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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오전 장시(江西)성 남단 도시 간저우(赣州) 우룽춘(五龙村)에 있는 커자위엔(五龙客家园)를 찾았다. 가까운 거리이긴 하지만 시골 촌이라 버스편도 까다로워 택시를 탔다. 지도를 보니 택시가 멀리 돌아가는 느낌이다. 넓은 도로가 새로 조성됐다고 한다. 도착해서 보니 한참 도시개발이 진행되는 곳이다.

 

시 동남부 쪽에 있는 커자위엔 역시 새로 공사를 하고 있다. 정문 입구부터 공사 중이라 그런지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 오른편으로 커자 민가 이름인 룽쥐웨이(龙居围) 한 채가 보인다. 이곳은 광둥(广东) 메이현(梅县) 바이궁진(白宫镇)에 있는 민가 원형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제19차 세계 커자 회의(世客会) 기간 중 인도네시아 등 각국의 대표단들이 이곳에서 숙박을 한 곳이기도 하다.

 

한족인 커자(客家) 부족은 북송 및 남송 시대에 중원으로부터 남방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북방민족이 중원으로 진입하자 도피를 한 셈인데, 남방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등 독자적인 문화 양식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상업에 능수능란해 지역의 상권을 장악해왔고 동남아, 홍콩을 비롯해 전 세계로 뻗어나간다. 중국계 사업가들 중에서 커자 출신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중국의 유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커자 사람들은 거대한 원형 가옥인 웨이룽우(围龙屋)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웨이룽우는 베이징의 쓰허위엔(四合院)과 산씨(陕西) 지방의 토굴집인 야오둥(窑洞), 광씨(广西) 좡족(壮族)의 난간 가옥인 난간스(杆栏式), 윈난(云南) 지방의 불교식 2층 가옥인 이커인(一颗印)과 더불어 중국의 5대 향토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전형적인 웨이룽우 앞에 대부분 반월형의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양어장이면서 화재에 대비하기도 한다. 연못을 끼고 나머지 반월을 채우듯 둥글고 높아 성과도 같은 웨이룽우가 위치한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장방형의 형태를 띤다.

 

웨이룽우 외벽은 마치 성벽과 비슷하다. 내부에는 복층 구조로 원형을 따라 연결된 복도에서는 사방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기도 하다. 복도를 따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대체로 비슷한 방 구조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형태라고 한다. 그 외형과 구조는 커자 사람들이 거쳐간 지방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공동생활과 외침에 대비한 건축구조라는 공통점이 있다.

 

웨이룽우 안에는 우물, 화장실, 복도, 응접실, 곁채, 서재, 거실, 침실 등이 체계적으로 갖춰 있다. 그리고 앞부분이 약간 낮고 뒷부분이 높은 구조로 돼 있는데 채광, 통풍, 배수 등에 유리하다. 이런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형태는 오랫동안 방랑하며 남방으로 이주한 커자 사람들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웨이룽우는 커자 가옥의 보통명사에 가깝다. 커자 사람들이 거쳐간 지방마다 이름과 형태가 서로 다르다. 원형(圆形), 장방형(方形), 반월형(半月形), 타원형(椭圆形), 팔각형(八角形), 보루식(城堡式) 등으로 다양하다.

 

 

이곳에는 커자의 대표적인 가옥을 다 볼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광둥(广东) 메이저우(梅州)의 웨이룽우인 룽쥐웨이, 푸젠(福建) 융딩(永定)의 원형 가옥인 룽안웨이(龙安围), 장시(江西) 룽난(龙南)의 장방형 가옥인 룽후이웨이(龙汇围)와 사각형 가옥인 룽칭웨이(龙庆围)가 있다.

 

아쉽게도 공사가 다 마무리되지 않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커자 가옥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상인 중의 상인으로 꼽는 그들의 삶과 역사, 문화를 새겨 공부해볼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태극문양이 그려진 광장을 지나 다시 되돌아 나오는데 황토 빛깔 진한 하천 옆으로 웨이룽우 모습이 웅장하다.

