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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아침에 일어나 난징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양저우(扬州)를 찾아갔다. 양저우는 서양 사람들이 창장(长江) 하류를 '양저우에 있는 강'이라는 뜻으로 양즈강(扬子江)이라 부르게 된 곳이기도 하다. 또, 볶음밥의 대명사인 '양저우 차오판(炒饭)'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대나무와 돌로 유명한 아름다운 정원인 거위엔(个园)으로 들어섰다. 청나라 시대 염상(盐商)이던 황지균(黄至筠)이 명나라 시대 셔우즈위엔(寿芝园)을 중건한 것이다. 이 정원의 이름은 죽엽의 모양을 딴 것이며 주인의 이름 중 '筠' 역시 대나무 껍질이란 뜻이 있기도 하다.

 양저우 거위엔에는 수많은 종류의 대나무들이 곳곳에 피어 있다
 양저우 거위엔에는 수많은 종류의 대나무들이 곳곳에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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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말에 '고기를 먹지 못할지언정, 대나무 없는 집에서 살 수 없다(宁可食无肉,不可居无竹)'고 했고 '고기를 먹지 못하면 수척해지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저속해진다(无肉则瘦,无竹则俗)'고도 했다. 그러니 거위엔은 운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일까. 

정말 정원 입구부터 각종 대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죽간이 곧게 뻗어 있는 대나무의 자세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정말 이렇게 대나무의 종류가 많을 줄 몰랐다. 그야말로 대나무 식물원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도서관인 총슈러우(叢書樓) 현판 글씨가 깔끔한 건물 2층 창문을 온통 나무넝쿨이 감싸고 있다. 수많은 정원과 누각을 봤지만 이처럼 아담하면서 예쁜 곳을 본 적이 없다. 책들을 모으는 곳에 넝쿨 우거진 미적 감각도 모았나 보다.

돌로 쌓은 높은 담벼락을 따라 들어서니 홍등이 한 쌍씩 걸려 있다. 좌우로 난 문을 따라 들어서면 주거공간이 나온다. 칭송탕(清颂堂) 현판이 걸려 있고 6칸의 갈색 빛이 도는 나무판에 연한 초록색으로 글씨가 써 있고 그 아래에는 거울과 화병이 하나 놓여 있다. 천장에 걸린 6각등은 썩지 않는 녹나무(楠木)로 만든 것이라 하는데 각 면마다 풍속도가 그려져 있어 고풍스럽다.

다시 좁은 복도를 지나 문 하나를 지나니 대나무가 푸릇푸릇 자라고 있는 정원이 다시 나오고 빙 둘러 담벼락이 둘러 있는데 그 사이로 둥근 문이 하나 있다. 그 문 위에는 담벽 바탕 위에 연한 초록색으로 '个園'이라 써 있다. '个'의 번체는 '個'이고 '園'의 간체는 '园'이니 아마도 최근에 쓴 글자일 것이다.

문을 들어서니 이위쉬엔(宜雨轩)이 나오는데 손님들의 숙소이기도 하고 민속악기 연주를 하는 곳이기도 한다. 바로 옆에는 인공으로 만든 작은 산과 연못이 있으니 연주를 들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인가 보다. 중국의 정원에는 대체로 이런 자산(假山)이 있는데 꽃과 나무를 보면서 햇살을 맞으며 산책하는 곳이다. 돌들을 쌓아서 만들게 되는데 비록 산이 높지는 않더라도 구불구불 미로처럼 곡선으로 연결해 놓아 걸어 오르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2층 정도의 높이인 산에 좁게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오산러우(抱山楼)이다. 복도가 길게 연결된 이 누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과 연못, 나무와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이야말로 거위엔답게 만든 곳이라 할만하다. 더구나, 봄여름가을겨울 사철마다 그 풍광이나 감상이 다 다르다고 하니 운을 주고받으며 술 한잔 했음직하다. 연못 가운데 맑은 물놀이라는 뜻의 칭이팅(清漪亭)까지 둔 것도 그러한 배려일 듯하다.

