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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이 떠난 집터를 일궈 씨고구마를 심었다.
 자식들이 떠난 집터를 일궈 씨고구마를 심었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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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돌담과 구들장, 색이 바랜 흙벽 너머에 텃밭이 있다. 밀짚모자를 쓴 할머니는 날이 좁은 호미를 들고 이랑을 만들었다. 그 사이 고구마가 줄지어 누워 흙과 물을 기다린다. 할머니의 모습은 평화롭고 행복하다.

새벽바람을 가르며 세 시간을 달려 막 떠나려는 배를 간신히 잡아탔다. 이 배 놓치면 꼼짝없이 오후 늦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점심때가 되려면 한 시간 남짓 기다려야 하지만 배꼽시계는 이미 점심시간을 넘겼다. 식당이 없는 섬 마을을 배회하다 텃밭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활짝 웃으며 반기는 모습이 오늘 점심은 해결할 것 같다.

"할머니 이 섬에는 식당 없어요?" 인기척을 했다. 사실 '할머니 밥 좀 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어쩌까 여그는 식당이 없어. 삼거리 슈퍼에 가서 물어봐 거기서는 밥도 해주기도 해." 더 반가운 말이 이어졌다. "밥 안 해준다고 하면, 우리 집으로 와. 식은밥이라도 먹게."

주지봉 앞 바다에서 삼마이 그물로 숭어를 잡고 있는 주민
 주지봉 앞 바다에서 삼마이 그물로 숭어를 잡고 있는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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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는 가사리·활목·돌목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큰 마을'이라고 부르는 가사리는 100여 호에 이르며, 활목은 40여 호, 돌목은 3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가사도는 1910년대 초반 주지도·양덕도·광대도·불도·장도 등 인근 섬 열댓 개와 함께 조도면과 분리된 당당한 가사도면의 중심이었다.

육지와 연결되기 전까지 진도 본섬은 물론 조도면을 포함한 진도 서부지역의 섬 대부분은 목포항에서 출발하는 새마을호를 기다리는 목포 생활권이었다. 1960년대 가사도에 300여 호가 거주했다. 초등학생만 해도 370여 명에 선생님이 8명 있었다. 섬 전체가 규석광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주둔하며 진도와 해남 일대에서 젊은 사람들을 동원해 광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큰마을에 하나뿐인 가게에 가사도 분교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들어왔다.
 큰마을에 하나뿐인 가게에 가사도 분교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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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의 주 소득원은 갱변에서 채취하는 자연산 해초와 양식 톳이다. 한때 김 양식과 미역 양식도 했었지만 어장면적이 넓지 않고 판로도 마뜩찮았다. 대신 톳과 가사리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할 수 있기 때문에 섬 마을 주민 절반이 톳 양식에 의존하고 있다.

조도의 특산품은 아무래도 자연산 미역이다. 섬 주변 조간대 바위(갱변)에서 채취한 자연산 미역은 한 뭇에 20여만 원을 호가한다. 갱변사업이라 부르는 채취권은 몇 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매년 공개입찰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이외에도 몇 년 전부터 전복 양식, 모자반(참몰) 양식을 하고 있다.

가사군도에는 임금을 나을 여성이 출생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우연일까. 하의도 출신인 김대중 전대통령의 어머니 인동 장씨가 가사도 출신이다. 스님이 가사를 입고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한 가사도, 주변에 불도, 목탁이나 동자승 등과 관련된 이름과 지명 설화들이 많다. 이곳 섬 사람들은 주변에 황금어장을 두고도 고기 잡는 일보다 갱변에서 해초를 뜯어 생업을 이어왔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 귀의한 섬이기 때문일까.

가사도 등대 뒤 바다는 신안과 연결되는 시아바다다.
 가사도 등대 뒤 바다는 신안과 연결되는 시아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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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지산면 가학리에서 뱃길로 20여분 거리지만 행정구역은 조도면에 속한다. 거리로 따지면 가학항까지는 6.1km, 면소재지인 조도면까지는 18km에 이른다. 마을이장도 한 달에 한 번 면 소재지 가기가 빠듯하다. 목포에서 뱃길로는 90여 km에 달한다. 그래도 가사도는 목포 생활권이다.

목포-가사도-진도조도-서거차도를 잇는 90km 뱃길이 일찍부터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포항 출발 새마을호는 격일제로 두 대가 운항하고 있다. 진도가 해남과 연륙되기 전에는 조도는 물론 진도 전체가 목포 생활권이었다. 목포·해남·진도를 아우르는 시아바다 길목에 가사도가 위치해 있다.

뱃길로는 목포에서 조도로 가는 길목이요, 물길로는 서해와 남해의 갈림길에 있다. 가사도에는 등대가 있다. 1915년 무인등대로 시작하여 1983년 유인등대로 전환되었다. 돌목마을과 작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가사도 등대에는 3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뭍으로 뜨는 자식들의 흔적을 되새기듯 할머니는 묻어 놓은 고구마를 다시 파내 자리를 옮긴다. 이곳에도 10여 가족이 살았을 게다. 다음 날 가사도에 비가 왔다. 그 비를 자양분 삼아 고구마가 자리를 잡고 싹을 띄울 준비를 할 것이다. 할머니는 고구마 순 줄기를 잘라 옮겨 심어 놓고 추석명절 손자 녀석을 기다릴 것이다.

가사도의 식량문제를 해결한 개앞 간척지, 왼쪽 마을이 큰마을이며 오른쪽 마을은 활목리이다.
 가사도의 식량문제를 해결한 개앞 간척지, 왼쪽 마을이 큰마을이며 오른쪽 마을은 활목리이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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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남도정신문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가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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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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