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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홍국영과 효의왕후. 드라마 <이산>.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홍국영과 효의왕후.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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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왕후 대 홍국영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이산> 제65회(4월 29일)에서는 효의왕후가 홍국영의 약점(왕대비와의 비밀접촉)을 확보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홍국영이 효의왕후 독살을 기도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효의왕후에 대한 독살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홍국영은 '이제 새로 시작한다!'는 결의를 굳혔다. 주군에 대한 충성을 일신(一新)하기 위해 주군의 부인을 죽이고 새로 시작한다? 웬만한 사람은 갖기 힘든, 참 독특한 가치관이 아닐 수 없다.

홍국영이 효의왕후(고종 때 황후로 추존)를 한편으로 미워하고 한편으로 무시했다는 점은, 그가 효의왕후의 불임치료까지 반대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재 <이산>에서 방영되고 있는 시대적 배경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정조 2년(1778) 이후의 일이었다.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에서 오래도록 자녀가 생기지 않자, 후사문제를 놓고 조정과 왕실에서 설왕설래가 있던 때였다.

이때 홍국영은 자기 여동생(원빈 홍씨)을 정조의 후궁으로 적극 지원했다. 홍국영이 이것을 기회로 삼아 다음 지존의 외숙부가 되려 했다는 점은 드라마 <이산>을 통해서도 이미 충분히 강조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눈치 없게' 홍국영의 비위를 건드린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박재원(1723~1780년)이었다. 영조 50년(177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그는 홍문관지평·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을 거쳐, 원빈 홍씨가 입궁할 시점에는 사간원헌납(정5품)으로 재직했고 2년 뒤인 1780년에 홍문관 교리(정5품)로 생을 마쳤다.   

박재원이 홍국영의 비위를 건드린 것은 그가 효의왕후에게 양의(良醫)를 붙여주자는 제안을 올렸기 때문이다. <정조실록> 정조 2년(1778) 6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사간원 헌납 박재원이 중전의 불임증을 치료하기 위해 양의(良醫)를 고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민간에서도 불임여성이 오랜 치료를 통해 가임여성이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중전에게도 그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 건의는 한편으로는 중전의 불임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홍국영 남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성격 급한 홍국영이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위의 <정조실록>에서는 "홍국영이 공식석상에서 화내고 꾸짖으며 필시 (박재원을) 중상하려 했다"(國榮公座怒詬必欲中傷)고 한다. 홍국영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상황 속에서 정조 임금이 효의왕후에게 양의를 붙여주기는 힘들었다. 결국 정조도 "(이는) 의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증세가 아니다"(非醫藥所治之症也)라며 박재원의 건의를 물리쳤다.

효의왕후의 불임치료까지 반대한 홍국영. 드라마 <이산>.
 효의왕후의 불임치료까지 반대한 홍국영.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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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원의 건의에 대해 홍국영이 발끈한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박재원이 중전에게 양의를 구해주자고 한 배경에는 홍국영의 세도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홍국영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재원의 건의는 신하의 입장으로서 쉽게 반대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박재원이 어떤 의도에서 건의했건 간에, 그 내용은 주군의 부인인 중전의 불임증을 치료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신하 된 사람이 함부로 반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홍국영이 공식석상에서까지 박재원을 비난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는 그만큼 홍국영이 중전을 미워하는 한편 무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중전의 불임증을 치료하기 위해 좋은 의사를 붙여주자는 제안까지 결국 무산시킨 점, 또 원빈의 양자인 이담(완풍군 혹은 상계군)을 정조의 후사로 세우려 한 점 등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홍국영이 어떻게든 효의왕후의 몸에서 정조의 후사가 출생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점이다. 자신과 무관한 효의왕후의 몸에서 혹시라도 후계자가 출생하면, 홍씨 가문의 세도에 부정적 영향이 생기리라는 계산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효의왕후에게 양의를 붙여주자는 제안에 대해 정조 임금이 당시에는 거부 입장을 밝혔지만 그것이 정조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점은, 훗날 정조 재위기에 박재원이 홍문관부제학(정3품)으로 추증된 데에서 드러난다.

정조 임금 역시 박재원의 충정을 잘 알면서도 부득이하게 그의 제안을 배척한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부인의 불임증을 치료하자고 나선 박재원을, 정조 임금은 속으로는 고맙게 생각했던 것이다. 박재원의 건의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결코 '위험'한 일이 아니지만, 홍국영의 세도 하에서는 정말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홍국영이 죽고 난 뒤에 정조가 박재원을 홍문관부제학으로 추증한 데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건의를 올린 박재원에 대한 고마움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순조실록> 순조 21년(1821) 8월 7일자 기사에 수록된 '효의왕후 행장'(행장은 망자의 일생을 기록한 글)에서도 "홍국영이 패한 후에 (정조가) 특별히 박재원의 관직을 추증함으로써 그 충성을 드러내었다"(國榮敗特贈在源官以旌其忠)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예들을 통해, 정조 임금도 홍국영의 전성기 때에는 홍국영 앞에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전의 불임증을 치료하기 위해 좋은 의사를 붙여주자는, 이 너무도 당연한 제안을 올린 박재원에 대해서까지 공식 석상에서 비난을 퍼부을 만큼, 홍국영은 효의왕후를 한편으로는 미워하고 한편으로는 무시했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에 하나라도 효의왕후가 임신을 하는 날에는 자신의 세도가 무너질 수 있다'는 홍국영의 과도한 우려가 낳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태그:#이산, #정조, #홍국영, #효의왕후, #박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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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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