 

커자 마을을 나와 언제 올 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마침 기차 한대가 지나간다. 기차가 다 지나가길 기다리고 나서 보니 기차길 옆에 공동묘지 능원이 있는 것이 보였다. 요즘은 대부분 화장을 하지만 중국에도 매장의 풍습이 있었다. 묘비를 보니 우리가 사용하는 묘비는 높고 길게 생긴데 비해 윗부분이 반원으로 생겼다. 관리가 되지 않아 묘비들이 제대로인 것이 별로 없다.

 

버스가 왔다. 노선을 보니 마침 가려던 곳으로 간다. 장시 성 남부의 역사 문화도시 간저우는 성의 약칭을 '간(赣)'이라 할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닌 도시이다. 그 중에서도 '간'의 한자를 쪼갠 장공(章贡) 구의 허핑루(和平路)에는 200여 년 전 가옥과 거리가 그대로 잘 보존된 자오얼샹(灶儿巷)이라는 곳이 있다.

 

원래 이곳은 청나라 시대 관리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그들의 옷 색깔이 검은 '자오(皂)'색을 주로 입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같은 음인 '자오(灶)'로 바뀐 것이다. 지금도 '자오얼샹(皂儿巷)'의 패방(牌坊)이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다.

 

패방을 지나 들어가니 약 200미터에 이르는 골목길에는 청나라 도광제 시대의 점포(店铺), 수공업공장(作坊), 호텔(宾馆), 금융점포(钱庄), 관공서(衙署)와 민가(民居) 등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어우러져 있어 거리를 걷다 보면 마치 과거 속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준다.

 

더구나, 송나라 돌(宋石)과 명나라 벽돌(明砖), 청나라 기와(清瓦)가 첩첩이 쌓여 있다고 하니 어디가 역사의 경계인지 찾아볼래야 찾아보기 힘들기도 하다. 모든 돌이 송나라 것이 아닐 터이고, 벽돌도 그럴 것이다. 기와들도 청나라를 거쳐 최근에 올린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을 듯하다.

 

그저 오래된 골목길 곳곳을 누비며 과거 역사의 향수를 느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거리에는 한가롭게 고양이, 강아지와 닭, 오리들이 오후를 함께 즐기고 있기도 하다. 거리에 떨어져 있는 먹이 하나를 두고 고양이 2마리와 암탉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 닭은 굳건하게 서 있고 고양이들이 왔다 갔다 하다가 쪼르륵 돌아오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고양이 녀석들이 포기하고 다른 먹이가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으로 자전거가 지나면서 따르릉 울리니 동시에 고개를 0.5초 정도 돌린다. 담배 한 대 피면서 반대편에 앉아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노라니 속으로 웃음도 나는 것이 귀엽고도 여유롭다. 이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도 여유롭다. 사람들 나름대로 바쁘게 볼 일을 보고 있으련만 전체 분위기 때문일까 나른해진다.

 

연탄 배달하는 사람도 지나가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손자 데리고 나온 할머니도 있다. 골목 길에 또 가로 세로로 난 골목이 또 있다. 왼쪽 오른쪽 이리저리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데 어느 골목 앞에 새끼를 밴 암캐 한 마리가 마주보고 서 있다. 캠코더를 땅바닥에 놓고 앵글을 잡으니 노려본다.

 

잠시 후 슬쩍 몇 걸음 물러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목을 하늘로 쳐들더니 워워워워 하면서 울어댄다. 어응어응 두 번 다시 소리 내더니 골목 밖으로 내뺀다.

 

왜 자기 동네에 몰래 와서 제 모습을 찍느냐는 심보인가. 그럴 만도 하다. 집 잘 지키는 강아지야말로 제 본분을 다 하는 것이니. 낯선 이방인에게 옛 풍취를 보게 했지만 그래도 떠나야 할 사람임을 저 녀석도 이내 안 것일 터.

