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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2일 국회 본관 446호 행정자치위 회의실. 국회의원 선거구획정위(위원장 박병섭 상지대 부총장) 제8차 회의가 열린 이 날도 회의장에는 연신 메모가 적힌 쪽지가 들어왔다.

주로 자기당 현역의원들의 지역구를 지켜주려는 원내교섭단체(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 대표들의 '로비성' 메모가 일부 획정위원들에게 전달되었지만, 선거구 획정회의 막바지에 갈수록 선거구가 통폐합될 처지에 놓인 개별 의원들의 '읍소형' 메모가 전달되었다.

그런데 이날은 출처를 밝히지 않은 '괴문서' 한 장이 획정위원들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천·여주 분구가 타당하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을 단, 달랑 한 장짜리 문서였다. 알고 보니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경기 이천·여주)측에서 배포한 문서였다.

이규택 의원이 배포한 '괴문서'와 세 가지 이유

지난 17일 오후 여의도 대하빌딩에서 친박계 의원들과 회동을 갖고 4.9총선에서 미래한국당에 입당하여 '친박 정당'으로 출마한다고 입장을 밝힌 이규택 의원.
 지난 17일 오후 여의도 대하빌딩에서 친박계 의원들과 회동을 갖고 4.9총선에서 미래한국당에 입당하여 '친박 정당'으로 출마한다고 입장을 밝힌 이규택 의원.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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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에 적시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시기적으로 선거가 임박했으므로 현행 선거구의 변화를 최소화하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이천·여주 선거구는 여주가 인구하한을 넘겼다고 하지만 전체 선거구가 인구상한에 미달하므로 현행 유지가 타당하다. 셋째, 인구상한을 넘긴 선거구를 늘리고, 인구상한을 넘기지 않은 이천·여주 선거구까지 분구하면 국회의석수가 너무 증가해 바람직하지 않다.

일면 타당한 이유였다. 그러나 아무리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도 세번째 이유는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으로 비쳤다. 정치인들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선거구 선택 기준은 오로지 '당선 가능성' 하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핵심 쟁점은 두 번째 이유였다.

이규택 의원은 최소 선거구의 기준을 전남 영암·장흥(인구 10만4210명) 선거구로 삼아 그 3배인 31만2630명을 인구상한선으로 잡았다. 그럴 경우 여주군 인구(10만6926명)는 인구하한을 넘지만 이천·여주(30만2617명) 선거구는 인구상한에 미달하므로 이천·여주를 나누지 않고 현행 선거구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천·여주는 본래 각각이 독립된 선거구였으나 여주 인구가 자연감소해 최소 선거구 기준에 미달함에 따라 인근 이천시와 통합해 합구(合區)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인구의 자연증가에 따라 원상을 회복한 여주의 분구(分區)는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획정위원들 사이에서는 이천·여주 선거구를 분구하자는 데 별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천·여주를 분구 대상지역으로 분류해 놓고 다른 지역 선거구에 대한 구체적 획정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상식과 통념을 배반한 이규택 의원의 '역선택'

그런데 문제는 정작 이해 당사자가 분구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일반인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분구가 당연했다. 특히 소지역주의 성향이 강한 선거구일수록 분구가 기득권을 가진 현역의원들에게 유리하다. 쪼갤수록 그만큼 공천 경쟁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4선 의원인 이규택 의원의 고향은 여주다. 고향에서 인기가 없었던 예수가 아닌 다음에야 보통은 정치인들이 탯줄을 묻은 곳에서 더 많은 표를 얻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도 이 의원은 결사적으로 분구를 막으면서 현행 유지를 고수한 것이다. 일종의 '역선택'인데 이유는 역시 '당선 가능성' 때문이었다.

상식과 통념을 벗어난 일이지만, 단일선거구가 아닌 통합선거구에서는 이런 상식의 '배반'이 가끔 일어난다. 여주가 이 의원의 고향이지만 이천시 인구(19만5691명)가 여주보다 곱절이므로 당락은 이천 유권자의 선택에 달린 셈이다. 이런 경우 정치인들은 대개 고향 주민을 믿고 다른 지역에서 더 열심히 '표밭'을 갈게 된다. 이른바 '집토끼'는 놔두고 '산토끼'부터 잡는 선거전략이다. 

