 분노도 가라앉고,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보통의 산동네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동네 아이들은 대체로 조숙한 편이었다. 아마도 국민학교만 간신히 졸업하면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탓이었을 게다.

'빨간 마후라' 부르며 동네 휘젓고 다녔는데, 어디선가...

그런 '애어른'들과 한통속이 되며 나는 일찌감치 담배도 배우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금은 술과 담배는 근처에도 안 가지만 그 때, 귀때기에 피도 안 마른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작한 술 담배를, 나는 이십대 초반까지 줄기차게 해댔다. 처음에는 홀짝홀짝 마시던 술을 나중에는 마음 맞는 벗을 만나면 밤새 통음(痛飮)할 정도의 술꾼이 된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64년에 영화 <빨간마후라>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누구의 입에서나 영화의 주제가 '빨간마후라'가 열창되던 때, 우리 산동네 사내아이들도 곧잘 '빨간마후라'를 흥얼거렸다. 그날따라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 했던 우리들이 해가 넘어가자마자 술잔을 기울인 것이 밤이 깊어서는 꽤 거나해졌다.

취기에 객기까지 보태 우리들은 앞 아이의 엉덩이에 머리통을 들이대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서는 목청껏 '빨간마후라'를 부르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때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함께 노래를 부르던 대열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언제나 행동이 굼떴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목 뒷덜미가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었다. 동네 파출소 순경 아저씨였다. 파출소는 그때 우리가 아리랑고개라 불렀던 고개의 고갯마루에 있었다.(지금은 그 고개를 성북고개라 부른다던가?)

나를 파출소까지 끌고 간 순경 아저씨는 파출소 구석에 나를 꿇어앉히고는 양 팔을 번쩍 들고 있게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되었을까. 파출소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파출소 안으로 들어오셨다.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하셨던 아버지가 순경에게 뭐라고 사정을 하셨던지 순경은 갑자기 끌끌 웃으면서 내 머리에 알밤을 두어 방 먹였다. 그렇게 나는 훈방이 되었다.

잘못한 일에는 사정없이 경을 치셨던 아버지는 내 한 발 앞을 뚜벅뚜벅 걸어가시기만 할뿐,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집에 다 다다라서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시면서 "자거라"라고 하신 것이 그날 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의 전부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 마음이 몹시도 아프다는 것을 아셨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내 한 발 앞을 걸으시면서 가만히 속눈물을 지으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술이라도 한 잔 드시면 "머리 좋은 내 새끼들, 내가 앞길 다 망쳐 놓았다"고 하시며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나는 비록 어렸지만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저렇게 한탄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실꼬?' 싶어서 그런 날은 자꾸만 명치끝이 아렸다. 그렇게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 학교 못 가는 내 가여운 처지도 잊게 되었다. 가방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산동네에서 나는 세상을 배워나갔다

산동네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배움이란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새벽녘, 도시락을 들고 일터로 갔던 친구 아버지들이 저녁 어둠살이 낄 무렵 새끼줄에 꿴 연탄 한두 장을 들고 힘겹게 까꼬막(언덕배기)을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아침에 장사 나갔던 엄마들이 하루 끼니를 에울 쌀(또는 보리쌀) 한 봉지와 저녁 찬거리를 머리에 이고 동네 어귀를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세상을 배워나갔다. 그런 것들은 학교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다 여유 돈이 생기면 보수동 헌책방 골목으로 달려가 책을 사는 것은 그 시절의 한갓 즐거움이었다. 또 굳이 돈 들여 사지 않더라도 내 손에 잡히는 책이 있으면 그것들을 마구 읽었다. 그런 책들 중에는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도 있었고,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닥터 지바고>도 그 때 읽은 책들이다.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집>은 읽고 또 읽고 몇 번을 되풀이 해 읽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것들을 무슨 뜻을 알고 읽기야 했겠냐만 책을 읽는 것은 내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한 수단이기도 했다. 철 지난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 <현대문학>, <뿌리 깊은 나무> 같은 묵은 잡지를 구해 읽는 것도 꽤나 짭짤한 재미였다.   

그 즈음에 나는 나름 문학에의 꿈을 키우고 있던 중이어서 닥치는 대로 글을 쓰기도 했다. 더러는 유수의 중앙 일간지 '독자투고란'에 투고한 글이 신문에 실려 주위의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내 글이 난 신문을 오려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면서 만나는 친지나 지인들에게 "내 둘째 놈이 이런 글을 신문에 냈다"며 자랑을 하셨다.