 

집집마다 속옷을 포함해 온갖 빨래를 널어놓았으니 약간 민망하기도 하다. 골목을 빠져 나오는데 열려 있는 창문에 반사돼 비친 모습을 보려고 다가가니 거울처럼 내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 얼굴 뒤로 집집마다 빨래들이 걸려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한 장 찰칵! 200여 년 전의 남방 지방의 생활 환경을 그대로 살펴본 좋은 기회였다.

 

이 오래된 골목을 벗어나면 간저우 중심지를 휘돌아 흐르는 간장(赣江)이 나타난다. 강변에는 송나라 시대의 성벽(城墙)이 물살을 따라 세워져 있다. 이 강은 해상실크로드(海上丝绸之路)로 불릴 정도로 물자가 많이 오가던 물길이기도 하다.

 

이곳 송나라 성벽에는 다섯 개의 성문이 있다. 그 중 젠춘먼(建春门)을 지나는데, 먹거리 파는 작은 포장마차가 하나 있어서 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도너츠처럼 튀긴 빵 한 봉지를 사고 강변으로 나갔다. 강 왼편으로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교(浮桥)다.

 

남송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문학가인 홍매(洪迈)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배 3척을 하나씩 밧줄(缆绳)로 엮는 방식으로 모두 100여 척의 배가 동원됐다. 수운이 한창 발달했을 때는 이 부교가 하루에 두 번씩 열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벌써 900년이 넘게 이어온 다리이니 이곳 간저우만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부교는 배를 잇대어 묶어서 다리 구실을 하도록 한 것이다. 옛날에는 이렇게 강에 이런 교통로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자전거나 도보로 강의 남북을 연결해주고 있다. 성벽 앞으로 잔잔한 강물 위에 두둥실 떠나갈 듯한 쪽배들이 부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다리인 것이다.

 

 

다리를 건너 가면서 보니 의외로 아주 튼튼하다. 자세히 보니 목선도 있지만 철선도 있다. 배를 연결한 쇠사슬에 잠자리들이 가볍게 앉아있다. 늦여름 잠자리는 참 동작이 빠르면서도 자주 어딘가에 앉는다. 왜 잠자리들이 부교 위 배와 사슬 위에 이다지도 많은가. 잠자리도 9월이 넘었는데도 30도 넘는 더위에 지친 것인가. 부교 위는 비록 미풍이지만 강바람이 불어오니 시원한 편이다.

 

강을 건너니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강아지 대여섯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짐을 어깨에 얹고 부교를 오가고 있다. 다시 다리를 건너 되돌아오면서 보니 성벽이 참 길다. 중간에 성문들과 성 누각이 솟아 있기도 하다. 다리를 다 건너와서 보니 성벽에 바둑판 3개가 그려져 있다. 흰 돌과 검은 돌이 포석이 어느 정도 끝난 단계의 모습이다. 가까이 보니 아쉽게도 바둑 두는 진행상태가 아니라 그냥 대충 멋대로 돌들을 깔아둔 정도인 것 같다. 그 옛날 바둑 도사들의 명국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아쉽다.

 

 

강변 성벽을 따라 가니 광장에 중국 커자(客家) 사람들이 남방으로 이주한 것을 기념하는 제단과 기념비가 있다. 제19회 세계 커자 대회 기간인 2004년에 세워졌다 한다. 제단에는 높이 5미터에 이르고 다리가 셋인 동으로 제작된 솥이 있다.

 

이것은 커자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5차례에 걸친 대규모 천도(迁徒)를 한 것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3번의 발전과정을 거쳤으며 푸졘(闽), 광둥(粤), 장시(赣) 성 3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바로 장시 남부에서 형성(形成于赣南)돼 복건 서부에서 발전(发展于闽西)했고 광둥 동부에서 성숙(成熟于粤东)했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간저우는 커자의 요람(客家摇篮)이라 알려질 정도로 커자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나 보다. 중원에서 남방으로 이주한 것 자체가 기념하고 축하할 일인가. 어쩌면 그 속에는 중원지향적인, 아니 세계지향적인 그들의 자부심이 가득 담긴 듯 보인다. ‘客’은 손님이지 주인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손님으로 와서 주인행세를 한다’는 의미가 담긴 비아냥이 숨어 있는 커자인들은 이제 세계의 주인이 된 듯 강력한 경제력, 정치력을 기반으로 화상(华商)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으니 말이다.

