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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는데 같이 먹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질문은 언제나 "어디서 왔느냐?"로 시작된다. 유럽인이 아시아인을 볼 때면 국적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유럽인의 국적과 얼굴을 잘 맞추지 못한다. 나는 그가 이탈리아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루마니아에서 왔다고 한다.
 
길에서 얻어 먹는 입장이 부끄러워 중국이나 일본으로 속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사실 더 부끄러운 일이다. 민간 외교관이라 불리는 여행객 입장에서 대답하기는 어려웠지만 자랑스럽게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북쪽인지 남쪽인지 잘 몰랐다. 남쪽이라고 다시 알려준다.

내 국적을 말하자 루마니아에 미술 유학 온 한국친구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화할 때 공통분모를 찾아간다. 그는 내게 루마니아도 여행할 계획이 있냐고 물었는데, 아마도 갈 것 같다고 답했다. 내 답은 '그렇다'였지만 대화는 거기서 싱겁게 끝났다. 내가 루마니아에 간다고 해서 별다른 도움이 되주거나 할 수 없는 처지여서 일까?
 
 
▲ 길 밥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스파게티.
ⓒ 정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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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 밥을 그렇게 해결하고 다시 골목을 헤집고 다녔는데 이곳저곳에 그 밥그릇들이 놓여있었다. 같이 밥 먹었던 형님들이 멀리 가서 먹기도 하고 걸어 다니면서 먹기도 했나보다.

 

길을 따라서 한참을 걸었다. 땡볕에서 한 4시간 쯤. 더 이상 가기 힘들만큼 걸었다. 나는 갖고 있던 지도에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길을 물어봐도 똑바로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다.

 

관광지도 밖에서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에 들어섰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리처럼 영어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는지. 대체로 영어를 잘 못했다. 유명 관광지 근처에서는 간단한 수준이라면 3, 4개국어 하는 상인들도 많았지만 벗어나면 아니다.

 

그제서야 관광지가 아닌 걸 알았는데 시내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지도 밖으로 나와 일상을 살아가는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 들어왔다. 불안했다. 꽁짜로 얻었다는 게 문제였는데, 미리 미리 좋은 지도 샀더라면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고, 재미있는 여행이 됐을텐데 아쉬웠다. 아무리 아낀다해도 아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 간다.

 

수퍼마켓을 찾기 어려웠다. 길을 물어보려고 바에 들어가서 물을 주문했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내가 실수로 주문한 물은 탄산수였다. 맛도 익숙치 않았지만 탄산이 든 음료수를 끊은지 1년이 넘어서  먹어도 될지 고민스러웠다.

 

찌뿌둥한 얼굴으로 바리스타에게 물 맞나고 물어봤다. 못 알아듣는다. 옆에 있던 손님이 통역해줬다. 그녀는 필리핀 이민자였다. 서구인은 영어를 못 하고, 아시안 둘은 영어를 하는 이상한 상황이다. 다행히 바리스타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미 개봉한 물을 교환해 줬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몰라 더 불안했다. 비행기에서 이탈리아어 읽는 법을 연습해서 '네, 아니오. 감사합니다.' 정도는 알았지만 무용지물인 상황이었다. 여행 안내서에 나와있는 단어 몇 시간 외운다고 사용 가능한 언어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구석구석 구경을 하다보니 동네에 있는 작은 공원에 다다랐다. 거기도 낙서들이 많았다. 이만하면 많이 왔다 생각하고 내 이름도 하나 적고왔다. 거기가 로마 끝이라 생각하고, 작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마는 기차타고 몇 정거장 더 나가야될 만큼 큰 도시라고 하니 그나마도 나름은 한 복판이었던 것이다.

 

중앙역 쪽으로 되돌아 오는 버스를 타려는데 탈 줄 몰라 당황스러웠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서 걸어갈 엄두도 안났지만, 길도 제대로 몰랐다. 그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에는 '아르젠티나'랑 '베네치아'가 써있었는데, 둘 중에 어느 곳으로 가는지 몰랐다. 그게 적응이 안됐다. 버스가 생긴 건 시내버스 같은데 왜 다른 지명이 써 있는지 이해가 안됐는데, 강남에 있는 '테헤란로'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떼르미니역 이라고 썼더라면 쉬웠을 것을.

