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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다산 정약용(왼쪽). 드라마 <이산>.
 <이산>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다산 정약용(왼쪽). 드라마 <이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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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지시에 아랑곳없이 공을 던지다가 관중석에 있는 ‘감독의 부인’에게 데드볼을 던진 ‘에이스 투수’ 홍국영이 강판되고, 감독이 총애하는 모범생일 뿐만 아니라 감독과 ‘정치적 운명’까지 함께하게 될 ‘신인투수’ 정약용이 등판했다. 경기 종료 1~2회 정도를 남긴 상태에서 정약용이 드라마 <이산>의 마무리 투수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산 제67회(5월 6일)의 후반부에서 첫 선을 보인 정약용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정약용의 개성·재능 및 정조와의 관계가 몇 가지의 상징적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왕이 내준 시험문제에 이름도 안 쓴 채 훌륭한 답안을 적어 넣고는 남몰래 담을 넘어 성균관을 빠져나오다가 미행 중인 정조를 만난 정약용. 이 설정은 유교적 정형에서 다소 일탈된 정약용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약용이 다닌 성균관의 강당인 명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정약용이 다닌 성균관의 강당인 명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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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정조와 함께 고리대업자들의 헛간에 갇히게 되자, 망원경 같은 것으로 바깥을 살핀 뒤에 화약 대신 밀가루로 폭탄을 만들어 헛간 문을 폭파하고 도주에 성공한 정약용. 이 설정은 유교적 지식인이면서도 한강 배다리와 수원성 설계, 거중기 제작 등의 실용적 능력을 과시한 정약용의 다재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리대업자들의 소굴에서 벗어난 뒤에 정조와 나란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정조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관상이나 사주로 봐서는 천하를 호령할 인물인데”라며 짓궂은 장난을 한 정약용. 이 설정은 정조시대의 모범생으로서 주군의 각별한 총애를 받다가 주군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한 정약용과 정조의 특수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약용의 등장을 계기로 <이산>의 잔여분에서는 정조 이산의 개혁정치를 상당히 압축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열 살 차이인 정조(1752년 출생)와 정약용(1762년 출생)의 콤비 플레이가, 홍국영이 빠진 <이산>의 명운을 좌우하게 될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약용의 동상.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유적지 소재.
 정약용의 동상.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유적지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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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이산> 제67회에서 정조와 정약용이 드디어 첫 만남을 가졌다. 능력은 홍국영보다 훨씬 더 탁월하면서도, 사심은 홍국영보다 훨씬 더 적은 정약용이 정조의 곁에 다가섰다. 최측근 홍국영을 내친 ‘적적한’ 정조 임금에게 그야말로 ‘물건 중의 물건’이 굴러들어온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2세 때인 정조 7년(1783)에 성균관 유생이 되고 경의진사(經義進士)의 신분으로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기 이전까지 정약용은 어떻게 살았을까? 성균관 유생이 되기 이전까지의 그의 삶 속에서 정약용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세 가지 키워드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나?

정약용 집안은 고조 이후 삼대가 포의(布衣, 관직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난 집안이었다. 아버지 대에 와서 진주목사나 호조좌랑 등을 지내긴 했지만, 그의 집안은 이미 권력의 중심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 있는 가문이었다.

이처럼 집안이 당시의 권력 중심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약용이 보다 더 자유롭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논문도 있다. 성균관 유생 출신이면서도 서학이나 실학 등 다양한 사상에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792년에 정약용이 왕명을 받아 제작한 거중기의 모형(실제보다 축소). 1627년에 독일인 선교사 슈레크가 저술한 <기기도설>에 실린 그림을 보고 고안한 것으로서,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에 사용되었다. 다산 유적지 소재.
 1792년에 정약용이 왕명을 받아 제작한 거중기의 모형(실제보다 축소). 1627년에 독일인 선교사 슈레크가 저술한 <기기도설>에 실린 그림을 보고 고안한 것으로서,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에 사용되었다. 다산 유적지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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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어떤 지식인들과 접촉했나?

또 다른 논문에 따르면, 호조좌랑이 된 아버지를 따라 한성에 올라온 15세 이후로 정약용은 이승훈·이가환을 통해 18세기 전반의 대표적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763년)의 저서와 접촉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영세교인인 이승훈(1756~1801년)은 정약용의 매부였고, 이익의 종손으로서 문장가로 이름 높던 이가환(1742~1801년)은 이승훈의 숙부였다.

정약용이 10대 중반 이후에 책을 통해 접하게 된 성호 이익은, 실사구시의 과학적 태도를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에 대해서까지 창조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이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의 숙부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이 자연스레 실학에 접촉할 수 있는 집안 배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정약용은 실학의 한 조류인 북학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졌다. 박지원·홍대용·박제가 등이 바로 북학파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만주족 청나라의 문물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는 입장을 보이는 한편, 서학(서양학문)은 취하되 서교(천주교)는 배제하자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실학에 뜻을 두라’는 취지로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보낸 글. 유교 경학을 밑바탕으로 한 뒤에 실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정약용의 인식이 드러난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실학에 뜻을 두라’는 취지로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보낸 글. 유교 경학을 밑바탕으로 한 뒤에 실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정약용의 인식이 드러난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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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어떤 종교와 접촉했나?

어느 연구에 따르면, 정약현(정약용의 큰형)의 첫째 부인인 이씨가 어린 정약용을 극진히 아꼈고, 정약용 역시 이씨 부인에게 어리광을 부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형수에게 심리적으로 크게 의존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씨 부인의 남동생이 바로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리연구자인 이벽(1754~1786년)이었다. 이벽은 1785년에 적발된 이후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자살을 고민하던 끝에 배교의 글을 쓰고 돌아섰다가 1786년에 페스트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사람이었다.

그 이벽이 결혼한 누나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에 정약용 형제들과도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누나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이 지난 1784년에 정약용 집안의 제사에 참석했다가 의식이 끝난 뒤에 정약용 등과 천주교 서적을 읽은 일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정약용은 형수의 남동생을 통해 천주교 교리에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그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정약용이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 정조와 그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정약용이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 정조와 그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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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진사의 신분으로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기 이전까지 정약용은 지금까지 소개한 몇 가지의 환경에서 삶을 살다가 정조 임금을 만났다. 정조 임금을 만나기 전에 정약용의 옷에는 정통 유학뿐만 아니라 실학도 묻어 있었고 천주교도 묻어 있었다.

정약용은 엄연한 유학적 엘리트였지만 정통 유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지식인이었다. 그는 유학적 지식인인 동시에 르네상스적인 만능인의 모습을 띤,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 그것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정조 임금의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조선사회가 그만큼 질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조선왕조의 위기를 구할 수 없다는 절박한 사회적 인식이 없었다면, 정약용 같은 새로운 지식인이 정조의 최측근에 다가서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약용 발탁은, 정조 임금이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간파한 데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태그:#이산, #정약용, #정조, #실학, #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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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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