 양저우 거위엔의 인공 산과 연못
 양저우 거위엔의 인공 산과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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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내려오니 누각 가운데 병천자춘(壶天自春)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청나라 말기 학자이며 정치가인 유봉고(刘凤诰)의 <개원기(个园记)>에서 쓴 말로서 '술 단지 속의 하늘'인 '병천(壶天)'은 '비록 명산 대천과 같지는 않지만 그 경치는 무릉도원(世外桃源), 인간선경(人间仙境)의 뜻'이라고 한다. 정말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거위엔을 나와서 이번에는 셔우시후(瘦西湖)로 갔다. 약간 덥지만 쾌청한 날씨라 그런지 호수 공원으로 들어서니 기분이 상쾌하다. 이 호수는 수당 시대부터 정원 풍의 공원이었는데 청나라 초기 강희, 건륭 두 황제의 순행 당시 이곳을 다녀간 것으로 유명하다.

다섯 개의 정자가 동그랗게 모여 있는 다리인 우팅챠오(五亭桥)에서 바라본 호수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 정자를 중심에 두고 네 귀퉁이에 정자들이 품고 있는 형상이 독특하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ㄴ' 자와 'ㄱ' 자가 서로 연결된 형태로 길게 뻗어 있고 4.3킬로미터에 이르는 큰 호수 한 가운데 있어서 마치 허리띠(腰带)처럼 서 있다고 한다. 건륭제가 방문했을 때 이 지방의 소금운송업자(盐运)가 지었다 하니 꽤 신경을 썼음직하다.

 양저우 셔우시후 호수, 왼편에 백탑, 오른편에 다섯개 정자로 쌓은 다리인 우팅챠오
 양저우 셔우시후 호수, 왼편에 백탑, 오른편에 다섯개 정자로 쌓은 다리인 우팅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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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호반 산책로를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바로 앞에 하얀 백탑이 하나 등장한다.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높이가 27.5미터이고 베이징에 있는 베이하이(北海) 백탑을 모방해서 지은 것이라 한다. 사실은 건륭제에게 잘 보이려고 하루 만에 급하게 하얀 탑의 모양만 내고 쌓았다가 나중에 다시 베이징 백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축수(祝寿)의 예를 올렸다는 시춘타이(熙春台)를 지나면 얼스쓰챠오(二十四桥)가 수면 위에 떠오른 듯 서 있다. 이 다리는 다리 길이가 24미터, 너비는 2.4미터, 난간 무게는 24근, 위 아래로 24개의 계단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치(曲拱) 형 모양으로 난간은 모두 백옥처럼 하얗다. 다리 이름이 새겨진 곳에서 바라본 다리는 참 봉긋하고 아담하다.

같은 숫자를 일부러 똑같이 맞춰서 지었을까 아니면 짓고 나니 숫자가 같아졌을까 생각하다가 배를 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면 모두 무료로 탈 수 있다. 호수의 ㄱ자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 저어 간다.

 양저우 셔우시후 속 작은 섬에 세워진 댜오위타이, 나무 흐드러지고 뱃놀이 정취와 어울린다
 양저우 셔우시후 속 작은 섬에 세워진 댜오위타이, 나무 흐드러지고 뱃놀이 정취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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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바닥은 오렌지 색이라 화사하고 기분이 좋다. 몇 사람이 함께 타서 서로 균형을 잡느라 분산해서 자리를 잡았다. 노 젓는 여자 뱃사공은 20대 중반 정도의 시골 아가씨의 용모다. 예부터 셔우시후를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인 조비연(赵飞燕)에 비유하는데 정말 그만큼은 아니지만 날렵한 손놀림으로 노를 젓는다. 물론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인 양귀비 양옥환(杨玉环)은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래서 4자 성어에 '연수환비(燕瘦环肥)'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키가 작고 크고 뚱뚱하고 마른 제각각 생김이 다른데, 양귀비와 조비연을 누가 감히 미워할까(短长肥瘦各有态,玉环飞燕谁敢憎)'라는 소동파가 지은 시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노 젓는 소리에 따라 배가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이쪽 저쪽 모두 눈으로 들어온 모습들이 다 아름다운 풍광이다. 버드나무들이 호수 주위를 흐느적거리고 있으며 멀리 약간 기운 듯한 백탑도 보인다.

처녀 뱃사공이 지역 민가를 부른다. 애절하고도 흥겨운 가락에 저절로 신이 났던지 함께 탄 사람들이 추임새가 여간 적극적이지 않다. 낭만적인 곡조가 절절하게 이어지니 뱃놀이하는 기분이야말로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흥겹게 변한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뱃사공 옆으로 자리를 옮겨 사진을 찍느라 배가 좌우로 흔들거린다. 그렇지만 약간의 불균형이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을 만발하게 하면 했지 불안하지는 않았다.