4선의 이 의원도 집토끼보다는 산토끼를 잡는 데 더 열중했다. 원래 선거에서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그는 고향보다 오히려 타향에서 더 환대를 받을 만큼 철저히 조직관리를 한 셈이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 의원의 강력한 공천 경쟁자인 이범관 변호사 역시 고향이 여주였다. 그러니 이 의원으로서는 분구해서 고향에서 경쟁하는 것보다 현행 선거구를 유지하는 것이 일종의 '분산 투자'로 오히려 위험을 회피하는 선거전략이었다.

선거구획정위의 획정안을 가볍게 뒤엎은 '괴력'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 전 대표측 이규택 의원이 지난 17일 오후 여의도 대하빌딩에서 친박계 의원들과 회동을 갖고 4.9총선에서 미래한국당에 입당하여 '친박 정당'으로 출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 전 대표측 이규택 의원이 지난 17일 오후 여의도 대하빌딩에서 친박계 의원들과 회동을 갖고 4.9총선에서 미래한국당에 입당하여 '친박 정당'으로 출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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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이 의원은 선거구획정안을 최종 확정하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무서운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민간위원들로 구성된 선거구획정위가 정치개혁특위에 넘긴 이천·여주 분구안을 현행 유지 쪽으로 '가볍게' 뒤엎어버렸다.

그러나 분구가 불가피한 이천·여주 선거구의 현행 유지를 관철시킨 이규택 의원의 '괴력'도 공천심사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친박근혜계'로 분류된 이 의원은 정작 한나라당 공천심사에서 이범관 변호사에게 밀려서 허무하게 탈락했다.

그러자 이규택 의원은 17일 "오늘 이 시간부로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한나라당을 떠나 미래한국연대(가칭 '친박 연대')로 함께 하고자 한다"고 탈당을 선언하고, 19일에는 서청원·홍사덕 전 의원 등 구(舊)민주계 인사들과 함께 미래한국당에 입당했다.

한나라당 원내총무와 최고위원을 지낸 이규택 의원은 친박계의 좌장으로 역시 공천에서 탈락한 김무성 최고위원이 중심이 된 '무소속 연대'와 손을 잡고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한나라당'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19일 실시한 <동아일보><MBC>의 격전지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4%포인트, 평균 응답률은 16.8%) 결과에 따르면, '친박 연대' 명패를 단 이규택 후보는 28.4%의 지지도를 얻어 이범관 한나라당 후보(18.7%)와 김문환 통합민주당 후보(8.2%)를 따돌렸다. 이 의원의 인지도는 92.0%인 반면, 정치신인인 이 후보의 인지도는 31.3%에 그쳤다.

1988년 김영삼 총재가 이끈 통일민주당의 여주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해 14대 총선부터 내리 4선을 한 그의 20년 정치 생명을 건 '역선택'이 성공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향 떠나 출마한 김효석 원내대표

김효석 민주당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2월26일,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손학규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김효석 민주당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2월26일,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손학규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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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다르지만, 이번 총선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향을 등진 또 다른 '역선택'의 주인공은 통합민주당 김효석 원내대표다.

김효석 대표의 지역구는 원래 전남 장성·담양·곡성 선거구다. 태어난 곳은 장성이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고향을 떠나 담양·곡성·구례 선거구에 출마한다. 지역구 의원이 고향을 떠나 출마하는 것은 큰 '모험'이다. 특히 대도시와 달리 농촌지역은 지역연고를 따지는 정서가 강하다.

김 의원이 이런 모험을 하게 된 것은 전남지역의 최대 현안인 농촌지역 인구감소에 따라 선거구 조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자의'보다는 '타의'에 따른 것이다.

전남은 인구의 자연감소로 많게는 2석이 줄어들 판이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인구하한에 미달한 강진·완도(9만7553명) 선거구다. 우여곡절 끝에 강진(4만1352명)은 인근 영암·장흥 선거구에 통합되고, 완도(5만6201명) 역시 인근 해남·진도 선거구에 통합되어 통합민주당 이영호 의원의 지역구인 강진·완도 선거구는 공중 분해되었다.

