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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박물관 뒤로 난 길을 따라 해인사 가는 길로 올라가다 보면 길이 세 갈래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난 길을 택해 향상교라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삼선암·금선암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다. "물이 말라 있지 않다면 계곡의 시냇물소리와 동행하는 좋은 길인데..." 하는 아쉬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바로 앞에는 한 스님이 뒷짐을 진 채 보살들과 이야기하면서 걸어가고 있다. 암자 기행을 하다가 포행하는 스님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미 소가 제 새끼를 데리고서 풀을 뜯는 모습과 스님이 걸어가는 모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삼선암은 조선 고종 30년(1893)에 비구니 자홍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세 봉우리 밑에 있다 하여 삼선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암자 옆 계곡에서 세 사람의 신선이 놀았다고 해서 삼선암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신선이 놀았다는 이야기를 신빙성 있게 받아들인다. 그런 상상을 불러올 만큼 계곡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세 봉우리 밑에 있다 해서 삼선암이라 불렀다면 그야말로 맥 빠질 만큼 단순하지 않은가. 물론 신선이 놀았던 곳이라 해서 삼선암이라 불렀다는 것도 약간 진부하긴 하다. 단순한 사실에 기대기보다는  진부할망정 아름다움이 서린 전설이 더 좋은 것이다.
 
여전히 신비로운 존재인 여승
 
삼선암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돌확처럼 생긴 샘을 만난다. 물 한 모금을 떠 마신다. 바닥으로부터 물이 콸콸 솟아오른다. 어떻게 바위에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연결했을까.
 
궁금해서 안을 들여다보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샘 하나에도 이렇게 아기자기한 모습을 연출해 놓은 걸 보면 이 암자는 필시 비구니들이 사는 암자가 분명하다, 해인사 암자에는 유독 비구니 암자가 많다.
 
내가 처음 여승에 관한 글을 읽은 것은 여성해방과 자유연애를 주장하던 그. 그러나 결혼에 실패하고 생에 환멸을 느껴 중년엔 예산 수덕사에 입사하여 여승이 된 김일엽이 쓴 자전적 수필 <청춘을 불사르고>였다.
 
이 책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읽었던 전혜린이 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함께 청소년기 내 감수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책은 사람들에게 여승은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란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던 것 같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을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중략)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 송수권 시 '여승' 일부
 
이슬만 먹고 사는 듯한 정갈함, 세속의 욕망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파르스름한 머리, 빳빳하게 풀먹인 장삼. 내게 여승은 여전히 신비로운 존재다. 경내로 들어서자, 비구니 한 분이 빠끔히 문을 열고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부처를 어디서 뽑습니까?"
 
 
1904년에 보찬·지종 두 스님이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중앙에 법당이 있고, 그 좌측에 '우소정(又小井)이란 선방이 있다. '작은 샘'이라는 뜻을 가진 선방이다. 아무렴. 마음이란 작은 샘 같이 끊이지 않고 물이 솟아나야지. 우측에는 세로로 길게 늘어선 반야선원이 있다. 근래에 지은 건물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이 쓰여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시민선방이 아닌가 싶다.
 
법당보다 한 층 더 높은 축대 위에는 약사전과 선불장(選佛場)이란 현판을 단 선당이 있다. 선불당이라고도 부르는 선불장은 스님들이 참선하시는 방이다. 부처 뽑는 시험공부를 하는 방이니 얼마나 치열한 곳인가.
 
금룡·수옥 근대 비구니계의 3대 강백 중 한 사람인 혜옥 스님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 삼선암을 거쳐 갔다.
 
삼선암 반야선원 선원장을 지내시다 지난 2007년에 입적하신 정행 스님(1902~2000) 역시 우리나라 비구니 원로였다.
 
9살 때, 언니와 함께 절에 들어와 몇 십 년 동안 선방을 돌아다니셨던 분이다. 95세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7백 배를 올리고, 조석 예불을 올렸던 스님이셨다.
 
여시래여시거혜(如是來 如是去兮) 이렇게 왔다 이렇게 감이여
백년생애찰나간(百年生涯刹那間)  백 년의 생애가 한 순간이로다
만리장천일양색(萬里長天一樣色)  만리 하늘은 늘 한빛이요
청산부동백운류(靑山不動白雲流)  청산은 그대론데 흰 구름만 흐르네
 
정행 스님이 남기신 열반 게송이다. 속세 나이 99세로 돌아가셨으니, 거의 백 년이나 사셨지만, "백년의 생애가 한 순간"이었다고 술회하신다. 선불장 마당 가에는 장독 몇 개가 동그마니 놓여 있다. 죽을 때까지 여의지 못한 채 먹고 살아야 하는 세속의 피붙이 같은 것이리라.
 
부도밭, 아직 절집다움이 남아 있는 곳
 
 
삼선암을 빠져나와 바로 위에 있는 금선암을 향해 간다. 가만히 생각하니, 뭔가 빠트린 게 있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체크 리스트를 보니, 부도밭에 들르는 것 깜박했던 것이다. 다시 삼선암으로 되돌아간다. 선원 뒤로 난 큰길을 따라서 부도밭으로 간다. 왼쪽에 돌계단이 있다. 부도밭으로 올라가는 길인가 보다.
 
이곳에는 3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좀 세월의 때가 낀 것이 문오 스님의 부도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20c 초 삼선암에 주석했던 스님이라는 건 틀림없다. 정암당 혜옥(1901~1969) 스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2기의 부도는 근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복을 달라"고 부처님께 빌러 가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절집에 가는 뜻은 적멸을 맛보기 위함이다. 그 적멸 속에서 좌정한 평화를 맛보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문화재로 넘치는 큰 절집보다 작은 암자를 선호하는 건 그 때문이다. 요즘엔 암자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규모가 큰 암자들이 너무 많다. 나는 '복원불사'란 말이 두렵다. 그 말 속엔 무분별하게 큰 것만을 지향하는 세태가 숨어 있다.
 
떠들썩한 저 아래 해인사 들머리와는 달리 언덕이 매우 조용하고 적막하다. 이제 절집에 와도 쉽게 맛볼 수 없는 적멸을 이곳에서 겨우 맛본다. 어쩌면 이렇게 시끄러운 시대엔 부도밭이야말로 가장 절집다운 곳인지도 모른다.

태그:#가야산 , #해인사 , #삼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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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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