나중에 그 신문이 다 헤져 신문의 글자가 잘 안 보일 때까지 아버지의 자식 자랑은 끊이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내 자랑을 하고 다니시는 것이 짐짓 좋았다. 아버지에게 내 글은 "굳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이 자식이 이 정도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문리는 트였으니, 아버지 이제는 그리 푸념을 안 하셔도 됩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그랬다. 내게 산동네는 '울타리 없는 학교'였다.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나는 배울 수 없었지만, 학교 아이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을 나는 이 산동네 학교에서 배웠던 것이다. 늘 배움이 고픈 내게는 모든 것이 스승이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한 조각도 내게 뭔가를 가르치는 것 같았고, 길섶의 민들레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의 허허로움을 메울 수 있었다. 한 때는 한가락 하셨을 것 같은 친구 아버지의 서늘한 눈매나, 아랫마을 욕쟁이 할매의 입담 좋은 사설에도 무슨 가르침이 있어 보였다.

계단 길고 가파른 계단들이 산복도로 위 아래를 이어주고 있다.
▲ 계단 길고 가파른 계단들이 산복도로 위 아래를 이어주고 있다.
ⓒ 전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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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흉허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집의 안 좋은 소식은 온 동네의 슬픔이었고, 누군가의 기쁨은 동네 모두의 경사였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동네 청년 중에 그림 솜씨가 빼어난 한 청년이 있었다. 아무에게서도 그림지도를 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는 무엇이든 한 번 보기만 하면 실물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는 재간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1962년 6월에 일어난 제3차 화폐개혁 이후의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가 새로 나온 5000원권을 한번 그려보라고 청년을 꼬드겼다. 몇 차례 사양을 하던 그는 마침내 그림을 그렸다.

'과연!' 그가 그린 5000원은 누가 봐도 진짜 돈 그대로였다. 그러자 짓궂은 친구들이 이걸 한 번 시험해 보자며 과일가게로 그의 등을 떼밀었다. 얼떨결에 수박 한 통을 든 그는 자기가 그린 5000원을 쓱 내밀었다. 과일장수는 아무 의심 없이 5000원을 받아들였지만, 그 과일장수에게는 수박 한 통 값을 제하고 내주어야 할 거스름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바꾸러 간 이웃가게에서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 가게의 눈썰미 있는 젊은 친구가 그 돈을 밝은 불빛 아래 이리 비춰보고 저리 비춰본 끝에 그만 가짜 돈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곧장 파출소로 전화를 걸었다. 안 그래도 새 돈에 대한 위조지폐가 나돌까 싶어 경계가 심하던 화폐개혁 직후여서 청년은 곧장 경찰서를 거쳐 검찰에 붙들려갔다. 꼼짝없이 위조지폐범이 되어 징역을 살아야 할 판국이었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동네 어른들은 어떻게 하든 재간 있는 아이를 구해 내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모두가 하는 말이 이 아이의 재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본시 이 아이는 착하디 착한 아이로 그런 나쁜 짓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동네에서는 한다 하는 문장가였던 내 아버지가 심금을 울리는 탄원서를 쓰고 거기에 온 동네 어른들이 꾹꾹 도장을 눌렀다. 돈으로 변호사를 살 형편이 못 되었던 터라, 믿을 것은 오직 탄원서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가 쓴 그 탄원서가 판사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얼마 뒤에 청년은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어른들은 돌아온 청년을 이녁들의 아들이라도 되는 양 반기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만, 청년은 동네에서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산동네에서 세상을 배우면서 생각이 여물어 갔다. 함께 나누어야 할 이웃의 아픔이 있다는 것도 산동네에서 알았고, 누군가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곧 내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는 것도 산동네가 가르쳐 주었다. 제도권교육이라곤 6년밖에 안 받았으면서도 오늘날 내가 인생의 아픔과 그 복잡한 구조를 이만큼이라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산동네의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

나는 비교적 나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만약에 내가 가질 것을 다 가졌더라면 나는 필경 몹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날카롭고, 싸늘한 인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내가 너무 뻣뻣하지 않고, 다소나마 고분고분한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산동네에서 겪은 가난과 결핍과 약함과 무능의 덕분이다.