같은 당 이낙연 의원의 지역구인 영광·함평(9만6835)은 그보다도 더 인구가 적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광양시·구례군 선거구에서 광양시(13만8865명)가 독립 선거구로 분리되면서 구례가 담양·곡성·구례로 묶임에 따라 오히려 장성이, 인구 감소로 분해될 위기에 처한 영광·함평 선거구와 묶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교·대학 선후배인 김효석과 이낙연의 '신사협정'

김 의원이 고향에서 출마하려면 이낙연 의원과 공천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광주일고·서울대 선후배 사이인 김 의원과 이 의원은 선거구 조정을 예견하고 오래 전에 공천 싸움을 하지 않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장성이 영광·함평과 묶이자 김 의원은 미련없이 고향을 떠나 담양·곡성·구례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김 의원에게 고향 출마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1당의 원내대표인만큼 선거구획정위에 영향력을 미쳐 선거구조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선거구획정위 회의가 열리는 동안 자신의 지역구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전남지역 선거구가 감소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메모 쪽지만 전달했다.

그러나 김 의원의 '역선택'에 '타의'만 작용한 것도 아니다.

이번에 당선되면 3선 의원이 되는 김 대표는 3선 의원들이 겪는 공통의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즉, 선수(選數)를 더 늘려 국회의장직에 도전할 것인지, 아니면 광역단체장이나 모든 정치인의 꿈인 '대권'에 도전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김 의원이 고향을 등지면서까지 '역선택'을 한 것은 광역단체장 출마를 염두에 둔 결정으로 보인다.

어쨌건 제1당의 원내대표인 김 의원의 '역선택'으로 이낙연 의원은 더 탄탄한 지역구를 얻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김 의원의 고향 출마를 당연시하고 '무주공산'이 될 담양·곡성·구례 선거구에 눈독을 들여온 국창근, 고광진, 고현석, 김광영, 김정범, 양성철, 최형식씨 등 통합민주당 예비후보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김효석 출마 반대 논리는 '타향 사람 왕따 놓기'

이들이 김 의원의 담양·곡성·구례 출마를 반대하며 내세운 논리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지역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역연고 정서가 강한 농촌지역에서 고향을 놔두고 인근 선거구에 출마함으로써 이 지역이 마치 ·국회의원 한 사람 내세울 수 없는 지역'으로 취급되는 것이 불쾌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반대논리는, 원내대표쯤 되는 중량급 정치인이면 당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수도권에 진출해 한 석이라도 더 얻거나, 적어도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 출마해 이 지역 출신 정치인들의 진출을 터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당과 공천심사위가 김 의원에게 서울 출마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연명으로 서명해 제출하기도 했다. 또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무소속 출마를 공언하며 '담양·곡성 무소속 연대'를 도모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의 '자존심'과 당을 위한 '더 나은 선택'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타향 사람을 배척하기 위한 내 고향 연대'다. 일종의 '타향 사람 왕따 만들기'인데, 이런 '왕따 캠페인'이 일단 정서적으로는 일부 지역민에게서 호응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내 고향 연대'의 '김효석 왕따 캠페인'은 성공할 수 있을까?

김효석 대통합민주신당 원내대표
 김효석 대통합민주신당 원내대표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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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타향 사람을 따돌리려는 이들 역시 자기 고향에서만 지지를 받는 '소지역주의의 벽'에 갇히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설령 이들이 공동전선을 펴 '무소속 단일 후보'를 내놓더라도 재선 의원으로 조직기반이 탄탄하고 의정활동 평가도 우수하고 당의 지도부까지 맡고 있는 김 대표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곡성군청의 한 공무원은 "'지역에 연고도 없는 장성 사람이 왜 이곳에서 출마하냐'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제법 있다"면서 "정서적 거부감을 해소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공무원은 "유권자들이 지금은 반발하지만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합친 통합민주당에서 공천을 했으니 결국을 당을 따라가지 않겠냐"며 "다만, 투표율이 낮아질 수는 있다"고 예상했다.

결국 김 의원의 '역선택' 성공 여부는 이 지역 주민들의 정서적 거부감을 누그러뜨려 이들을 투표장으로 나오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태그:#김효석, #이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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