 

이 커자라는 말이 생겨난 유래도 재미있다. 토객계투(土客械斗), 즉 토착민과 이주민이 무기를 들고 싸운 사건이다. 원래 남방으로 초기에 이주한 한족은 남방 민족들과 어울려 토착지주로 살아가고 있었고 나중에 이주한 지주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청나라 함풍(咸丰)제 시대 1854년 광둥 홍건군(红巾军)의 폭동이 광둥성 허산(鹤山)에서 일어났다. 많은 농민들도 홍건군에 참가하게 된다. 이때 토착지주와 이주민들은 동요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주민 지주의 아들이 홍건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모병을 해 청나라 군대와 합세해 난을 진압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후 이주민 지주들은 허산에서 마구 토지를 확보하려 하는데 이때 토착지주들이 ‘외지인이관을 등에 업고 토지를 약탈한다(客民挟官铲土)’며 들고 일어나 보복을 하게 된다. ‘계투’가 시작된 것이다.

 

토착지주들은 축객(逐客)을 명분으로 이주민 촌락으로 진입해 재산과 전답 등을 강제적으로 탈취하게 되고 그 폭동이 점차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토착세력은 조직화되고 지역간 연대를 도모하면서 이에 대응해 이주세력들도 군대를 만들고 병영을 세우게 되니 서로 전쟁에 가까울 정도로 큰 싸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전투구는 장장 12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이때부터 북방으로부터 이주해 온 세력을 커자라고 한 말이 굳어지게 된 것이라 한다.

 

쑨원, 덩샤오핑, 주더 등 중국 대륙을 움직였던 지도자들도 커자 출신이다. 전 타이완 총통인 리덩후이, 싱가포를 총리 고촉둥, 태국총리 탁신, 필리핀 대통령 아키노 역시 그렇다. 경제권에서는 아시아 최고 재벌이라는 홍콩의 리자청을 비롯 화상의 절반 이상이 커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성벽 위를 따라 걸었다. 강에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짐을 싣고 이동하는 배도 보인다. 성벽 길을 걸어가는데 사마귀 한 마리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한참 동안 사마귀가 움직일 때까지 함께 노려봤더니 눈이 다 아프다. 해가 서서히 지려는지 햇살이 점점 약해진다. 돌담을 따라 이어진 길이 평화롭다.

 

성벽 옆에 아담한 가옥이 하나 있고 입장료를 받는다. 장제스(蒋介石)의 장남 장징궈(蒋经国)의 옛집이다. 장징궈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직후 국민당에 가입해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 간저우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장징궈가 살았던 관저인 것이다. 그는 러시아 여자와 결혼했으며 이후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7,8대 총통을 역임하기도 한다.

 

 

간장 강변에 자리잡고 노을이 지면 더욱 포근해 보일 이 옛 가옥에 서늘한 강바람도 불어오고 있고 마당에는 풍성한 나무가 있고 꽃밭도 예쁜 마당도 있다. 실내에는 당시 사진을 비롯 책상 등이 전시돼 있기도 하다. 주변 부속건물들을 새로 단장하는 지 공사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커자'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주한 후 지주가 되고 군대를 이끌고 전투도 했으며 중국 최고의 상인으로 각인된 이미지도 보유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도 두각을 나타내고 상권을 장악한 경제인으로도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지난 5월 초 허난(河南) 성 샹쳐우(商丘)에서 '화상의 고향'이라는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중원 땅 샹쳐우는 상업의 도시로 유명한데 그곳을 자신들의 기원이라 확인한 것이다.

 

커자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중국문화기획자 - 180일 동안의 중국발품취재 
blog.daum.net/youyue 게재 예정


태그:#중국, #장시성, #간저우, #장징궈, #웨이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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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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