 양저우 셔우시후 호수를 오가며 민가를 부르고 있는 처녀 뱃사공
 양저우 셔우시후 호수를 오가며 민가를 부르고 있는 처녀 뱃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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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팅챠오 밑을 지나가니 호수 속 작은 섬에 향긋한 기운이 솟아나는 듯한 귀엽게 생긴 정자 하나가 반듯하게 떠 있다. 바로 댜오위타이(钓鱼台)이다. 개나리꽃 색깔로 칠을 한 벽 삼면에는 원형으로 뚫려 있는 정자의 모습이다.

배에서 내려 위반챠오(玉版桥)를 넘어 호수 반대편으로 가니 댜오위타이를 배경으로 지나가는 배의 앙상블이 참 멋지다. 시야를 약간 가린 버드나무조차 한 폭의 그림 속에 살포시 들어와도 좋았다. 배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살을 헤치고 조용히 멀어진다. 시선을 따라가니 왼편으로 백탑이 얼굴을 내밀었고 오른편으로 다섯 개 정자가 똑바로 서서 이룬 다리의 웅장함이 드러났다. 배는 더욱 느리게 떠나가지만 아련하게 기억은 오래 남을 듯하다.

호수 공원을 나와 다시 서북쪽에 있는 따밍쓰(大明寺)를 찾았다. 이미 1500여 년 전에 처음 세워진 오랜 역사를 지닌 불교사원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본당인 대웅보전(大雄宝殿) 마당에 백년의 수령인 황양목(黄杨木)과 노송나무(桧柏)가 한 그루씩 뿌리를 박고 있다. 소원을 적은 각양각색의 리본을 나무에 걸었으니 마치 성황당 앞 나무 같기도 하다. 불전 안에는 석가모니와 10대 제자까지 포함해 많은 불상들이 있다.

 양저우 따밍쓰의 감진대사의 조각상
 양저우 따밍쓰의 감진대사의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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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원이 이렇게 번성하게 된 것은 당나라 시대의 명승인 감진(鉴真) 대사가 설법을 한 것 때문이라고 한다. 감진대사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후 열반했다. 대사의 기념관에 있는 조각상은 눈을 감고 있는데 아마도 생전에 실명한 모습인 듯하다.

 양저우 따밍쓰에 있는 9층 사리탑인 시링탑
 양저우 따밍쓰에 있는 9층 사리탑인 시링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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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동편에는 9층 탑인 시링탑(栖灵塔)이 서 있다. 수(隋)나라 문제(文帝) 시대인 601년에 처음 설립됐으며 부처의 사리를 모셨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영혼이 깃든 탑'이라고 하기에는 최근에 중건된 듯 너무 세련된 모습이어서 조금 아쉬웠다. 사리탑이어서인지 탑 양쪽으로 종루와 고루가 배치돼 있기도 하다.

이 사원이 특이한 점은 사원 밖으로 방생하는 연못이 있고 크고 작은 정자들이 연못 주위에 만들어져 있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둘러보지 않고 공예품 가게 안에 들어가니 좀 쉬기로 했다. 종일 여러 곳을 다녔더니 역시 좀 피곤하다.

시원한 가게에서 구경하는데 특별히 새로운 것도 없고 그저 더위를 약간 피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9월 28일 중산링(中山陵)으로 달려갔다. 2006년 8월 한여름에 왔었지만 쑨원(孙文)의 묘지에 들렸다가 떠나야 할 듯했다.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한 그는 1925년 베이징에서 병사한 후 신해혁명으로 세운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에 묻혔다.

입구에 도착했다. 전에 왔을 때는 중산링과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朱元璋)과 황후의 합장 무덤인 효릉(孝陵)과 9층 8면의 탑과 신해혁명밀랍관까지 두루 볼 수 있는 링구쓰(灵谷寺)까지 함께 볼 수 있는 티켓을 끊었지만 이번에는 중산링만 보기로 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쑨원의 무덤을 만나려면 박애(博爱)라고 쓰여진 패방(牌坊)을 지나야 한다. 하늘로 솟아있는 3개의 문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가운데 문으로 들어서면 멀리 어슴푸레 묘역이 보인다. 날씨가 다소 흐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난징 쑨원의 묘역인 중산링 입구의 '박애' 패방
 난징 쑨원의 묘역인 중산링 입구의 '박애' 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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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생인 쑨원은 광동(广东)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 보낸 그는 서구식 교육을 받았으며 청나라의 부패를 보면서 반청사상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외국 열강과의 전쟁을 보면서 반외세 민족주의, 애국사상을 체득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1894년 자신의 조직기반이 된 '흥중회(兴中会)'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든다.