 

그런 것들을 몰랐기에 옆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현지인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못 들은척, 모른척 한다. 모른척을 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영어를 쓰는 것이 실례라던데, 혹시 영어로 물어봐서 화가 났나? 하지만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꽉 찬 표정 또한 아니었다. 내가 말이라도 걸까봐 부담스러운 것처럼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 언어 구사능력에 따라 대화 중에 일종의 서열 같은 게 생겼다. 선생님을 어려워하는 학생 같은 모습이다. 서양인과 외국어로 대화하는 중에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처음이지만 일본인 친구들과는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라 이상했다.

 

'당신이 내 나라에 왔으니, 내 나라 말을 써야지!'하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었다면 멋지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가 않아서, 기대이하였다. 그들의 자부심은 소문만 무성했던 것 같다.

 

영어 잘 하면 잘난사람? 이건 아니다. 여러 외국어 할 줄 알면 대화에서 우위에 있는 것? 글쎄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불편해 하고, 부담스러워 하고,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영어 좀 못 하더라도 표정만으로도 몸짓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할수도 있었을텐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안 쓰는 나라 말을 못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머니에게 손으로 얘기했다. 답이 없다. 외곽으로 갈수록 질문을 영어로 하더라도 대답은 이탈리아어 100%다. 알아듣기는 해도 말이 안나오나 보다. 결국 더 부담만 주고 말았다.

 

결국 말이 필요없이 아주머니가 타는 버스를 따라탔다. 어딜 가든지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어딘가 또 모르는 곳에서 내리면 새로운 여행이 되겠지. 아무도 타지 않는 버스를 타는 것보다 한 두 마디나마 말을 걸어본 사람을 따라가는 게 마음 편하기도 했고, 그 버스에 사람도 많이 타 있기에 선택했다. 사람이 많이 탔다는 것 자체가 실패 확률을 줄일 것 같았다.

 

버스에 타서도 차비를 낼 줄 몰라 무임승차를 했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대중교통 타는 법을 몰랐던 건 초등학교 입학하고 처음이다. 표나 토큰 파는데도 없고, 옆 사람들에게 돈내는 법을 물어봐도 사람들이 나를 피했다. 내 행색이 불편했을까 자책도 해본다. 그런 내 모습이 불쌍했는지 의자에 앉아 있던 흑인이 일어나서 도와준다. 버스내에서 파는 표를 사다가 펀칭까지 해줬다. 로마는 표를 사서, 날짜를 찍으면 유효, 안찍으면 무효다. 무효는 무조건 무임승차. 벌금 50유로라고 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북적이는 이탈리아 버스를 타고 달렸다. 그는 내게 친절을 베푼 대신 좌석을 잃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서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왔다.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 외국인 마음을 좀 더 알아주는 것일까. 국적을 알고 다시 보니, 아프리카 사람 하고는 다른 얼굴로 보였다. 호텔 프런트에서 일을 하는데 오늘은 비번이라고 한다.

 

남아시아에서는 영어가 공통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나를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인들로 가득한 버스에서 어쩌면 버스 안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옆에서 자꾸 혼자 떠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핸즈프리로 통화하는가 했더니 혼잣말이다. 성당 앞에서 밥을 먹을 때도 계속 혼자 떠들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도시는 뭔가 광기가 있는 것 같다. 무료 급식 먹을 때야 이해를 하겠지만 버스 안에서도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로마에서는 길에서 혼자말 하는 사람을 4일 동안 4번 만났다.

 

떼르미니에서 우르르 내렸다. 승객들 대부분 거기서 내렸다. 많은 버스들이 중앙역으로 연결 돼 있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의 휴일을 빼앗을 순 없었다. 그러고 보니 로마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 중 절대다수가 외국인이었다. 대화 상대들의 국적이 겹친 경우도 별로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로마는 국제적인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역에 온 김에 다음 행선지를 검색해 보기로 했다.

 


태그:#이탈리아, #로마, #여행, #무전취식,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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