눈앞에 펼쳐진 부산 앞 바다 고층빌딩들이 눈앞을 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앞에 펼쳐지는 앞 바다는 여전히 시원하다
▲ 눈앞에 펼쳐진 부산 앞 바다 고층빌딩들이 눈앞을 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앞에 펼쳐지는 앞 바다는 여전히 시원하다
ⓒ 전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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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런 산동네를 떠난 것은 1970년대에 불량 주거지에 대한 정책이주가 시작되면서 산동네의 집들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본시 국유지인 땅에 임의로 터를 잡았으니, 떠나라면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산동네 주민들의 처지였다. 그래도 반여동 등지에 연립주택을 지어 집단이주를 시켰으니 그나마 고맙다면 고마운 일이랄까.

그러나 그 연립주택이라는 것이 뼈대만 세워 놓은 것이어서 그것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저마다 재주껏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처럼 그만한 능력도 없는 상당수의 세대들은 이주지 입주권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그때부터 속절없이 새로운 셋방살이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산동네에 살 때는 비록 다 헐은 누옥이었을지언정 마음 편히 살 수 있었는데, 방세 헐한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다녀야 하는 셋방살이의 삶은 여간 고달프지 않았다.

그렇게 수정동을 떠나 울산으로 마산으로 대구로 양산으로 흘러 다니다 1980년대 중반에 또 한 번, 수정동 산자락으로 비집고 들며 수정동 산동네와의 모진 인연을 이어가던 끝에 1990년대 초에 그곳을 떠난 뒤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하마 20년 세월이 성큼 지났다. 다시 찾은 산복도로! 그리고 그 산동네! 그 옛날 내 살던 자취는 사라지고, 새로 들어선 집들은 제법 번듯한 외양을 갖췄다. 하지만 마을과 마을을 가로 세로로 잇던 골목과 비탈길과 가파른 계단은 옛 그대로다.

얼핏 보면 변한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예나 별반 다를 바 없다. 바다를 내려다 보자니 그 때는 없던 고층빌딩들이 눈앞을 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앞에 펼쳐지는 앞 바다는 여전히 시원하다. 나는 내친 김에 수정동을 지나 초량과 영주동 보수동을 거쳐 대신동에 이르는 산복도로 일대를 두루 섭렵했다. 지난날에는 없었던 '유치환의 우체통' '장기려 기념관' '금수현의 음악살롱' '김민부 전망대' '이바구공작소' 등이 새롭다.  

산복도로에 불고 있는 '산복도로 르네상스' 바람

전에는 없던 것이....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치환의 우체통’ ‘금수현의 음악살롱’ ‘김민부 전망대’ ‘장기려 기념관’
▲ 전에는 없던 것이....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치환의 우체통’ ‘금수현의 음악살롱’ ‘김민부 전망대’ ‘장기려 기념관’
ⓒ 전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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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곳에는 바야흐로 '산복도로 르네상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1970년대의 개발 바람이, 있던 것을 때려 부수고 살던 사람을 내쫓는 바람이었던데 비해 오늘의 새 바람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 것이라니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이는 지난날의 개발이 가져다준 한계에 대한 물음에서 얻은 해답일 것이다.

'제2기 마을전문가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우리들의 공부가 끝나는 9월이 되면 우리 중의 누군가에게는 이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바라건대 내게도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내가 참여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보탤 수 있는 나의 재능은 무엇일까?' 둘러보니 이곳에는 더러더러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들이 보인다. 그것들을 잘 손질하면 제법 쓸 만한 소극장이 될 수 있을 듯싶다. 여기다가 이곳 사람들의 이바구를 풀어놓는 것은 어떨까? 이곳 사람들의 넋두리도 좋고, 이웃 간에 얽힌 아기자기 소소한 사연들도 괜찮겠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바구에 살짝 전문가의 손이 미치면 꽤 괜찮은 연극 한 편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시낭송무대는? 한 주에 한 번이나 두세 주에 한 번, 사람들이 어울려 시도 읊고 악기도 연주하고 함께 노래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젊은 한 때 연극에 열정을 불태웠던 적도 있고, 전국 시낭송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나이다 보니 쉬운 양 이런 생각들을 해 본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 뛰어들어 보면 모든 게 그리 만만치는 않으리라. 그래서 남은 교육기간 동안 더욱 정진하여 내공을 쌓을 일이다. 어쨌거나 산복도로에 불고 있는 '산복도로 르네상스' 바람이 르네상스라는 말뜻 그대로 부산의 가장 부산다운 모습을 지닌 산복도로의 '문예 부흥'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위의 글은 부산시가 산복도로 개통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산복도로 여행체험수기 공모전에 출품해 장려상을 수상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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