이후 그의 조직 강령,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주공화국 지향' '토지 소유의 균등'으로 요약되는 삼민주의는 큰 호응을 얻게 된다. 1911년 무창봉기가 터지자 중국으로 들어온 그는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 대총통에 취임,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킨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을 이뤘다. 하지만 보수세력의 압박과 내부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凯)에게 정권을 물려 주고 만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의 반혁명 음모를 타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14년 6월 국민당의 전신인 중화혁명당(中华革命党)을 조직했다. 이후 1915년 송칭링과 결혼했으며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소련과 접촉했다. 1919년 5·4운동 이후 당 이름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고 광동성 광저우(广州)를 중심으로 혁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전국 도처의 봉건적 성향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소련의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한다. 1924년 광저우에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해 '러시아와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정하고 공산당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한다.

 난징 중산링의 쑨원 무덤인 지탕이 보이고 계단이 가파르다. 가운데 꽃밭을 꾸몄다
 난징 중산링의 쑨원 무덤인 지탕이 보이고 계단이 가파르다. 가운데 꽃밭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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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해 외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위해 군벌들과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군벌들과 협력을 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1924년 군관학교를 창설하고 혁명군대의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닦기 시작한다.

이 시기 베이징은 직계(直系)군벌이 장악하고 있었다. 동북의 봉계(奉系)군벌은 1924년 9월 2차 직봉(直奉)전쟁을 통해 직계군벌을 전복시킨 후 쑨원에게 국정논의를 위해 상경할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링먼(灵门)과 베이팅(碑亭)을 지나면 드디어 지탕(祭堂)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 쑨원의 묘가 있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많은 계단을 하나씩 오르려면 꽤 숨이 차다. 계단 가운데 있는 베이징올림픽을 형상화한 꽃밭이 강렬하다. 빨갛고 노랗고 초록의 나무와 꽃들로 엮어 더욱 선명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탕 안에는 원형의 대리석으로 만든 묘혈이 있다. 그 묘혈 중앙 아래에 누워 있는 석상이 있다. 쑨원은 사망하기 전날 3개의 유서(遗嘱)에 서명했다고 한다. 국사(国事)에는 자신의 혁명이념이 성공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또 가사(家事)와 관련해서는 자신의 유품을 모두 2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아내 송칭링에게 물려주며 자신의 혁명유지를 계승해줄 것을 당부했다. 소련에 보내는 유서도 있는데 양국이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자는 염원을 전달했다 한다.

중산링 지탕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참 흥분된다. 수없이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과 또 내려가는 사람들을 넘어 난징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보는 전망이 참 아름답다. 내려갈 때는 오를 때보다 당연히 훨씬 가볍다.

 난징 쑨원의 묘역이 중산링에서 바라본 모습
 난징 쑨원의 묘역이 중산링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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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재촉해 중산서원(中山书院)을 들렀다. 예전에 왔을 때 들르지 못한 곳이라 찾았더니 쑨원 동상이 마당에 서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이 지방 서예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데 흥미롭지 않다.

다시 쑨중산기념관을 향해 가는데 길 옆 숲에 '박애의 집'이라는 찻집이 보였다. 마침 비가 약간 내리기 시작하는데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좋아 얼른 들어갔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쉬어가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기념관을 보는 대신 차를 마셨으니 이제 다시 시내로 돌아가야 한다. 짐을 찾고 호텔 직원에게 창저우(常州) 행 버스터미널을 물었다. 알려준 대로 갔더니 다른 터미널로 가라고 한다. 직원이 알려준 곳이 틀린 것이다. 국경절이 코앞이라 엄청나게 많은 줄을 30분이나 기다렸는데 허탈하다.

다시 다른 터미널로 이동해 다시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 터미널 직원에게 물었더니 가까운 곳이니 바깥 임시 매표소로 가라고 한다. 바로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 친절한 직원이 잘 샀냐고 물어본다. 가끔은 이렇게 헷갈린다. 친절한 직원이 있는가 하면 성의 없는 직원도 있는 것, 그것이 다 사람 사는 세상인가.

덧붙이는 글 | 중국문화기획자 - 180일 동안의 중국발품취재
blog.daum.net/youyue 게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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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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